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8. 4. 06:00

브니엘

(창세기 32:21-31)

 

브니엘하면, 이런 노래가 생각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 하아얀 그 때 꿈을 /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이 노래의 제목은 무엇인가? <얼굴>이다. 그러면, 브니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이다.

 

아주 기초 훈련부터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성경을 함께 읽으며, 성경의 언어와 이야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하고 싶다. 성경의 세계에 친숙해지는 것은 어떤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그 세계에 융합되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산다. 저명한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는 그의 책 <Speaking Christian>에서 요즘 미국에서 기독교의 언어가 낯설어지고 왜곡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경험하는 것 / 언어가 낯서니까 삶 자체가 낯설다)

 

브니엘’, 그러면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이 떠오르고, 야곱과 에서의 화해가 생각나야 한다. 그리고 브니엘’,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정기적인 소그룹 성경읽기 모임을 통해서 이러한 훈련을 해 나가는 습관/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실패는 이러한 기초적인 훈련에서부터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안 읽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님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목숨을 내 놓았을 때,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을 만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놓았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목숨을 다시 얻었다. 성경은 모두 이러한 이야기 아닌가. 목숨 내놓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을 만나 참생명을 얻게 되는 이야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신다.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웠다. 형이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형식이나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도 그런 두려움 가운데 산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매우 우연히이루어진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엔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저 불쑥 나타난 어떤 사람과의 씨름을 말할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은 신비에 쌓여 있다.

 

하나님은 불쑥 나타나신다. 어떤 얼굴을 하고 나타나실지 모른다. 선하게 또는 악하게 나타난다. 악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제프리 러셀의 책 <데블 The Devil>에서 이런 말을 한다. “악마를 연구해보면 역사적으로 악마는 신의 현현이고 신성의 한 부분임이 드러난다”(34).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불쾌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천사처럼 선한 얼굴을 하셔야지, 어떻게 악마의 얼굴을 하느냐고. 하지만 심층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세 단계에 걸쳐 인식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미분화상태로 나타나고, 다음엔 자비로운 하나님과 악한 악마가 구분되어 악한 악마를 억압해 쫓아내다가, 마지막엔 하나님과 악마가 통합된다. 우리는 실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악을 통해 경험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악을 경험하게 됐을 때 보이는 우리의 영성이다. 대개 우리는 악을 경험했을 때, 절망하여 삶을 포기한다. 그러다 보니, 악 속에서 악마만 경험할 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악에 맞서 그 악을 뚫고 지나갔을 때 그 끝에 서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악이 악마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스토리를 잘 알고 있다. <욥기서>의 이야기다. 욥기에서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악마! 만약, 욥이 악을 경험하며 거기서 굴복하고 말았다면, 그래서 아내의 말처럼 하나님의 저주하고 죽었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정말 공허, nothing 밖에는 안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악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야곱이 보여주는 씨름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인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는 외롭고 힘들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신앙을 마음의 동의로만 생각하면 그처럼 쉬운 게 없다. 사실 이렇게 오해되기도 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 간다.’ 이처럼 쉬운 구원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구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신앙은 씨름이다. 악마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고된 노동이다. 신앙은 그래서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신앙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마음적, 또는 지적 동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객관적 동의로 말하지 않는다. 신앙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고, 그만큼 기독교의 언어가 요즘 세상에서 왜곡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야곱과 씨름하고 있는어떤 사람’, 낯선 사람을 보라. 우리에게 닥치는 일은 모두 다 낯선 일이다. 암에 걸리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수술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도 낯선 일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낯설다. 하물며, 우리는 살아본 하루를 살지 않는다. 우리에게 오는 시간은 모두 낯선 시간이다. 내일처럼 낯선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한다. 그저 내일이 있다고 상상할 뿐이다.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한 야곱, 그러나 그 낯선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한다. 야곱은 지금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붙들고 늘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씨름에서 상처를 입는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은 상처를 남긴다.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는 그것을 스티그마(Stigma)’라고 한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상처가 남았다. 우리는 그것을 성흔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영광의 상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이 영광의 상처이지, 그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픔이다. 야곱은 낯선 사람(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거움?)

 

야곱이 끝까지 낯선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안 놓아주면서 한 요구가 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는 악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야곱의 신앙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없는 거다.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어떠한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계속하여 야곱이 낯선 사람에게 한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씨름에서 내가 상처를 입거나 또는 죽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악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이 임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속에 있다. 낯설게 다가온 그 일들, 마치 악의 한 가운데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내 삶의 그 낯선 일들, 도저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 일들, 나에게 깊은 절망과 아픔을 주는 그런 일들, 마치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일들, 그것은 무엇인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그것과 씨름해야 한다. 신앙은 씨름이다. 악마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고된 노동이다. 우리는 그 노동 가운데서 이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주께서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의 신앙 안에, 이러한 씨름이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씨름에서 이긴 야곱은 복을 받는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 축복을 받은 후에 비로소 야곱은 자신이 누구와 씨름하였던 것인지 알게 된다. 낯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씨름이 있었던 바로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이름 짖는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의 브니엘이 있는가. 단 한 개라도 좋으니, “이것은 브니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의 씨름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한다. “주님, 주께서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주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브니엘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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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