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30. 03:18

어빌리티

(시편 53)

 

Ability(어빌리티). ‘뭔가를 할 수 있는 수단이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남자를 능력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능력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한테는 커리어우먼이라는 말이 그 의미에 가까운 것 같다. 모두, 능력 있는 남자, 능력 있는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현대 사회는 능력을 중요시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또는 능력을 인정 받기 위해 사회 시스템이 돌아간다. 각종 교육 체계는 능력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작동한다. 그래서 여전히 서점가에서 최고로 많이 팔리는 분야의 책은 자기개발서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능력을 상승시켜 자신의 값어치를 높일까에 관심이 많다.

 

최고의 능력남, 커리어우먼들이 모인다는 뉴욕의 월스트리스에 찬바람이 분 적 있다. 2008, 월가를 시작으로 전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가 그것이다. 그때 이곳 실리콘밸리에도 적잖은 파장과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빼앗기고 실직의 늪을 지나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마이클 샌델은 그의 베스트셀러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도덕의 문제와 엮어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 당시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푼 돈이 7천억 달러이다. 정부에서 구제 금융으로 푼 덕분에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은 도산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을 받아 살아난 금융회사 중 AIG 그룹의 후속조치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구제 금융 받은 돈으로 돈잔치를 벌였는데, 임원들에게는 16500만 달러 보너스를 지급했고, 직원들에게는 100만달러 혹은 그 이상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고간 이들이 납세자의 돈으로 포상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일로 AIG 그룹을 비롯한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평가한다. “미국 국민들이 그들의 보너스(그리고 구제 금융)에 반대한 진짜 이유는 탐욕을 포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포상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탐욕보다 실패에 더 엄격하다. 시장 경제 사회에서는 야심적인 사람들이 이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이익 추구와 탐욕의 경계는 대부분 모호하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확실하다. 아울러 성공한 사람은 포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다”(마이클 샌델, 36).

 

미국인들은 탐욕보다 실패에 더 엄격하다.” 탐욕 부리는 것은 좋게 봐줄 수 있는데, 실패하는 것은 좋게 봐줄 수 없다는 뜻이다. 탐욕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서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실패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을 거두는 자,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어빌리티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다.

 

시편 53편에서 시인은 한탄을 한다.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시인은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유를 첫 절에서 밝히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묻는 게 아니다. 과학적 사회에 물든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묻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 믿지 않는다로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지만, 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당연히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유무를 묻는 질문이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 보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빤히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모두들 딴 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을 모둔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처럼, 빤히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여 자기 재산을 챙겨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Wesleyan Quadrilateral(웨슬리의 사변형)’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계시(성경), 전통(역사), 이성, 경험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신앙, 또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계시가 담긴 성경이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없는 삶의 원리는 전통이나 이성, 또는 경험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계시(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와 전통(역사에서 오는 것)은 인간의 바깥에서 오는 소스(source)이다. 그리고 이성과 경험은 인간 안에서 오는 소스이다. 인간 바깥에서 오는 소스와 인간 안에서 오는 소스가 균형을 맞춰야, 인간의 삶은 평안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소스 사이에 균형을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 두 가지 소스의 균형이 잘 맞은 적이 거의 없었던 듯싶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불행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중세 때는 계시와 전통의 소스가 너무 강해서 인간들이 고통을 받았고, 계몽주의 이후부터 지금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이성과 경험의 소스가 너무 강해서 인간들이 고통 당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 인간이 신을 죽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고발은 통렬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떤 존재에게서도 간섭 받기 싫어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신까지 죽이고 말았다. 신을 죽여버린 인간 사회에 발생하는 엄청난 일, 그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그리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즉 인간의 바깥에서 오는 소스를 거부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소스를 사용하여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두 가지 어빌리티의 상실이 있다. 하나는 shame-ability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hate-ability의 상실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의 상실, 미워할 줄 아는 능력의 상실. 이 두 가지 능력의 상실로 인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각박해졌는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3-4). Shame-ability를 상실하고 나니까, 악을 행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그렇게 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솜씨 좋게 성취하는 것을 능력(ability)이라고 도리어 칭찬한다. Shame-ability를 상실하니까 사회가 야만사회가 되었다. 위의 월스트리트의 이야기에서처럼 어떠한 일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그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돈잔치만 있을 뿐이다.

 

Hate-ability의 상실. 우리는 누군가 잘못된 일을 해도, 나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악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당장 나의 이익과 상관없으면 우리는 그 악에 눈을 감는다. 그래서 그 악에 피해를 보는 희생자가 눈 앞에 있는 데도 그냥 남몰라라 지나친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던 사람을 그냥 지나친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말이다. Hate-ability의 상실로 인해, 이 세상이 얼마나 무심한 세상이 되었는가. 함께 분노하고 함께 악을 몰아내고 싶어도, 무관심한 시선에 우리는 아무 일도 못하고 고개만 떨굴 뿐이다.

 

Shame-ability의 상실, 그리고 Hate-ability의 상실은 모두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 것?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ability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 없는 세상에 젖어 산다. 주님께서 시장 바닥에서 기도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바리세인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의식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들은 다른 의미에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한다. 프라이버시 때문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공공성(공의와 정의 /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이 존재하는가? 요즘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ability에서 비롯된 기도라기 보다는, 자기 만족과 자기 탐욕의 근거한 기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기도에 온통 나 자신밖에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려는 순종과 감사의 기도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청원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내 기도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계신 거고, 내 기도 안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안 계신건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생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빌리티, shame-ability, hate-abiltiy를 키울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빌리티를 키우는 것, shame-abilityhate-ability를 키우는 것’, 그 능력을 키워서,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책임감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함께 성경공부를 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어빌리티. 능력남, 커리어우먼이 되어 세상에서 인정받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라.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주의 자녀들이라면, 우리의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어빌리티도 반드시 갖추기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그로 인해 shame-abilityhate-ability를 갖게 되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조금 더 밝은 세상, 조금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드는 데 우리의 어빌리티를 사용하실 것이다.

 

끝으로, 하늘을 우러를 줄 아는 능력을 갖기 원했던, 그래서 shame-ability hate-ability를 갖기 원했던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가 쓴 시를 한 편 읽으며 마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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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