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기도
(시편 44:17-26)
시편에는 개인 탄식시와 공동체 탄식시가 있다.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화자(말하는 사람)가 ‘나’이면 개인 탄식시이고, ‘우리’이면 공동체 탄식시이다. 근방에 있는 시편, 42편과 43편을 44편과 비교해보면 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 탄식시’이다.
우리는 살면서, 개인적인 삶 속에서 당하는 고통이 있지만,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공동체의 고통이다. 공동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그리고 누가 기도할 수 있을까?
시편 44편의 분위기(어조)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다. 22절부터 24절이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도살장의 양처럼 찢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의 주여, 일어나소서. 어찌하여 잠들어 계십니까? 깨어나소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렵니까? 어찌하여 외면하십니까? 억눌려 고생하는 이 몸을 잊으시렵니까?”
기도의 분위기가 겸손하지 않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시편 44편의 분위기는 시인이 하나님을 꾸짖는 분위기다. 원망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 시편을, 이 기도를 매우 특별하게 만들고, 주목하게 만든다. 어떻게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들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기도를 들으면 당황해한다. 불경스러워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감히,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죄인의 기도는 드릴 줄 아나, 의인의 기도는 드릴 줄 모른다. 아니, 기독교인들은 대개 죄인의 기도 밖에 모른다. 한 번도, ‘의인’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가? 로마서에 나온다. 한국 교회는 로마서를 엄청 가르친다. 로마서 성경공부 안 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로마서 강해설교를 세 번 해보았다. 우리는 로마서를 하도 공부하다 보니, 성경에 로마서만 있는 줄 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로마서 중심의 신앙이 굉장히 강하다. 그리고 로마서를 공부하면서(또는 가르치면서) 가장 뇌에 박히게 배우는 것이,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너는 죄인이야! 의인은 한 명도 없어! 니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너는 그냥 죄인에 불과해! 구원받고 싶지? 그러면 예수 믿어!”
이것을 누구한테 가르치냐면, 새신자에게 가르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걸음마와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 아이를 가까이에서 돌보는 부모부터 가끔 만나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까지 모두 그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너는 나쁜 놈이야. 이디엇! 바보 같은 놈! 니가 할 수 있은 아무 것도 없어! 밥이나 축내는 놈! 그래도 잘 자라고 싶어? 그러면 내 말 잘 들어!”
이렇게 갓 태어난 아이한테 계속해서 이런 말을 퍼부어 보라. 그러면 그 아이가 온전히 자라겠는가? 잘 자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이미 ‘나는 나쁜 존재이구나. 나는 바보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나는 밥이나 축내는 놈이구나.’라고 하는 부정적인 자의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이한테 그런 것을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라면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깊이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달어야 하는 문제를 억지로 깨닫게 하니, 그 아이가 온전히 자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죄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과 주변에서 그런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천지차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시인은 지금 ‘항의’하고 있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항의 기도가 아니라 회개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항의 기도’를 하고 있다. 시인이 이렇게 항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근거가 17절 이하에 나온다. “우리는 당신을 잊은 일도 없으며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일도 없건만 마침내 이런 일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배반한 일도 없고 일러주신 길을 벗어나지도 않았건만, 당신께서는 여우의 소굴에서 우리를 부수시었고 죽음의 그늘로 덮으셨습니다”(17~19절).
시인의 항의 기도를 보면 지금 누가 잘못하고 있는가? 기도하는 자에게는 잘못이 없어 보인다. 그는 하나님을 한 번도 잊어본 적 없고,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일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한 일도 없고, 하나님이 일러준 길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입에 담지 못할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죽음의 그늘로 덮여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이 기도에서 잘못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눈이 번쩍 떠지는 기도다.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니! 평생 죄인으로 살아온 우리는 상상조차 못한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가 불경에 실려 있는 게 아니라, 성경에 실려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주여 죽여 주시옵소서, 하며 회개하며 죄인의 기도를 드리면서 기도 끝에 가서 들리는듯 마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살려주세요’라고 구원을 요청했는데, 지금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기도하며 오히려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있다. 이 얼마나 발칙한 기도인가! 이 얼마나 멋진 기도인가!
