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7. 07:30

위로

(창세기 24:61-67)

 

창세기는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완성해간다. 창세기의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는 이야기는 호흡이 가장 길다. 이삭이 아내를 얻는 이야기는 이삭의 엄마 사라가 죽은 다음에 전개된다. 사라가 이삭을 얼마나 귀하게 키웠겠는가. 이삭은 엄마 사라에게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늦게 낳은 사람일수록 자식을 귀하게 키운다. 자식을 일찍 낳으면 자식 키우는 즐거움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자신도 어리기 때문에 감당이 잘 안 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대개 자식을 늦게 낳은 부모는 자기 자식을 손자보다 더 사랑한다. 그런데, 자식을 일찍 낳은 부모는 자기 자식보다 손자를 더 사랑한다. 몰랐던 기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도 떠나가고, 늙어버린 아버지 아브라함은 뭔가 비장한 마음으로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어주려 한다. 그 비장함은 늙은 종을 불러 행하는 의식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그리고 의식(ritual)을 치룬다. 이삭에게 아내를 얻어주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요즘 결혼풍속도를 보면, 결혼이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목회와 커피 장사를 겸하시는 지인 목사님의 보고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할 때 주례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은 인륜지대사로서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지만, 이제 그러한 통념도 바뀌고 있는 듯하다. 실로, 우리는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거다.

 

준엄한 의식이 치러지고,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얻으러 하란 땅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준엄한 의식에 걸맞은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며(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부른다), 모두의 마음이 기쁜 혼인이 성사된다. 물론 혼인성사의 과정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다르다. 종이 아내를 얻으러 하란 땅으로 갔고, 종의 증언을 듣고, 라반과 어머니는 딸을 내어준다. 그리고, 리브가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 이삭을 자신의 남편으로 삼겠다고 종을 따라 나선다. 연애를 통해 결혼에 이르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기나긴 여정 가운데, 리브가와 이삭이 드디어 만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은 매우 뭉클하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참 따스한 문장이고 장면이다. 자신을 귀하게 키워준 엄마를 상실한 슬픔이 컸던 이삭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었는데, 드디어 아내를 얻음으로 위로를 받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기쁨과 의미를 상실하게 될 때가 있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상실하는 일은 인간에게 참 치명적이다. 기쁨과 의미가 없는 삶만큼 힘들고 어려운 삶이 없다.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위로를 얻었다는 뜻은 삶의 기쁨과 의미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로가 삶 속에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메마른 삶이 될까.

 

성서정과에 의해 함께 읽어야 하는 바울의 서신서 중 하나인 로마서를 보면, 바울은 기쁨과 의미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본다. 그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 기독교 인간론을 매우 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아마, 이 구절을 접한 사람은 이 구절을 통해 자기 실존을 표현하길 즐길 것이다. 나도 살면서 실존의 비극을 경험할 때 입에서 저절로 이 말씀이 나온다. 그러면서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를 구원해주세요.”

 

여기서 곤고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탈라이포로스는 육체적인 고생으로 인해 겪게 되는 심한 고통이나 힘든 일을 겪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어떤 절망의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절망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왜 바울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까?

 

바울은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내 안,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압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입니다. 내가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안에서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봅니다.”(7:18-20, 22-23 / 우리말 성경).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참 이상한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리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막상 행동을 하면, 이상하게 그토록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게 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왜 그럴까? 내 지체 안에 있는 하나의 다른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 다른 법을 바울은 죄의 법이라고 부른다. ‘죄의 법’,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법이다. 온갖 악한 일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바울은 우리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로마서 723절은 그것을 아주 잘 담아내고 있다.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문장에서 쓰이는 단어는 모두 전쟁용어이다. “싸워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스트라튜오메논적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가다’, ‘전쟁을 일으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다. 또한, “사로잡는 것을로 번역된 헬라어 아이크말로티존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전쟁 포로를 사로잡다’, ‘적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다는 뜻을 지닌 동사이다.

 

바울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 마음은 실상 전쟁터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우리는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이 죄의 법에 의해 전쟁포로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쟁도 끔찍하고 혼란스러운데, 그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만큼 절망도 없다. 바울이 살던 로마시대에 의하면, 전쟁포로는 무조건 노예가 되었다. 노예의 삶에 무슨 기쁨과 의미가 있을까. 노예는 죽지 못해 살거나,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보낼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상심해 있었던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얻음으로 위로를 받았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되찾았다. 그런데, 바울은 아주 근본적은 인간의 상심과 절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실은 전쟁터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편을 속이고 기만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트 대통령은 이번 연말에 있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지 못할까봐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팬데믹의 상황을 자꾸 속이고 기만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트럼트 대통령의 행태는 겉으로 드러나고 그 술수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욕을 먹는 것이지만, 실상 우리는 모두 그러한 기만을 부리며 산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편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삶의 형편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선각자와 선지자들이 생태 위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고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제인 구달이다. 1960, 26살의 나이로 탄자니아의 한 숲에 들어가 침팬지와 더불어 살며 침팬지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환경운동가로 변신하여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태 위기를 전했다. 1980년대부터 생태 위기를 전했으니, 40년 동안이라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팬데믹을 맞아 적나라한 우리의 삶의 형편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서야 그녀의 외침이 귀에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제인 구달은 희망론자이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이 우리가 그동안 잘못 살아왔구나라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기 때문에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편을 정직하게 직면할 때 오히려 희망을 말할 수 있고 꿈 꿀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곤고함을 고백한다. 이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처절한 경험이다. 인간은 어떠한 일이든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삶의 형편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지금 생태 위기를 사건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전보다 더 많이, 더 심각하게 생태 위기를 말한다. 이번에 준비를 잘 하지 못하면,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면, 우리는 매우 치명적인 생태 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삶의 방식을 이번에 바꾸지 못하면, 식량폭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식량이 부족하여 수많은 인류가 굶어 죽을 것이고,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이 발생할 것이고, 식량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이다.

 

바울이 인간 실존의 곤고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유는 인간을 욕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본인이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바랄 수 없다. 그리고 구원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러나 자신의 곤고함을 안다면, 인간은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을 갈망할 수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누가는 누구인가?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구원의 갈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우리의 실존이 그 어느 때보다 절망에 놓여 있다. 우리의 실존이 그 어느 때보다 구원을 갈망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이 즐거운 복음을 접했다.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기쁨과 의미를 상실한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기쁨과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소망이 있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배워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의 입술에 두자. 그러면, 우리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의 부활  (0) 2020.07.20
무겁게 여기는 자  (0) 2020.07.14
선물  (0) 2020.07.01
예배자  (0) 2020.03.16
내어줌 - 종의 노래 4  (0) 2020.03.11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