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법
(마태복음 14:22-33)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있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앞마당에 여러 조형물이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장면을 조형해 놓은 것이다. 수많은 성경 이야기 중 그 이야기를 조형해 놓은 것이 궁금했다. 물론 관계자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물 위로 걸으시는 예수님의 조형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묵상했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아뢰며, 묵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다.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 어느 순간부터 ‘믿음’의 의미가 변질되는데, 다름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이러한 성경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믿느냐 믿지 않으냐의 문제로 전락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 신앙인이고, 안 계시다고 믿으면 신앙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용어가 어느 순간부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혼란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히려 최근의 일이다. 지식에 대한 과학적 방법과 근대과학을 낳은 계몽주의에 의해 탄생한 것이 바로 ‘문자적 읽기’와 ‘성경무오설’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히려 낯선 성경읽기 방법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성’은 성경읽기에 대하여 오해와 왜곡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인해 기독교는 오히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여러가지 병폐를 낳는데, 첫째로 성경과 기독교의 의미를 축소하고, 획일화하며, 왜곡하기까지 한다(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32쪽). 이것은 필연적으로 기독교 파시즘을 낳을 수밖에 없다. 둘째, 세상과의 소통을 방해한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왜곡한다. 일례로, 문자주의의 영향 아래 발전된 ‘창조과학’은 일반적 과학지식과 충돌을 일으킨다. 창조과학은 창세기의 족보를 문자적으로 계산하여 지구 창조가 기원전 4004년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즉, 지구의 나이를 약 6천년 정도로 본다.
(한가지 문제를 내겠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organism(생물체) 두 가지가 무엇인가? 나무와 박테리아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큰 아들 건유는 ‘God’ and ‘Jesus’로 답했다. 웃기지 않는가?)
문자적 성경읽기의 병폐 세번째는 기독교가 자꾸 사회적 갈등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한국에서 보는 바이다. 미국에서는 보수 개신교회가 팬데믹인데도 불구하고 교회 문을 열어서 예배를 강행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예배드리는 우리들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예배를 강행했던 수많은 교회에서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갈등 대부분은 기독교가 촉발하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대북정책과 평화통일문제(이념논쟁/빨갱이), 불평등문제(세습), 부채문제(건축으로 인한 대출), 종교평화문제(갈등) 등 사회갈등을 봉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만들고 심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건전한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역사-은유적 읽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읽기’를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읽기 하면, ‘그거 역사적인 건가요? 그 일이 실제 일어났나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다는 뜻은 성경과 기독교의 용어를 그것이 비롯된 과거의 역사적 상황 속에 놓는 것을 말한다(마커스 보그, 33쪽). 일례로 이런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 공동체에서 이것을 무엇을 의미했을까를 묻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그때 거기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물은 후, 그 이야기를 지금 여기로 가져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그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에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보며, ‘베드로는 참 믿음이 없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만다면,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못하는 것은 베드로와 같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또한 성경은 은유적으로 읽어야 한다. 언어는 그 본질상 은유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일 수밖에 없다. “은유란 언어가 지니는 ‘잉여 의미’에 대한 것이다”(마커스 보그, 36쪽). 은유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중요하지, 그것의 사실성이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읽으면서 선한 사마리안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실제 존재를 따지지 않는다. 탕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21세기에 살면서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온갖 혜택은 다 누리고 살면서, 성경을 읽는 방식에서 오히려 퇴보하여 문자적 읽기에 머물러 있어 성경이 주는 풍성한 영적인 혜택은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육신은 날로 살찌우고 있지만 우리의 영은 날로 빈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극인가. 이 시대 사람들의 물질적 풍요에 가려진 영적 빈곤은 처참하다. 오히려 본문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물을 걷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물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빠질지 모른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빠져서 허우적대다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복음서가 쓰여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랬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온 시간이 ‘사경’이다. 사경은 새벽 3~6시이다. 동트기 전, 가장 깜깜할 시간이다. 그들의 삶이 그랬다. 깜깜했고,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어둡고 험한 삶 가운데, 예수님은 다른 곳에 계시지 않고, 자신들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베드로와 같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특별히 마태복음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의 수장이다. 수장인 베드로조차도 물에 빠질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고, 믿음이 약해져 갔다. 그러니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조차 없다.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칠흑 같은 밤에 놓인 것이고,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과 행동에서 그것을 배운다.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렇다! 우리는 어둡고 두려운 인생 가운데,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를 외쳐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면 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지금 마태복음 공동체에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 가장 오해되고 있는 개념 중 하나는 ‘자유’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기자가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하는 것을 보았다. “코비드19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자유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나는 몇 번 이야기를 했다. 자유는 개인주의적 용어가 아니라 관계적 용어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게 자유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하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냐!’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 영적 빈곤을 불러오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자유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 인한 ‘관계의 느슨함’이다. 믿음도 우리는 자유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믿고 안 믿고는 내 마음이야. 내 자유야.’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든 관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가족에 대한 관계도, 이웃에 대한 관계도, 친구에 대한 관계도,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도, 교회에 대한 관계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도 느슨하게 만든다.
