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12. 11:42

복자(the blessed)

(창세기 30:25-43)

 

세월호 사건 직후 한국사회가 슬픔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교황은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그 중에서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진행했다. 가톨릭교회의 시성 단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종 à 가경자(존경할만한 사람 The venerable, 놀라운 정도의 덕행을 실천하거나, 순교한 사람이라야 가경자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1913년 교황 비오 10) à 복자(the blessed) à 성인(the saint)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복자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시성 단계에 있는 그런 복자는 아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시성 단계의 복자는 성인 전 단계의 있는 공경받기에 합당한 인물을 말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인 야곱에게 붙은 복자복 있는 자, 또는 복을 가져오는 자의 의미이다. 특별히,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복된 일이 생긴다의 의미이다. 물론, 시성 단계의 복자복을 가져오는 자의 복자는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니다. 아무튼, 멋지지 않나? 누군가에게 이런 칭찬을 받는다면, 정말 영광될 것이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고향을 떠나올 때, 엄마 리브가는 몇 날 동안피신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몇 날은 고사하고 십 수 년이 흘렀다. 창세기 373절에 보면, 야곱은 요셉을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한다. 11번째 아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굳이 나이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야곱의 심경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나이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에 삼촌 라반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감언이설을 통해 야곱을 그대로 머물게 하려고 한다. 라반은 야곱을 이렇게 설득한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그대로 있으라.”(27) 이것은 라반이 야곱을 머물러 있게 하려는 감언이설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라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복을 불러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라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카인 야곱을 수없이 이용했다.

 

라반은 원래 소유가 별로 없는 자였다. 그러나 야곱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서 큰 떼를 이루게 되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으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30) 야곱은 그야말로 복자. 함께 있으면 덩달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은 후, 야곱은 이렇게 복자가 되었다. 함께 있기만 해도 덩달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부럽다. 이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가 소망하며, 기도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생각난다.

 

프란치스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야곱의 노동력을 사용했고, 야곱을 통해 많은 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야곱을 계속해서 곁에 두기 위해 인정에 호소함과 동시에 흥정을 한다.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7, 28).

 

그러나 야곱은 라반이 방식대로 품삯 받기를 거절한다. 야곱은 삼촌에게 품삯을 받으며 삼촌에게 종속되는 것을 거절한다. 야곱은 이제 삼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는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30). 품삯을 거절하며 야곱이 라반에게 요구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야곱은 삼촌이 주는 것을 받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야곱은 염소와 양 떼 중에 아롱지거나 점 있는 것을 요구한다.

 

라반 입장에서 야곱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야곱에게 불리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때부터 야곱은 자신의 것을 가려낸다. 대신, 라반은 자기 것과 야곱의 것을 삼일 길 거리에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그 이후 야곱이 자기의 것을 가려내는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 야곱이 행한 일은 버드나무(Poplar), 살구나무(Almond), 신풍나무(Plane Tree, 플라타너스)의 껍질을 벗겨,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여 그늘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더니,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이 나왔다. 게다가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 더욱더 그랬다. 여기서 야곱은 약간의 트릭을 쓰는데, 튼튼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약한 것은 삼촌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자신의 것이 되게 했다. 건강한 가축들을 소유하게 된 야곱, 그 이후 삼촌 라반을 능가하는 소유를 얻게 된다. “이에 그 사람(야곱)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43).

 

속이는 자였던 야곱이 부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은 어떤 속임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신감이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기 품삯에 대한 정당한 취득을 이렇게 표현한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33). 그러면서, 혹시 자신이 말한 것과 다르게 양과 염소 떼 중 아롱지지 않거나 점이 없거나 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도둑질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만큼 야곱이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당당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창세기 14장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포로로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주변 동맹군과 함께 그돌라오멜 왕과 그의 동맹군을 공격하여 롯을 구출해 냈을 때 그 과정에서 많은 노획물을 얻었다. 감사의 표시로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노획물을 취하라고 권하지만 그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한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부터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14:23).

 

복자. 복의 근원인 사람들. 그 사람과 함께 있기만 해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이런 이들의 특징은 삶의 부요함이 누구에게서 비롯되는 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모든 부의 원천이시며,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야곱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삼촌 라반의 품삯을 거절하고, 자기의 것을 스스로 가려내려 했던 것이다. 자기의 것을 스스로 가려낸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품삯 받기를 갈망하는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품삯을 주실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뒤,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약속을 마음에 품고 잊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댈 때 우리는 야곱처럼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

 

복자.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복을 나누어 주고 복을 가져오는 자. 그 사람과 함께 있기만 해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그 사람과 함께 있기만 해도 복된 일이 생기는 존재.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복을 받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복을 나누어 주려는 겸손에 물든 사람. 본인은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이웃을 부요케 하는 사람. 이러한 복자의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망한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야곱이 받았던 복을 누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에서처럼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복이 넘쳐나길 기도한다.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사라지고, 사랑, 용서, 일치가 넘치길 기도한다.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길 바란다. 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열매가 가득하길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복자(the blessed)’로 시복하신 것을 믿고, 스스로와 옆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복자입니다. 당신은 복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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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