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5. 04:28

보배를 품은 질그릇

(고후 4:6-12)

 

만성절이다. 기독교의 거의 모든 문화가 자본주의에 잠식당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어 절기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지만, 그러는 와중에서도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절기가 가진 의미를 마음 깊이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만성절은 영어로 All Saints Day라 한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다라는 뜻이라기보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 성경의 인물이든, 기독교 역사의 인물이든, 그 사람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든, 아니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든, ‘성인(Saints)’이라고 불릴 만한 기독교 인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성탄절 전야제가 가장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전야제의 풍습은 모든 절기마다 있다. 부활절에도 전야제가 있다. 그것을 Easter Vigil(이스터 비질)이라 부른다. 다만, 부활절 전에는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이라는 것을 지키다 보니, 우리는 상대적으로 부활절 전야제를 소홀히 한다. 대신, 기독교 절기에서 성탄절 전야제 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만성절 전야제이다. 우리가 잘 아는 할로윈이다. ‘할로윈이라는 말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이다. 요즘은 할로윈이 성탄절 전야제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이들이 성탄절 전야제를 소비하는 것처럼, 할로윈도 즐겁게 소비한다. 이런 게 바로 문화의 힘이다.

 

만성절이 111일인 이유는 만성절을 제정할 때 근거로 삼은 성경구절이 히브리서 11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즉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성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살았기 때문이다. 1031, 만성절 전야제가 있는 날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인들의 믿음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당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별로 믿음과는 상관없는 신앙행태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성절 (전야제) 문화를 소비하며 웃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만성절 문화를 소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성절 전야제를 소비하느라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성인들)을 기리며, 믿음을 갖는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그것을 수행하기에 참 좋은 말씀이다. “어두운데 빛이 비치라”(6). 빛과 어둠의 메타포가 사용되고 있다. 전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찬란한 밤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메타포는 아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하여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바꾼 사건은 1882년에 발생했다. 그 이후 인류는 어둠을 정복했다.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더 이상 낮에만 일하지 않아도 됐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어둠()’이라는 두려움에 짓눌려 살았다.

 

현대인들에게 어둠()은 일종의 낭만으로도 작동하지만, 성경시대의 어둠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두운데 빛이 비치라는 말씀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쉽게 깨달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한 말씀이다. 빛이 어둠 가운데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으로 인하여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구원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두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빛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들어왔다. 빛과 어둠의 메타포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복음이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어둠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된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진 비유를 써서 표현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 보배와 질그릇은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지만, 이 둘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 보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그러면, 질그릇은 무엇인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반영이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바로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을 질그릇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빗댐이 아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깨지기 쉽다. 그리고 별로 큰 값어치가 없다. 이것은 바울의 인간이해(인간론/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귀중한 존재이기도 한데,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이 있다.

 

바울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대함과 겸손함,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사는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의 실존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후반부). 너무도 멋진 통찰이다. 우리가 어떠한 큰 일을 해냈을 때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무기력하게 살 필요 없다.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바울의 통찰이 바울과 그 일행의 삶 속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바울은 아주 생생한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쉽게 깨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빛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8-9) 않는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싸이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과 같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영어로 ‘perplexed, but not despairing’이다. ‘perplexed’는 고급 영단어이다. 당황스럽고 난처하고 답답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상황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그 몸에 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들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일찍이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명명했다. 빛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절망에 이르지 않으므로 죽음에 처해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핍박을 당할 수는 있으나 버림받지 않는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넘어질 수는 있으나, 멸망(destroy)당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언제나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다.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 쉽게 무너지고 절망하고 버림받고 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고, 다시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10절 전반부). 바울은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에 사용된 헬라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낱말이 지닌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네크로시스완전히 죽은 상태를 나타내는 싸나토스라는 말과 달리, ‘죽어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다른 버전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다는 말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죽어 감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우겨쌈도 당하고 답답한 일도 겪고 박해도 받고 거꾸러뜨림도 당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안에 채우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을 전해주면서 당하는 수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얻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바울이 증언하기를, 그들이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이유는,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나아감으로써 예수의 생명, 즉 예수의 부활이 그들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신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보배를 품은 질그릇, 즉 빛을 품은 인간, 빛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감히 성인(또는 성도)’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이 고백은 참 마음을 짠하게 하고, 가슴 뛰게 하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성인 중의 성인이라 불리는 바울의 사랑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고백이다. 바울은을 전달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살았다. 그가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을 전달한 덕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경험했다.

 

만성절(또는 우리교회로서는 임직식이 있는 날)에 우리는 성도로 불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제자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을 얻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얻는 생명을 이웃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는가? 우리가 만약 자신의 복락만을 간구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기 꺼려한다면, ‘성도도 아닐 뿐더러,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질그릇이 없다면, 빛이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이유(섬김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그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기 위함이다. 생명, 빛을 전달해 주는 것만큼 고귀한 삶이 있을까?


이것은 만성절 전야제(할로윈)을 소비하기만 하며 그 안에서 재미와 복락만 누리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 안에서 성인들믿음의 선조들을 기리며 이렇게 거룩한 예배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할 믿음의 삶이다어둠 속에서 빛을 경험한 사람은 그 구원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그리고 그 빛을 질그릇 같은 몸에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기꺼이 몸에 짊어진다왜냐하면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이며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기 때문이다이 신비를 깨닫는 자죽어도 살겠고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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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