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3. 16. 08:15

예배자

(창세기 13:1-18)

 

John Donne(존 던/ 1572 1 24일에서 6 19일 사이~1631 3 31)‘No man is an lsalnd’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누구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나는 인류에 포함되기 때문에 ... 그러니 누구 때문에 종이 울리느냐고(누가 죽었냐고)알려 하지 마라.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린다.

 

헤밍웨이의 소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여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존 던은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영국인으로서 16세기 종교개혁을 지나 성공회가 국교로 자리잡아가며 가톨릭 진영과 혈투를 벌이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유토피아>의 작가로 알려진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여동생의 손자이다. 원래 가톨릭 신자였던 존 던은 나중에 성공회로 전향하고, 성공회 신부가 된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자기의 신념/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는 것과 같았다. 신앙을 지키느라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6세기, 17세기 유럽에서 발생했던 종교전쟁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개신교 진영(성공회 포함)과 가톨릭 진영이 싸우느라 말할 수 없는 생명이 희생되었고, 그 싸움의 앙금은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싸움과 전혀 상관없었던, 유럽인도 아닌, 동양인들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존 던은 그러한 격변기에 자기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며, 그 어려운 시기를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렀다. 종교전쟁을 보면서 그는 수많은 회의와 절망에 휩싸였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의 중요성을 점점 더 깨우쳐갔다. 그의 시 ‘No man is an island’에는 그러한 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아무도 섬이 아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에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되면,

유럽 땅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만일에 모래벌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자신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이어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저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려고 하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예배를 생각한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릴까? 바이러스의 창궐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이 상황에서, 예배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실천을 통해 바이러스 창궐을 막아보겠다는 보건당국의 정책으로 인해 모든 교회가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을 이용하여 예배를 드린다.

 

매일 같이, 자유롭게 하던 것을 강제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신앙공동체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잘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에 교회 가는 것, 예배 드리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웠는데, 이 참에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예배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람은 습관처럼 하던 것을 하지 못하면 불안해진다. 예배가 우리 삶의 일부이고, 습관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기독교의 예배는 무엇인가? 존 던의 시가 우리에게 잘 설명해 준다. “No man is an island”. 누구도 섬이 아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각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이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예배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 볼 수 있다.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아브람(아브라함의 이름을 받기 전) 일행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기근 때문에 피신했던 애굽에서 아찔한사래사건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족 모두 몸 성히, 더불어 애굽의 왕으로부터 많은 재산도 하사 받은 상태에서 그들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 일행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터를 잡고 거주한다. 이곳은 명당이었던 것 같다. 이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은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첫 이주했을 때에 이어 두번째이다. 그런데, 그때와는 달리 문제가 발생했다. “소유의 넉넉함때문이었다. 아브람 일행은 소유가 불어나, 더 이상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었다.

 

그때의 재산은 지금의 재산과 달라서, 그들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은 소나 양 같은 가축들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나 양들을 먹일 목초지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가축들을 먹이다 보니,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브람과 조카 롯, 또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등이 서로 많이 부대꼈다. 그들에게 다툼이 잦아졌다. 다툼이 잦아지면 함께 거주하는 게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서로 갈라서는 것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람 마음이 다 똑같다.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우리가 현재 사회에서 하는 경쟁도 모두 이것을 위한 것 아닌가. 좋은 목초지, 즉 좋은 학교를 가지 위해서 경쟁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경쟁한다. 경쟁의 우위에 올라서려고, 사람들은 물불 가리지 않는다.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로, 좋은 목초지를 선택할 권리는 아버지와 같은 아브람에게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람은 그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한다. 물론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지녔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쿨하게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람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결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제단을 쌓다라는 말은 예배드렸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가는 곳마다 무작정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린다.

 

14.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예배의 주도권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우리가 먼저 드려서 초월적 존재의 마음을 달래주는 기복의 행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은총)에 대한 반응(감사)이다. 이것을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고백과 감사와 평안이 담긴 신앙행위이다.

 

지금은 교회당에 종탑이 있는 교회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어렸을 적에 교회에는 종탑이 있었다. 긴 밧줄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타고 노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주일 아침,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에 교회의 집사님 중 한 분은 거르지 않고, 종을 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종을 왜 울렸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교회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역할만 있는 줄 알았다.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알람) 시계가 없었으므로, 일하다 예배 시간을 놓쳐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므로 종을 쳐서 동네 가득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여,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교회에 모여 예배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교회의 종소리는 단순히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한 기능만 있었던 것이 아다. 교회의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린다. 종소리가 울릴 때,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종소리는 나만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도 듣는다. 이웃도 듣는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알게 해주는 것이 종의 존재이다.

 

이러한 깊은 존재론적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교회의 종소리가 더 이상 울려 퍼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종소리를 통하여,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은총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아브람처럼 자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나만 먹고 살겠다고 사재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먼저 챙겨주는 온정이 넘칠 것이다. 귀찮게 교회 가지 않아서 편하다는 생각보다도,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섬처럼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은총 받은 사람이라는 뿌듯한 마음이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혐오를 몰아내고, 그 마음에 안에 감사만이 자리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자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예배는 그 자체로 감사(thanksgiving)’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그러니, 예배자 여러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거든, 더 많이 예배를 드리십시오.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생명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살려 주시고,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풍성케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가운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십시오. 주님은 죽기까지, 죽음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평안 가운데 거하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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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