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Legacy)
(시편 71편)
“다윗의 기도는 여기서 끝난다.” 시편 72편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편 1권(1~41편)과 시편 2권(42~72편)은 흔히 ‘다윗 시편’이라고 부른다. ‘고백’에는 자기 삶의 경험이 담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다윗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삶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다윗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무엘상하의 성경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러면, 다윗 시편의 고백이 현실성과 활동성을 얻는다. 그냥 고백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고백으로 읽히게 된다는 뜻이다.
다윗의 시편이 끝나가는 마지막 두 번째에 놓인 71편의 화자는 ‘노인’이다. 다윗이 노년기에 쓴 시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진술을 통해서 시인의 나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늙었다고 이 몸을 버리지 마옵시고, 기력이 다하였다고 내치지 마옵소서”(9절). “이제 이 몸은 나이 먹어 늙었습니다”(18절). 그리고 이 시편에는 노인의 소망이 담겨 있다. “당신께서 팔을 펴사 이루신 일, 그 힘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게 하소서”(18절).
24절의 짧은 구절 안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았던 한 노인(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집약적으로 들어 있다. 시인의 인생은 고달팠다. 평생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자의 위협 아래서 살았다. 그리고 시인은 모태신앙이다. “모태에서부터 나는 당신께 의지하였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당신은 나의 힘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6절).
이것은 굉장한 신앙고백이다. 모태에 있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그때부터 하나님은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참 아름다운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상히 여겼지만 당신만은 나의 든든한 의지였습니다”(7절). 나는 이 진술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상히 여겼다!”
살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시선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들이 나를 이상히 여길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히 여겼다고. 왜 사람들은 시인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71편 면면히 흐르는 고백을 보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붙들다가도 어느 정도 선에서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는, 광야에서 배고픔 가운데 마귀에게 유혹 받으시며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멘!”하다가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리라”는 말씀에 “아멘!” 하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이 어떻게 말씀으로만 사나, 떡도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맨날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나’라고 슬쩍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시인을 해하려는 자들, 원수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하나님도 버린 자, 쫓아가서 붙들어라, 구해줄 자 없으니 잡아다가 족치자!”(11절). 누가 봐도 끈 떨어진 신발 신세였지만, 그래서 원수들은 그를 험악하게 대했지만, 시인은 그런 와중에서도 원수들에게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시인은 이제 늙어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떠한 소망이 있는가? 시인은 이런 소망을 고백한다. “당신께서 팔을 펴사 이루신 일, 그 힘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 하늘까지 떨치신 당신의 정의를 전하게 하소서!”(18, 19절). 그의 소망은 오고오는 세대, 즉 젊은 세대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다.
시인에게는 유산(Legacy)이 있다. 그의 유산은 ‘하나님’이다. 엄마의 태에서부터 모은 유산이니 얼마나 막대한 유산인가. 시인은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산을 ‘오고오는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그러면, 오고오는 세대는 시인의 그 유산을 물려받고 싶어할까? 이것은 시편의 시인 세대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더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유산을 물려주려면, 우선, 어른 세대에게 ‘유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유산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가치가 없으면, 그것을 오고오는 세대에게 물려주려고 해도 외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산이 가치가 있으려면, 어른 세대는 그 유산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 어른 세대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그 유산이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그리고, 그 유산을 보았을 때 젊은 세대들이 물려받고 싶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
나는 시편 71편을 묵상하면서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쓴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창간한 <1년 내내>라는 잡지를 통해 연재되기 시작하여, 1861년에 완성한 소설이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의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문명의 틀을 본격적으로 이루기 시작한 유럽의 18세기와 19세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지금의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물질문명의 토대를 이루게 된 것은 18, 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가지 인류사적 혁명들(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는 그러한 문명사의 전환기에 살면서 문명이 변하면서 발생하게 된 ‘인간성 문제’를 소설을 통해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구사회는 전반적으로 고정된 계급사회였다. 신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신분은 세습이 되었다. 왕의 신분은 그 자녀들에게 세습되었고, 귀족의 신분도 그 자녀들에게 세습되었다. 그리고 평민의 신분도 자녀들에게 그대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왕과 귀족 세력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신흥 세력이 있는데, 그들을 일컬어 ‘부르주아’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본, 즉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신분이 고정되어 있던 사회에서 이제 돈만 있으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회적 변화였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세력인 부르주아 계급은 물질은 풍요로웠지만, 그들에게는 귀족들이 지니고 있었던 정신적 풍요로움이 빈곤했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평소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귀족들과 같은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나갔다. 즉, 귀족사회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가 등장하며 새롭게 제시되었던 이상적인 인간상은 ‘물질적 여유’도 있고, ‘정신적 소양’도 갖추고, ‘도덕적 품성’을 고루 갖춘 인간이었다.
