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27. 09:56

우리 몸이 성전이라면
(로마서 8:26-28)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 몸이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반영하는 지, 보건의학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리하게 분석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몸은 “(사회적) 불평등이 기록된 몸”이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 차별이 투영된 몸”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우리의 몸에 기록되고 투영되는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그는 가난과 뇌의 발달이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득수준이 다른 영유아의 뇌를 시간 간격을 두고 MRI로 찍어본 결과, 뇌에서 정보처리와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학습 능력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대뇌 회백질(Total Gray Matter)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어날 때 대뇌 회백질의 크기 차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대뇌 회백질의 크기가 더 크게 나타난다.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뇌의 번연계(Limbic System)에도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번연계는 본능, 정서의 영역을 담당하는데, 그중 언어적, 의식적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라는 기관”이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해마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받고, 스트레스 호르몬은 고용불안, 왕따, 성희롱과 같은 사회적 폭력에 노출될 때 증가하는데, 이때 해마의 세포가 변형된다고 한다.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은 물론, 집과 학교에서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이 해마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김승섭, 137쪽).

그가 보여주는 보건과학의 연구 결과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회과학이 아니라 의학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구조적 또는 제도적 불평등과 차별을 꼼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뉴스의 보도를 통해서 많이 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의 비율은 가난한 지역에 사는 자들에게서 훨씬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뉴스와 데이터, 또는 연구의 결과물을 접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잘 거리는 계층, 또는 지역에 살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분노하는가?

김승섭 교수가 그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제목에 나와 있듯이, 우리 몸은 그냥 단순한 몸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단순히 신체적 몸이 아니라 사회적 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슬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몸이 아픈 이유는 당신 책임이 아니다. 당신 몸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악의 희생자이다. 그러니, 너무 자기 자신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사랑해 주고, 보듬어 주라.”

보건의학은 우리의 몸이 ‘사회적 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경은 보건의학이 말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몸은 ‘사회적 몸’을 넘어서 ‘신적인 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거룩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사회적 몸’이라는 것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그렇다보니, 고통을 받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책만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신적인 몸’이라는 것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그렇다보니,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자책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슬프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뜻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신적인 능력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 신적인 능력이 무엇인지,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두 명만 뽑으라고 하면, 이구동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뽑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4,5세기의 사람이고, 아퀴나스는 13세기의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아퀴나스의 존재를 몰랐지만,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사상에 신세를 많이 졌다. 하지만 둘의 신학방법은 달랐다.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에 많이 기대어 신학을 했지만,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대어 신학을 했다.

하지만 이 두 신학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같았다. 그들의 신학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법(eternal law) 혹은 이성적 지혜를 세상 속에 두셨다. 그러나 그 지혜는 자신의 신적 성격 때문에 인간에게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인간의 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이 세상에 두신 영원한 법 혹은 이성적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 법과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이성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기도를 통해서이다. 기도는 영원한 법, 이성적 지혜, 신적 지혜에 다가서는 수단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지혜를 다 알지 못하여, 우리의 삶이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고, 죄도 짓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삶 가운데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영원한 법(eternal law)에 닿을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그 길을 여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 21:13). 그렇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다. 그리고 성전인 우리의 몸이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잊고 산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슬프다.

기도는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말해주는 표지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 자체를,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할 때, 그 일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소망하고 확신하면서 기도한다. 어떠한 행위마다 잠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밥 먹을 때도 기도한다는 것은 그 밥 먹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기도, 운전 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 또는 운전하면서 드리는 기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 또는 일을 하는 중에 드리는 기도, 회의를 하기 전,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드리는 기도는 지금 우리가 하는 바로 그 일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게 하는 ‘짧지만 강력한 의식(rituals)’이다.

하물며 죄를 지으려 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몸이 ‘성전’인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겠지만, 우리는 때로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구분 못할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어도 남의 몸을 해치는 상해 죄를 짓겠는가.  기껏 죄를 지어봐야 양심을 속이는 죄 아니겠는가. 우리의 몸이 하는 모든 것, 일상의 일이든, 선한 일이든, 때로는 악한 일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도록, 기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몸은 그냥 몸이 아니라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이 ‘사회적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몸은 나의 살아온 역사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불의를 기록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이 당한 불의는 곧 내가 당한 불의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별히 제1 세계, 소위 부강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자각하지 못한다. 바로 우리다. 우리가 이렇게 그래도 건강하게 사는 이유는 우리가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부는 누군가에게 불평등과 차별을 안겨준다. 아프리카나 남미에 사는 사람은 우리와 같은 건강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몸은 그들의 세상을 기록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몸이 같을 수 있을까? 같을 수 없다. 그 다름이 기도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 다름은 차별의 의미가 아니라, 깨달음의 의미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깨달은 것이고, 비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깨달았으므로, 비그리스도인이 하지 못하는 ‘기도’를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핵심적인 내용은 ‘탄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인가를 알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은 무지 가운데서 기도한다. 그러나 괜찮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는 것,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가 연약하여 우리의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성전인 우리 몸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친히 탄식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인 몸이다. 우리의 몸은 신적인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은 아프지만, 동시에 우리의 몸은 거룩하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연약하고 아픈 몸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 몸에 기록된 사회적 아픔이 하나님 안에서 위로 받고 치유 받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우리, 언제든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순간에서든지,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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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