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24. 04:00

참 벽돌 집

(마태복음 7:24-27)

 

아마도 누구든지 오늘 예배가 추모예배인지, ‘추도예배인지, 어떤 용어를 써야할 지 헷갈릴 수 있다. 추모(追慕)라는 말과, 추도(追悼)라는 말은 모두 한자어로, 그 뜻을 정확히 알려면 한자의 뜻을 알아야 한다. 추모에서 쓰이는 그리워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추모예배는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는 예배라 할 수 있다. 추도에서 쓰이는 슬퍼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추도식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예식의 뜻을 지닌다. (참고로, ‘사도세자에서 영조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내린 시호로 유명하다. ‘사도는 생각할 에 슬퍼할 를 쓴다. 아들을 생각하면 슬픔만 가득하기 때문에, ‘사도세자라고 한 것이다. 참 슬픈 시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추도예배는 그 뜻이 좀 다르다. 추도예배는 한국의 명절에 한국인들이 조상님들께 드리던 제사와 대비되는 예식이다. 기독교인은 조상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조상을 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제 1원칙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졌을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제사논쟁을 겪었다. 그러면서 생겨난 용어가 추도예배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조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말하고 있듯이, 기독교에서 부모 공경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추도예배는 고인을 추모하고, 생전의 은덕과 뜻을 기리며, 가족들의 신앙을 독려하고 화목을 다지는 기회를 가지는 예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절에 드리는 예배를 뜻한다. 추석명절이나 설명절 같은 때에 드리는 예배가 추도예배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고인의 기일에 드리는 예배이므로, ‘추모예배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움은 그냥 감정낭비가 아니다. 그리움은 과거로 돌아가는 행위인데, 우리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과거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를 열어젖히기 위해서이다. 이 작업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그리움은 그야말로 감정낭비에 머물고 만다. 감정을 소모한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가. 힘든 일을 했는데 아무것도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짧은 단상도 쓰고, 시도 쓰고, 공부한 것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쓰고, 설교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그리고 일기를 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이 지나면 모두 과거가 된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나의 과거로 돌아가 그 글들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매우 상상력속에 산다. 그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상상력은 내일도 나는 눈을 뜰꺼야라는 상상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이 상상력이 언젠가는 틀리는 날이 올거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내일의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산다. 이러한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불안해서 하루도 못살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지만, 실제로 하루만을 살지 않는다.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그리고 노후도 생각하고 준비하며 산다. 먼 훗날을 생각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늘 고민스러운 과제를 안고 산다.

 

성경에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가득하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모두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반석 위에 지은 집 같이 든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소망은 같으나, 그 소망을 이루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자신의 집을 든든하게 하는 반석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기돼지 삼형제(The Three Little Pigs)라는 동화가 있다. 동화는 어린이들 위한 책이지만, 실은 동화만큼 어른이 읽어야 하는 책도 없다. 나는 언젠가 동화책을 쓰고 싶은 소망도 있다. 동화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유일한 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한 시간이 바로 동화책을 읽는 시간이다.

 

아기돼지 삼형제, 동화이고, 간단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지만, 그 깊이는 대단하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그들의 삶은 즐거웠다.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삼형제는 각자 자신이 가치 있는 것에 기대어 집을 지었다. 첫째 돼지는 지푸라기(straw)로 집을 지었다. 푹신하고 나름 살만 했다. 집을 짓는 데 그리 힘이 들지도 않았다. 둘째 돼지는 나뭇가지(sticks)를 가지고 집을 지었다. 지푸라기로 지은 집보다 든든했다. 그래서 둘째 돼지는 자신의 집이 첫째 돼지의 집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셋째 돼지는 벽돌(bricks)로 집을 지었다. 셋째 돼지의 집은 차원이 달랐다. 지푸라기로 짓는 것보다, 나뭇가지로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웠다. 시간도 많이 걸렸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벌써 집을 다 짓고 놀고 있을 때, 셋째 돼지는 그들과 함께 놀 시간이 없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가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벽돌도 만든 집을 완성했다. 행복했다.