저명한 사회작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액체근대>라는 말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졌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미명 아래. 바우만은 우리의 시대를 분석하면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견해를 거론하며, 우리 사회에 점차 변해가는 ‘좀비 유형들’, ‘좀비 제도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특별히 가족제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날
가족이란 것이 실상 어떠한지 자문해보라.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자식들, 내 자식들, 우리 자식들이 있다. 그러나 가족생활의 핵심인 부모의 역할은 이혼이라는 상황 때문에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들 아들딸들의 결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포함되거나 배제된다. 손자들의 관점에서 조부모라는 의미는 개인의 결정과 선택으로 결정이 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지그문크 바우만, <액체 근대>, 14쪽).
사실 이런 것은 뼈아픈 분석이다. 이 사회의 좀비 제도의 예로 가족제도를 대표로 들긴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직장에서의 관계의 느스함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다. 직장과 직장 동료들에게 무슨 애정을 가지는가. 그저 주어진 일 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다. 애사심, 동료애, 그런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느슨한가. 각자의 삶에 발생하는 삶의 문제를 진심으로 나눌 수 있는 끈끈한 형제애가 우리들에게 있는가? 오히려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얘기해 봤자 구설수에 오른다고 생각한다. 약점 잡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서로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관계를 부담스러워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이다. 나훈아의 갈무리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서러운 마음 나도 몰라.” 마치 나 자신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나 스스로의 관계에서도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산다. 말 그대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며 산다.
이러한 일련의 관계의 느슨함 때문에 겪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불안이다.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딱 침범 당하기 쉽고, 이용 당하기 쉬운 감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황장애와 불안증,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불안하니까,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줄 ‘그 무엇’에 쉽게 빠진다. 중독 현상이 판을 친다. 약물중독, 쇼핑중독, 종교중독!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물 위를 걷고 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사경 쯤에 물 위를 걷는 것과 같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정말 신앙이라면 가장 근본적인 관계부터 다시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한다.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찬송을 부른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찬송가 364장).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는 기도를 하기는 하는가? 가장 즐거운 시간은 기도 시간이 아니라 혼자서 밥 먹으며 드라마 보는 시간 아닌가?
우리는 이런 찬송도 한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기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찬송가 382장).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걱정 근심 가운데 살아가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 외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 많은가?
우리는 지금 물 위를 걷고 있는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가. 현대의 소비문화는 우리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불안에 대한 가짜 치료제를 주어, 불안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하게 만든다. 불안이 계속 조장되어야지만, 물건을 계속해서 팔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은 우리의 관계의 느슨함을 이용하여, 거기에서 오는 불안을 이용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한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가족,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교회,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나 자신, 누가 가장 좋아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물 위를 걸어야 하는데, 물 밑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으니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영향력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어보자. “주 예수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쳐보자. 물 위를 걷는 우리들을 보고,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웃들이 힘을 낼 것이다. 물 위를 걸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것 아니겠는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 어떻게 하는가. 물 위를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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