우리는 이 기도가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다. 공동체의 기도이다. 지금 이 공동체는 큰 고통 가운데 처해있다. 그 공동체 모든 구성원이 이 기도를 드리는 시인처럼 ‘의인’은 아닐 것이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시인처럼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을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통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고통을 그냥 감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는 ‘의인’이 있었다. 바로 그 의인이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항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상황인가. 이 얼마나 멋진 반전인가. 공동체가 고통을 당할 때, 누가 공동체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바로 ‘의인’이 기도할 수 있고, 의인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고통을 당할 때 의인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의 권리이고 의무이다. 그리고, 그 의인의 기도를 통해서 공동체는 구원받는 것이고, 공동체는 그러한 의인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개발 전 강남에서 자란 사람이다. 졸업은 양재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했지만, 입학은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초등학교로 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에는 동네서 버스를 타고 말죽거리까지 갔어야 하는데, 버스가 2시간마다 한 번씩 다녔다. 아침에 버스 놓치면 끝장이었다. 그러다 80년대부터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강남 8학군이라는 게 생겼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나는 강남 8학군에서 공부한 ‘특권층’이 되었다.
요즘에도 한국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강남 8학군이 ‘짱’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반에서 10등 정도 안에만 들면, 서울연고대를 갔다. 학교에 반드시 모의고사 전국 1등이 있었다. 우리 때만해도 애교심이라는 게 커서, 본인이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과 대결하곤 했다. 그때 단골로 등장하는 자랑은, ‘우리 학교에 모의고사 전국 1등 있어!’였다. 그런데, 이런 자랑을 하는 친구들은 정작 공부를 못하는 친구다. 모의고사 전국 1등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게 뭐가 중요한가? 그런 학교 다니면 자기도 좋은 대학 가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이 공부를 잘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모의고사 전국 1등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마치 자신이 1등한 것처럼 우쭐해진다. 그게 인간의 소박한 심성이다. (이것은 그냥 웃자고 한 비유이다. 의인의 메커니즘은 모의고사 전국 1등하는 메커니즘과는 다르다.)
누가 의인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자꾸 주변을 돌아본다. 누가 의인이 되어줄 사람 없나, 하고.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욕심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온갖 속된 욕심은 다 부릴 줄 알면서, 왜 우리는 거룩한 욕심을 부릴 줄 모르는가. 바로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공동체가 고통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 ‘항의 기도’ 할 줄 아는 의인이 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다.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시민들이 전통의 권위와 종교적 권력에 짓눌려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이성에 기대어 세상을 개혁해보려는 의지가 피어날 때,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계몽의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용기를 갖고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라!”
나는 칸트의 말을 밀려 이렇게 ‘의인의 의지’를 불태우고 싶다. “과감히 의인이 되려고 하라. 용기를 갖고 너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라!” 나는 그 노력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믿는다. 과감히 의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믿음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갖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믿음이란 아무것도 안 하는 죄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완전하지 못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의인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화(sanctification)이라 부른다.
한 가지 덧붙여서, 지금 이렇게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누가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해야 하는가? 바로 교회가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요즘 벌어지는 기독교계의 불미스러운 일들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아니고, 세상을 향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회개 기도하느라 바쁘다. 이것은 뭔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잘못 사용해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서 지탄을 받고 있는 중이라 세상을 향하여 ‘죄송합니다’라고 회개하고 있는 중이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꿈 꿔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고백하는 세상을 꿈 꿔야 한다. 다음에 또 이러한 공동체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그때는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 기도’ 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의인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과감하게 ‘의인’이 되도록, 성화되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면 좋겠다. ‘의인의 기도’, 나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궁극적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와 같은 싸움: 참여구원 (1) | 2020.09.23 |
---|---|
불기둥과 구름기둥 (0) | 2020.09.15 |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0) | 2020.09.01 |
교회(敎會)에서 교회(交會)로 (1) | 2020.08.19 |
물 위를 걷는 법 (1) | 2020.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