 

어느 날, 동네에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의 속셈은 돼지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늑대가 친근한 목소리로 문을 열어 달라고 했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집에 꼭꼭 숨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늑대는 본색을 드러내고 첫째 돼지가 만든 지푸라기 집을 바람을 날려버린다. 집이 순식간에 허물어진 첫째 돼지는 둘째 돼지 집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둘째 돼지 집도 늑대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둘은 셋째 돼지의 벽돌집으로 도망쳤다.

 

두 돼지의 집을 어렵지 않게 무너뜨린 늑대는 셋째 돼지의 벽돌 집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집을 무너뜨리려고 별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늑대는 결국 상처만 입고 아무런 소득 없이 쫓겨가고 만다.

 

오늘 본문은 아기 돼지 삼형제를 생각나게 한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니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24-25).

 

우리는 실제로 벽돌 집에 산다. (물론 캘리포니아는 지진의 위험 때문에 집 지을 때 벽돌 대신 나무를 사용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그 집이 정말로 우리들의 모든 것을 지켜주는가? 그 안에 있으니, 손톱만큼의 불안도 없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늘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는데, 불안을 조성하는 게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져보자는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며, 우리는 지금 단순히 우리의 감정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무엇을 가장 바라셨을까, 자식들을 생각할 때 바깥으로 표현은 하지 못하시고,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라 못해 주셨지만, 무엇을 해주고 싶으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버지 방 치우다, 아버지가 쓰려고 남겨두신 돈을 발견했다. 그거 발견하자마다, 내가 원장님께 그랬다. ‘아 큰일 났네요. 이거 보도 딸들 또 울겠네요.” 아니나 다를까, 진주 자매가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돈을 남겨 주고 싶으셨을까?

 

부모의 마음이 다 똑같다고, 자녀들에게 벽돌 집을 지어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본인이 없더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해를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벽돌 집’. 물론,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생이라, 아버지라 할지라도, 무엇이 진정한 벽돌 집일까,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방황하고 저리 방황한다. 그러나, 인생의 끝에 가서 무엇이 진정한 벽돌 집인지, 생득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극명하게 깨달은 사람이 여호수아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4-15).

 

우리는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순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하셨다. 아버지를 품에 안아 그의 생명을 거두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아버지를 들이셨다. 하나님은 결코 그 어떤 존재도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우리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아버지의 추모예배를 맞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장 원하셨던 벽돌 집’,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벽돌 집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모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참 벽돌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지푸라기 또는 나뭇가지와 비교할 수 없는 벽돌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주추를 반석 위에 놓는 것과 같다. 어떤 집이든 주추가 튼튼하지 않으면 폭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면 휩쓸려 내려가고 만다. 신앙으로 지은 집은 집은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것과 같다. 신앙으로 지은 지은 셋째 아기 돼지가 지은 벽돌 집과 같아서, 늑대가 아무리 쳐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올 수 없다. 그런 집에서 자녀들이 사는 게, 아버지의 소망 아니었겠는가.

 

자녀들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부모님을 중심으로 뭉치고 가깝게 지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자녀들은 구심점을 잃는다. 가까운 거리에 살아도 관계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에 정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아주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는데, 모든 거리를 초월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게 신앙의 신비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만큼 형제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없다. 돈이 많으면 분쟁이 일어나지만, 신앙은 있던 분쟁도 멈추게 하고 평안을 준다. 그러므로, 참 벽돌인 신앙으로 벽돌 집 짓기를 간절히 권면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1추기 추모예배를 드리며,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 돌아가신 아버지를 품에 안고 계실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이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그 간절한 바램이 모든 자녀들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기도문

 

주님, 우리는 고 이정헌 집사님의 1주기 추모예배에 모여,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아버지가 자녀들을 향하여 어떤 소망을 가지셨을까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하지만,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큰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버지의 1추기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우리가 참 벽돌인 신앙으로 벽돌 집을 지을 때,

우리를 해하려는 그 어떤 늑대도 우리의 신앙의 집, 벽돌 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주여, 이 험한 세상,

생명력 있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만이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주춧돌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모든 형제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사는,

고 이정헌 집사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족들을 붙들어 주실 줄 믿으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니엘  (0) 2020.08.04
우리 몸이 성전이라면  (0) 2020.07.27
일상의 부활  (0) 2020.07.20
무겁게 여기는 자  (0) 2020.07.14
위로  (0) 2020.07.0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