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15. 07:31

불기둥과 구름기둥

(출애굽기 14:19-31)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인생이 같을 수 있을까? 유대인들의 힘이 이런 데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있는가?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안겨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유로, 교육이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 물고기 잡는 법이 바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 그 이야기는 그 사람의 마음에 남아 빛이 되고 소망이 되고 힘이 된다.

 

유대인들은 절기를 잘 지켰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삼대 절기는 무엇인가?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이다. 그들이 절기를 지켰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교육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교육의 중심에는 이야기(스토리)가 있다. 유월절(무교절 포함)을 지키면서 그들은 불에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다. 그냥 먹는 게 아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먹는 지침이 나온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야훼의 유월절이니라”(12:11).

 

이렇게 먹을 때 교육이 발생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밥을 먹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다. 그때 부모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그때 부모는 아이들에게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 그리고 열 가지 재앙의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가서 홍해를 건넌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바로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이야기 말이다.

 

칠칠절과 초막절도 마찬가지다. 칠칠절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인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다. 이에 대해 신명기 6장에는 이러한 지침이 나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겨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6-9).

 

칠칠절을 지키며 그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뿐더러,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가르치는 게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요즘 부모 세대가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성경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에 잘 새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의 성경교육(신앙교육)을 주일학교나 유스의 몇몇 사람들(전문가)에게 맡기려 한다. 그렇다 보니, 기억할 필요도 없고 마음에 새길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폐단을 반드시 고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 교육 학자는 개신교의 신앙교육이 무너진 원인을 18세기 영국에서 생긴 주일학교 제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물론 그 시대는 영국의 산업혁명 때문에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붙들어 놓고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육직책으로 주일학교 제도가 생겼지만, 그 이후 부모들은 일 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신앙교육 전문가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부터 부모들은 성경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에 스스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초막절은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절기인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초막절을 히브리어로 수콧(Sukkot)’이라 부른다.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집 앞에 수카(Sukkah)’라는 초막(임시 장막 / 임시 텐트)을 지어 그곳에서 7일간 머물면서 먹고 마시며 축제를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야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지구적 동네 북이었다. BC 722/721년 북이스라엘이 망했을 때부터 이들은 엄청난 고통 가운데 살았다. BC 587/586년에는 남유다가 망하면서 정상적인 국가의 기능이 무너졌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야 했으며, 인류의 역사에서 생겨났던 수많은 제국들에게 계속 통치를 받으며 핍박을 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2차 대전 중에는 600만명이나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 사건을 격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며 세계를 주무르는 민족으로 남아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는가? 그냥 이야기 말고, ‘임마누엘의 이야기말이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는가? 그냥 이야기 말고,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이야기 말이다. 내가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나의 자녀들에게 들여주며 그들의 삶에 힘이 되어줄 이야기 말이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유대인들이 자기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전해주었던 것과 같은 한국인의 이야기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았다. 한국 역사의 전설적인 이야기 중, 우리 뇌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게 뭔가? 단군신화? 호랑이하고 곰하고 마늘 먹고 100일 동안 동굴에서 살았는데, 호랑이는 참지 못해 뛰쳐나가고, 곰은 끝까지 견뎌서 웅녀가 되어 하느님의 아들과 결혼하게 됐다는 그 이야기? 그 자손에서 나온 게 한국인이라는 그 이야기?

 

사실, 단군 이야기는 정말 멋진 이야기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역사가 담긴 출애굽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고 감동을 받으나, 이상하게도 한국인의 멋진 이야기, 단군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이야기에 감흥 받으면 마치 우상숭배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고려 시대 때 <동국이상국집>이라는 책을 지어 고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이규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현재 강화도 길상면 길직리에 묻혀 계신다. (내가 이 분을 반가워하는 이유는 이분이 묻혀 계신 곳이 바로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동국이상국집>에는 동명왕편이 실려 있다. 동명왕편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고구려 건국신화를 기록하며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 기록한 것을 비판하며 보충하여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재구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명왕편은 이야기다. 고려가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 받은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명왕편에는 해모수(하나님의 아들), 주몽(고주몽/동명왕/고구려의 초대왕), 그리고 주몽의 아들 유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냥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웅서 사시이다. 이 이야기가 고려인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겠는가. 특별히 고려인들이 / 특히 무신 집권시기의 난세(대몽항쟁시기)를 지내면서 자신들의 뿌리가 이러한 하늘의 신화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난세를, 힘들지만 얼마나 희망차게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돌파하려고 노력했겠는가.

 

우리는 지금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인간은 집단 우울증 증세(코로나 블루)와 집단 분노에 시달리고 있다. 특별히 요즘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산불로 인하여 2중 고통을 당하고 있다. Everyday sunny day의 맑은 하늘만 보다가 요즘 햇볕을 못 보고 살고, 코로나 때문에 바깥에 잘 나가지도 못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기의 질이 너무 나빠서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사니, 심리적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코로나 이후의 불확실한 경제와 세상을 대면하며 사람들은 엄청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살리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이야기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성경의 이야기를 참으로 특별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를 보라.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런 일이 진짜로 있었어? 어떻게 바다가 갈려?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거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이게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아니다가 전혀 아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이야기의 핵심은 31절이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별로 신뢰가 없었다. ‘여호와가 애굽의 신보다 강하겠어? 모세가 무엇이관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겠어?’ 이러한 냉소적인 마음이 그들에게 가득했다. 이런 냉소적인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 해도, 구원을 베풀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했고, 모세를 믿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여호와가 애굽의 신보다 강하구나! 그렇구나 모세가 우리를 애굽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이겠구나!’

 

요즘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냉소적인 마음이 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겠어?’ 다른 말로, ‘하나님이 바이러스보다 강하겠어?’ ‘교회가 왜 이래? 챙피해서 못다니겠네.’ 다른 말로, ‘교회가 우리를 이 어려운 시기에 무슨 도움이 되고, 우리를 이 어려움에서 구출할 수 있겠어?’ 이뿐 아니라, 온갖 냉소적인 마음과 두려운 마음과 절망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출애굽 이야기를 아주아주 새롭게 들어야 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홍해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를 엮어서, 아주아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매일 듣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의 냉소적인 마음, 그리고 힘든 현실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능력(두나미스/다이너마이트)’으로 들어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고 있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무엇인가? 냉소와 좌절인가? 그리스도인에게 냉소와 좌절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다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일과 절망적인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냉소적으로 만들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우리에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희망(hope)과 확신(confidence)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 우리 삶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는 이야기, 성경 많이 읽으시라. 우리 모두, 힘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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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