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14. 05:27

무겁게 여기는 자

(창세기 25:27-34)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의 특성이 공존한다는 뜻이다. 첫째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해 보면,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뭔가 두 개의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 대립적인 요소, 한 단어씩으로 표현하면, ‘영과 육이라는 것을 대한 이원론적인 요소로, 선과 악의 구조로 파악하면 영지주의에 빠지고 만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적인 면은 선한 것이고, 인간의 동물적인 면은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은 선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은 기독교 2천년 역사는 끊임없이 영지주의와 싸워 온 역사인데, 아직까지 영지주의의 영향권에서 못 벗어난 듯하다. 이는 우리가 바이러스의 영향에서 못 벗어난 것과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무서운 게 아니라 사상의 바이러스 또한 그것 못지 않게 위험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몸을 죽이지만, 사상의 바이러스는 이성 또는 영을 죽인다.

 

여러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기독교 교육론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교훈이다. 어거스틴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우리가 해야 할 네 가지의 사랑을 말한다. 첫째는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넷째는 우리 아래에 있는 물질에 대한 사랑이다. 네 가지 사랑은 다 중요하다. 이 네 가지의 사랑은 우리 인간을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적(또는 영적)’에 해당하는 사랑과 동물적(또는 육적)’에 해당하는 사랑은 어렵지 않게 나눌 수 있다. 이성적 또는 영적 사랑에 해당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동물적 또는 육적 사랑에 해당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 사랑과 물질 사랑이다. 모두 다 중요한 사랑이다. 이성적 사랑도 중요하고, 동물적 사랑도 중요하다. 어느 하나가 모자라면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성적/영적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동물적/육적 사랑,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물질을 사랑하는 것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아주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이다. 이러한 정서에 머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성적/영적 사랑과 동물적/육적 사랑은 모두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로 모순된 우리의 모습은 정서적으로 이성적/영적 사랑을 동물적/육적 사랑보다 가치 있게 여기면서도, 실제의 모습은 가치 있는 이성적/영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가치 없다고 여기는 동물적/육적 사랑을 실천하는 데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마음으로는 그래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니까 이렇게 살아야 해하면서도 겉으로는 동물적인 선택을 한다.

 

우리는 그 모습을 에서에게서 본다. 본문에서 두 개의 가치가 대립하고 있다. 에서에게는 이성적/영적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라고 말한다. 이와 동시에 에서에게는 동물적/육적 사랑도 존재한다. 피곤함과 배고픔이다. 요즘 말로, ‘먹고사니즘이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먼저 나오려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다가, 결국 에서가 먼저 나왔고, 그게 엄청 속상하고 아쉬운 듯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그래서 이름도 야곱(Jacob, 발뒤꿈치를 붙잡은 자)’이다. 이 둘은 자라면서 당연히 장자의 명분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장자의 명분을 가지게 된 에서는 내심 기뻐했을 것이고, 그것을 빼앗긴 야곱은 낙심했을 것이다.

 

그러한 심리가 반영된 듯, 에서와 야곱은 장성하면서 사뭇 다른 성향을 지니게 된다. 27절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27).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두 단어, ‘익숙한조용한은 매우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익숙한이란 덫을 놓고 속이는데 익숙하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가 익숙한 사냥꾼, 들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장자의 명분의 중요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우리가 논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에서는 자라면서 이성적/영적사랑을 소홀히 하고동물적/육적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조용한으로 번역한 히브리어의 경건한, 완전한 순결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경건한성품을 야곱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하고 말하는 주석도 있으나, 야곱이 성경의 다른 인물, 노아와 같이 경건한사람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야곱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장자의 명분에 대한 갈망은 깊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 성장하면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게 되었지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며 갈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 이성적/영적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변해갔다는 뜻이다.

