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20. 09:35

일상의 부활

(창세기 28:10-19 / 로마서 8:18-25)

 

학창시절, 수학과 지구과학을 공부하고 나면, 으레 친구들끼리 하게 되는 계산이 있다. 지구의 자전속도와 공전속도를 계산하는 것이다. 지구둘레 4km24시간으로 나누면 된다. 자전속도는 위도에 따라 좀 다르다. 지구의 평균자전 속도는 시간당 1,667km이고, 한국의 자전속도는 1,337km이다. 그러면, 극지방의 자전속도는 얼마일까? 0(zero)이다. 지구의 평균 자전속도는 대략 마하 1.2 정도 된다.

 

그렇다면, 공전속도는 얼마나 될까? 공전속도 계산하는 방식은 좀 더 복잡하다. 복잡한 계산 방식을 생략하고 그 결과만 보면, 지구의 공전속도는 시속 107,160km이다. 이는 마하 87의 속도이다.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행성에 살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아보아 알지만, 어떤 물체가 속도를 내서 달리면 거기에는 소음이 발생한다. 사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으로 인해 엄청난 소음을 내고 있지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음의 주파수는 20hz부터 16,000hz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소음을 들을 수 없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피조물에 대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피조물에 대하여 매우 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서 비롯되는 소리를 못 듣는 것처럼, 피조물이 내고 있는 탄식소리도 못 듣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엄청난 소리를 생산한다. 우리가 어떠한 장치를 개발하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장치를 통해서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내는 소리를 듣는다면 매우 신기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외감 같은 것이 솟아날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우리가 평소에 듣지 못하는 피조물의 탄식에 대하여 말하며, 그 탄식이 무엇인지를 귀에 들리듯들려준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바울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 피조물은 탄식하고 있다. 탄식하는 자들에게는 그 탄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갈망이 있는데, 탄식하는 피조물의 갈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익숙한 세대는 하나님의 아들들어벤져스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히어로(hero)’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유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 자신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피조물이 믿는 듯하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굴복하고 있는 허무한 것은 무엇일까?

 

20절에서 진술되고 있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죄의 법을 말한다. 피조물은 죄의 법 아래 놓여, 죽음에 이른다. 실제로, 피조물은 모두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 존재가 사라진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죽음을 향해 간다. 그것은 바울의 말대로,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창조주 하나님)로 말미암은 것이다.

 

끝이 죽음인 피조물은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생명 앞에서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바울의 논의에 따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부활을 경험한 자이다. 부활은 죽음의 극복인데, 부활을 경험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며 바라는 것은 부활이라는 것이다. , 죽음의 극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 바라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했고,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발생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삼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피조물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왠지,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다. ‘하나님의 아들’, 그러면, 뭔가 좀 특별한 재능을 지니거나, 범상치 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높은 도덕성을 지녀야할 것 같은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여전히 실수투성이인 인간이고, 부족한 인간이고, 죄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고 부끄러워한다.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게 먼저인 것 같다. 그러나 조금 힘을 내야할 것은 그렇게 실수투성이고,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로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의 자기의로움이 구원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복음의 부르심을 따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가 그 정체성을 입은 자들로서 해야 할 일을 인식해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부활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부활을 두 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좀 더 가깝게 인식하기 위하여 편의상 이렇게 나누는 것이 좋다. 이것은 나의 용어이다. 큰 부활(eternal life/종말의 부활)과 작은 부활(earthly(temporarily) life/일상의 부활)이 그것이다. 우리는 부활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부활을 삶 속에서 별로 경험하거나 실천하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하게 큰 부활/종말의 부활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만다.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경험하는 부활은 큰 부활보다는 작은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죽어가던 것이 다시 살아나면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부활을 주는 존재인데,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부활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면, 이제, 바울이 자연에 대하여 매우 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동일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연 속에서 사망의 고통 가운데 부활을 소망하며 탄식하는 피조물을 발견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탄식하는 피조물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소음을 관찰할 수 있듯이,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피조물의 탄식을 들을 수 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심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구원을 넘어서 피조물의 탄식을 듣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개인성을 말하지 않고 신앙의 공공성을 말한다. , 구원은 내가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발견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내가 탄식하고 있듯, 다른 이(이웃)도 탄식하고 있다. 탄식하고 있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탄식하고 있는 이웃에게도 전달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우리를 일컬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한다(23).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부활을 내재하는 열매다. 우리는 대개 성령의 열매하면,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떠올린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그런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다. 일차적으로 성령의 열매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성령의 열매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부활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부활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는 사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고, 인간론이다.

 

부활을 품고 있는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부활을 잉태한다. 일상의 부활. 부활을 너무 큰 개념으로만 보면 우리는 부활을 잉태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은 큰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되는 게 아니라 작은 개념을 통해서 발생한다. 일상의 부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모두 일상의 부활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누군가(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의 탄식에 귀 기울이는 것, 그래서 그 탄식하는 피조물에게 조금만 사랑을 베풀고, 눈물을 닦아주고, 용서하고, 조그만 선을 행하고, 인내하는 것, 그래서 그 피조물의 탄식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이미 일상의 부활을 이룬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깊은 탄식 가운데 있는가. 매일 같이 죽음을 경험하면서 산다. 그리고 우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험한 일을 당할까봐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 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백신을 개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부활을 경험하는 게 더 중요하다. 가족끼리 서로 따뜻한 말 한 마디 주고 받는 것, 그리고 교회 공동체들끼리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안부를 물어봐 주고, 전화 통화를 하거나 줌 미팅을 통해서, 또는 SNS를 통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등은 우리가 일상의 부활을 서로 나누게 되는 통로이다.

 

로마서 말씀과 같이 나눈,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다 잠시 머문 벧엘에서 그동안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든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부활을 경험한 우리들이 반드시 깨달어야 하는 진리이다.

 

부활의 열매들인 우리들은 야곱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든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신 것을 보아야 하고,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인 것을 아는 것이 부활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하늘의 생명을 계속 퍼다 나르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일상에 즐비한 죽음을 몰아내고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일상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의 부활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피조물의 탄식이 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드리운 죽음을 몰아내 줄 수 있는 부활을 품고 있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다.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 죽음에 매어 있어 생명을 갈망하는 존재들에게 희망이 되는, 일상의 부활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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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