교회(敎會)에서 교회(交會)로
쇼펜하우어, 괴테와 니체가 천재라고 일컬었던 철학자, 톨스토이와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했고, 아인슈타인이 유일하게 존경했던 철학자이다. 철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규명하는 일을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의 삶에는 왜 이렇게 고통이 끊이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가, 등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와의 일체감이라는 두가지 욕망에 의한 딜레마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인데, 인간은 서로 좋은 취지에서 만나 인간관계를 이루어 가지만, 어느 시점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이 용어는 바로 위에서 말한 쇼펜하우어의 저서 <여록과 보유>에 수록된 우화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추운 겨울 어느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 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하였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Parerga und Paralipomena, Volume II, Chapter XXXI, Section 396 / 위키피디아에서 발췌)
우리는 모두 고슴도치 딜레마를 안고 산다. 이런 딜레마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서 더 빈번히 발생하고 경험하게 된다. 가족이 때로는 나에게 가장 큰 아픔을 주기도 한다. 친절을 베푼 사람이 돌을 던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좋은 마음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시작하나,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마치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프다.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방과의 일체감, 인간은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행복하다. 다른 말로, 인간은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함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 두 시간이 적절하게 유지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이 말에 시선이 간다. “인간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춥다. 온기 없이 살 수 없다. 그런데 그 온기는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오직 인간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은 철학서적이든 종교경전이든,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성경도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이런 구절을 본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함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창 2:24).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정립한다.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정치와 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도 그의 대표적 저서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런 철학자나 성경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깨닫는다. 언제 가장 행복한가? ‘인간관계’가 좋을 때이다. 언제 가장 불행한가? ‘인간관계’가 깨졌을 때이다. 오죽하면 잠언서에 이런 말까지 있겠는가.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 21:9). (이것은 잠언이 남성 중심적으로 쓰여졌다는 증거다. 여성 중심으로 쓰여졌다면, “다투는 남성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썼을 것이다.)
이 기사가 나왔던 2015년에 설교하면서 인용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연구소 소인장인 로버트 월딩어(Robert Waldinger)는 1939년부터 2014년까지 75년 동안 추적한 성인의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지난 75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얻은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는, 좋은 인간관계가 우리를 보다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구원 받아야할 가장 시급한 부분은 ‘인간관계’이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영어로 이렇게 표현한다. “If I have not love, I am nothing!” 우리 인간은 언제 가장 허무하고 힘드냐면, 바로 nothingness를 경험할 때다. 우리의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까? 바로 사랑이 없어서다. 또는 사랑이 부족해서다. 성경은 이 상태를 일컬어 ‘죄’라고 한다. 죄란 사랑이 없는 상태, 사랑이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나 죄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상태, 사랑이 부족한 상태를 죄라고 한다면, 구원이란 반대로 사랑이 충만한 상태를 말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도대체 구원 받은 사람인가, 우리 스스로 돌아볼 때, 부끄러울 따름이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에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무엇이 구원인지를 생각해 볼 때, 신앙생활은 결국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신앙을 통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바른 관계에 놓이다’라는 뜻이다. 미움의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미워한다면 그것은 바른 관계가 아니다. 바른 관계는 화평을 누리는 관계이다. 이렇게 화평을 누리는 관계에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사랑이 충만해져서 관계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한국교회는 교회는 많은데, 교회론이 굉장히 부족하다. ‘교회란 무엇인가’, ‘왜 교회인가’에 대한 질문이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교회론 분야를 공부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톨릭 신학자들의 책을 봐야 한다. 성경을 보면, 교회는 참 특이한 성격을 지녔다. 굉장히 초월적이다. 인종과 신분과 국가와 영역을 초월한다. 많은 이들이, ‘가정이 먼저냐 교회가 먼저냐’이런 질문과 고민을 하는데, 사실, 교회는 가정의 비교대상이 아니다. 가정과 교회가 비교대상이고 가정이 먼저였다면, 사도 바울은 결혼생활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고, 독신으로 살면서 교회를 섬겼다. 즉, 교회는 가정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정을 내팽개치고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적어도 ‘가정이 먼저냐 교회가 먼저냐’의 논쟁 같은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라는 뜻이다. 가정생활도 충실히 잘 하고, 믿음 주시는대로 교회도 잘 섬기면 된다.
예수원을 섬기신 대천덕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성경의 교회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가르칠 교’를 쓰는 교회()가 아니라 ‘사귈 교’를 쓰는 교회(交會)가 되어야 한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아주 뛰어난 통찰이다. 헬라어의 ‘에클레시아’, 그리고 영어의 ‘church’를 ‘교회(敎會)’로 번역한 데는 유교적 전통이 담겨 있다. 그리고 목사를 일컬어 ‘가르치는 장로’라고 말하는 장로교의 전통도 매우 유교적인 전통이 짙다. (물론 칼뱅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지만)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어 교회는 뭔가 가르침을 받는 서당 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리도 ‘성경공부’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훈장님(담임목사)이 학생들(교인들)을 가르친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의 구조가 기독교인 가정에까지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귐이 없고, 가르침만 있다. 그래서 교회나 가정이나 매우 권위적인 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가르침만 있고 사귐이 없는 구조는 예배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제사 드리는 것 같다. 개신교인들은 유교의 제사 제도를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엄청 내면화시키며 산다. 예배에 집착하는 모습이 제사의 내면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서 배웠듯이,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신다. 인애, 사귐이다. 하나님은 사귐을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와께 돌아가자’를 외치며, 또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은 사귐을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제사만 드리고 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외로우실까 싶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한국교회를 보라. 예배에 너무 집착하니까, 전염병 도는 이 시대에,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가. 사귐을 우선한다면, 이웃에게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을 하려 들겠는가. 이런 것만 봐도, 한국 교회는 여전히 교회(交會)가 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꾸 교회를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 자꾸 가정을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 서로 가르치려 드니, 다툼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이게 옳은 거다, 저게 옳은 거다. 내가 옳다. 당신은 틀리다.’ 이러지 말고, 그냥 좀 사랑해주면 안될까? 우리들 사이에 ‘사귐’이 충만했으면 좋겠다. 교회(敎會)에서 교회(交會)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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