 

사람은 참 묘하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은 잘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고, 또한 본인이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키우는 경향이 있다. 에서는 본인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지켰어야 했다. 야곱은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위로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을 세워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둘의 운명은 얄궂게 엇갈린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큰 이야기들(거대서사)이 사라지고, 작은 이야기들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리는 이렇게 큰 위기(팬데믹)를 맞이했다. 우리는 에서가 큰 이야기인 장자의 명분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큰 이야기들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간다. 더 이상 우리들의 대화 속에는 큰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 않는다.

 

TV 프로그램을 봐도 알 수 있고, 우리가 모여서 나누는 일상의 대화, 그리고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얼마전 KBS개그 콘서트가 막을 내렸다. 그보다 훨씬 일찍 SBS웃찾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히 코미디 프로그램이 폐지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거대서서(큰 이야기들)’이 사라진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코미디 프로그램이 말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시를 메운 것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육아 예능, 연예인들의 잡담/잡기를 보여주는 예능, 또는 삼시세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에 가득 들어서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풍자이다. 특별히 정치적 풍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희화시켜 꼬집으며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한 정치적 풍자는 거대서사에 속한다. 일상을 넘어선 큰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러한 큰 이야기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먹고사니즘에 찌들다보니, ‘장자의 명분같은 것을 지키고 생각하는 것을 피곤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딱 에서의 모습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 현상을 보자. 팬데믹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 인간이 큰 이야기들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온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우리는 얼마나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사랑의 가치들을 소홀히 해왔는가! 지난 15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러한 큰 이야기들은 내팽개치고, 오직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만 전념했다. , 우리는 너무 작은 이야기들에만 몰두해 살았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한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고, 매일 10만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5달러짜리 백신이 없어서 질병에 죽어가거나, 1달러짜리 모기장이 없어서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죽어가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거대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한 약자,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웃 사랑, 또는 하나님 사랑에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는 개인의 일상에만 관심을 둔다. 먹는 거(SNS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사진이 음식 사진이다), 주거, 관광, 레저, 개인의 심리적, 성적 취향 등에만 관심을 둔다.


요즘 한국과 미국에서는 팬데믹 때문에 여러가지 사회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한 가지, 종교계와 관련된 것은 보건 당국이 발표한 소모임 금지, 또는 찬송 금지에 대한 기독교계의 분노가 만만치 않다. 이것은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문제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치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기독교인들이 소모임 금지나 찬송 금지에 대하여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의종교적 일상이 침범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려야 살고, 소모임을 통해 친밀한 인관관계를 유지해야만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인 종교적 예배와 소모임으로 나타나다 보니 매우 영적인 듯 보이나,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동물적이고 육적인 행동이다.

 

팬데믹은 거대서사다. 지금 내가 피곤하고 배고프다고, 장자의 명분을 헐값에 팔 수는 없다. 피곤하고 배고프더라도, 이성적/영적으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웃에 대한 배려를 위해서라도 자기의 일상을 자발적으로 헌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여전히, 자기 사랑에 파묻혀 자기 자신의 바깥의 이야기에 신경을 끄고 사는가.

 

우리에게는 무겁게 여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장자의 명분’, 큰 이야기기들(거대서사: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사랑, 지구환경, 통일)을 소홀히 여기며 살았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먹고사니즘에 빠져 작은 이야기들(먹는 거, 노는 거, 주거, 관광, 레저 등 소비하는 데만)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쉽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에서들이 되었다.

 

작은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다가, 큰 이야기가 닥치니 우리는 모두 패닉에 빠진 듯하다. 그래서 저항이 만만치 않고, 사회분열이 극에 치닫고 있다. 어찌해야 할까. 그동안 우리는 너무너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즉 동물적/육적 사랑에 치우쳐 살았다. 이제는 사랑의 균형을 맞추어 좀 더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즉 이성적/영적 사랑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 그렇지 않으면, 2, 3의 팬데믹이 몰아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우주에서 살아지고 말 것이다. 이 준엄한 현실을 무겁게 여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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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