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1. 05:04

선물

(창세기 22:1-14)


성경에는 괴상한 이야기들이 많다. 잔인하고 부도덕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구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만 뽑으라면 단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이야기일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일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여기에서는 윤리, 도덕, 상식이 안 통한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윤리, 도덕,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고, 하나님이 바치라고 했다 해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버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 길을 따라 나선 이삭도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온통 비윤리, 비도덕, 비상식이 판을 치는 이 이야기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이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히브리서에 의하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한 이 사건은 믿음의 행위였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잔인해 보이는가? 히브리서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믿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우리는 매우 비이성적, 비상식적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오해 받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몰지각한 행위를 일삼는 기독교인들도 더러 있다. 모두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기 위하여, 이 사건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시험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기 원하셨다. 시험은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또는 믿음)알기원하셨다. 여기서 쓰인 알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야다이다. ‘야다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을 꿰뚫어볼 때 쓰는 단어이다. 그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때, ‘야다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는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알고 나면, 평안하다.

 

삼위일체론을 공부해 보면, 그것은 수학이 아니라 심리학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단순히 어떻게 31이 되는가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질문과 답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삼위일체론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수학놀이가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나의 통일성을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현실 속에서 겪는 가장 심오하고 까다롭고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각자 인격이 있다. 우리는 각자 고유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인격이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각자의 인격에 제한이 가해지면, 그것은 그 인격의 자유를 빼앗는 폭력이다. 그런데, 각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가 생득적으로 지닌 자유를 누리는 일은, 어찌보면 쉬운 일이다. 문제는 각자의 자유가 어떻게 충돌하지 않고, 공공선을 이룰 것인가에 있다.

 

아주 쉬운 말로, ‘각자 인격이 있고 자유를 가진 너와 내가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너와 내가 함께할 때이다. 우리는 이때, 어떻게 서로 각자 가진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며,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정말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깊은 심리학적 문제를 담고 있다. 고유의 인격은 개별성이라고 부르고, 인격의 연합은 통일성이라 부른다.

 

하나님도 인격이 있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도 인격이 있다. 아브라함 이야기로 논의를 좁혀서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하나님도 인격이 있으시고, 아브라함도 인격이 있고, 이삭도 인격이 있다. 지금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세 인격이 충돌하고 있다. 아슬아슬하다. 그들의 관계에는 하이어라키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가장 불쌍한 희생자는 누구인가? 가장 힘 없는 이삭이 될 것이다. 결국 이삭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의 인격이 가장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듯싶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서, 이삭처럼 희생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처럼 힘 센 인격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이렇게 인격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약자만 손해보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을 뒤집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어떻게 뒤집히는지 한 번 보자.

 

교부 중에 오리게네스라는 분이 있다. 185년에 태어나 251년경에 돌아가신 분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론을 논하며, 삼위의 통일성을 의지의 연합(Unity of Will)’으로 설명한다. 이 의지의 연합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신다. 그리고 그 의지가 아브라함에게 전달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이삭도 아버지의 의지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의지 속에는 사실 어떠한 폭력이 들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의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지,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의지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 즉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으로 잘못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이다. 우리는 대개 무엇인가를 행할 때 이해의 범위 안에서 행동하지 못하고, ‘오해의 범위 안에서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러면, 거기에는 뜻하지 않은 불순종 또는 폭력이 발생하기 쉽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지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한다.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이해는 순종으로 나타난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한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하여 번제단에 올릴 때, 반항하거나 아버지를 향해 욕을 퍼붓지 않는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까? 나는 이러한 상황을 선물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싶다.

 

아브라함에게 신앙은 선물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어느 날 문득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물처럼 다가오셨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로 표현한다. 뜻한 것이 아니고, 갈망한 것도 아니다. 그냥 선물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셨다. 그러고 자기 자신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게되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온 것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우리가 알다시피, 태가 끊어져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이삭은 선물처럼 아브라함에게 왔다. 이것은 이삭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을 선물로 주셨다.

 

선물은 굉장히 우연인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선물은 굉장한 의지이다. 선물에는 나의 의지가 담겨 있다. 선물만큼 나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그 선물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의지의 연합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선물을 준 누군가와 의지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우리의 삶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을수록 더 중요하다. ‘의지가 연합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이 발생하면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거기에는 의지의 연합이 발생해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 행복을 성경은 여호와 이레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가정 폭력이 늘었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했으며,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에 떨며 낙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실제로, 유명인들 중에서 자살한 사람까지 보도되고 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비상식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분석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보듯, 내 삶의 현실을 선물로 인식할 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발생한 어떠한 일을 선물로 본다는 뜻은 그것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팬데믹 현상을 오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해하고 있는가? 신앙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지금 팬데믹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실제 사건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사건 속에 자신을 감추어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피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고통스러운 사건과 마주하는 데 있다.

 

지금 팬데믹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스러운 일들, 그리고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 그것을 선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가 연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태초부터, 애당초, 선물이었다. 그러니, 선물 같은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생이 선물이라는 것,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선물이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선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의 의지와의 연합 속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 은혜가 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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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