우리가 요즘도 ‘고급문화’라고 일컫는 ‘클래식 음악(Classic Music)’이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클래식 음악은 원래 귀족들이 전유한 문화였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도 귀족들처럼 클래식 음악을 향유하며 귀족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며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다. 우리가 지금도 즐겨 듣는, 쇼팽이나 리스트, 그리고 슈만이나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들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 속에서 성장한 음악가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gentleman’이라는 용어도 19세기 시대에 생겨난 신조어이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무너지고, 평소 선망의 대상이던 귀족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이라는 말 대신에 ‘gentleman’이라는 용어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gentleman’은 ‘고결한 인간’이라는 뜻으로서, 위에서 이야기한 물질적 여유, 정신적 소양, 그리고 도덕적 품성을 고루고루 갖춘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은 바로 그 ‘gentleman’의 이상적 인간상이 무너져버린 영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소설이다. 디킨스는 소설에서 주인공 ‘핍’을 통해 ‘gentleman’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 그러나 ‘gentleman’의 칭호를 얻었지만, 결국 정신적 소양과 도덕적 품성, 즉 내면/정신의 풍요로움을 상실해 버리고, 오직 물질과 외양만 중시하는 속물로 전락해 버린 ‘gentleman’의 가치를 고발하고 있다.
소설을 보면, 결국 주인공은, 가난하지만 고결한 인간성을 붙들고 살았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스스로 ‘gentleman’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비루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한국어로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영어 제목은 <Great Expectations>이다. ‘Great Legacy’가 아니다. ‘Great Expectations’가 지닌 뜻은 ‘큰 재산을 얻거나 물려받을 가능성이나 기대’이다(민음사, 2권 442쪽).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물려받기를 기대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하며 행복해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무엇을 물려 받을 것인가?
물질문명 아래서 살다 보니, 그리스도인들도 어느덧,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처럼 ‘속물 신사’가 되어버린 듯하다. 물질과 외양에만 치중하고, 정신과 도덕은 온데 간데없고, 무엇보다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했던 시인의 고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시인은 자신의 위대한 유산인 ‘하나님’을 오고오는 세대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시인의 그러한 고백과 소망에서 감흥을 받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위대한 하나님의 유산을 가지려고도, 그리고 그것을 물려주려고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물질문명 아래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증식에 대한 관심, 건강에 대한 관심, 여가에 대한 관심은 극대화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자녀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물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Great Expectations’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Great Legacy’를 가지고 있는가.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재산증식과 건강의 복을 기대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기대하는가?
사실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것과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것 자체를 낯설게 여긴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산은 ‘물질 또는 건강’으로 한정되기에, 하나님에게 복을 받는다는 것은 재산증식이나 건강을 받게 된다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기도는 ‘간구/간청’의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만 넘쳐나고, 우리의 기도에는 ‘영광과 찬양’의 기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님,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또는 “하나님 이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거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드리지만, 오늘 시편에서 시인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입은 당신께 향한 찬양을 가득 담았고, 날마다 당신의 영광을 찬양합니다”라는 기도는 드리지 못한다.
위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다. 우리 어른 세대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그 유산이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그리고, 그 유산을 보았을 때 젊은 세대들이 물려받고 싶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들으면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이지? 하나님만을 유산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이 질문에 대하여, 실천적 지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사도행전에도 있고, 한국초대교회사에도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각기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국초대교회사에도 예배당 건축을 하기 위해 집을 팔고, 쌀을 나누어 먹고, 노비를 해방시킨 일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구체적인 예화를 들고, 실천적인 지침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잘못 이야기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거나,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
다만 분명한 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유산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기를 기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유산(Legacy)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주 기초적이고 전복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체’를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 <위대한 유산>을 통하여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젠틀맨인가?” 그 소설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혹시 자신이 속물 젠틀맨이었다면, 주인공 ‘핍’과 같이 마음을 돌이켜 진정한 젠틀맨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이 시편의 말씀, 이 시편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시인, 노인의 질문을 진지하게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진정 모아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 하는 ‘유산(Legacy)’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유산이시고, 그 가치를 온전히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겠다고, 시편의 시인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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