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17. 05:16

브니엘

(창세기 32:1-32)

 

모든 감정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감정 에너지는 힘(power)으로 전환되어 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실제적으로 움직인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하여움직인이유는 장자권에 대한 질투의 감정 때문이다. 질투의 힘이 실제로 야곱에게 장자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장자권을 손에 얻고 난 야곱은 이제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은두려움이었다. 야곱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서 먼 땅, 밧단 아람(하란 땅)으로 도망치게 한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집에서 야곱을 움직인 감정 에너지는 무엇일까? 두 가지였다. 외로움과 사랑. 외로움도 에너지다. 외로움도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사람은 외로울 때 더 활동적이고 창조적이게 된다(물론 반대의 사람도 있지만). 외로움도 사람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데,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외로움과 사랑의 힘은 야곱을 20년을 하루같이 보내게 했다. 이처럼 우리는 내 안에서 매일같이 창조되고 있는 감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죽음()이 아니라 생명(/righteousness)이 창조되도록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미스바에서 언약을 맺은 야곱 일행은 이제 고향인 가나안 땅 입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얍복강(요단강 지류)을 건너기만 하면 이제 고향 땅을 밟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에게 얍복강을 건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어려웠다.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두려움이었다. 얍복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에서라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야곱은 먼저 종을 보내어 형 에서의 형편을 살핀다.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자신이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가족을 대동하고 왔고, 자신에게 많은 소유도 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화친을 청한다.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5). 20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자신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자신의 고향 입성을 환영해 달라는 간청이다. 종을 보낸 후 가슴 졸이며 형 에서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이렇다.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6). 이렇다 저렇다 답신도 없이, 형 에서가 군대 4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극심한 두려움에 몰아넣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7).

 

야곱은 극심한 두려움에 싸여 두 가지의 행동을 한다. 하나는 형 에서의 공격에 대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족들과 재산이 형 에서가 거느리고 오는 군대에 의하여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다가서는 수단이다. 그리고 기도는 깜깜한 동굴을 통과하게 해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 야곱의 기도는 기도의 정석을 보여주는데, 기도는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재화(realization)되게 끔 하는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좋은 기도는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또는 녹여서)해서 드리는 기도다.

 

야곱은 자신의 소망을 먼저 아뢰지 않는다. 야곱은 기도하면서 다짜고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곱은 자신이 고향을 떠나 하란 땅으로 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한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10). 야곱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주신 약속을 기억했고, 그 약속 때문에 지팡이 하나밖에 없던 자신이 이렇게 큰 무리를 이루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약속에 기대어 기도를 했고, 기도를 마친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 중에서 예물을 마련한다. ‘예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민하는 레위기에 자주 등장하는 희생제물’, ‘소제의 의미를 지닌 말이지만, 여기서는 선물’, 또는 조공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야곱은 선물을 통해서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것이다.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민하)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자신이 형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민하)’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듯하다. 사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잠언을 보면 선물의 효력에 대한 말씀이 몇 군데 나와 있다.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잠언 18:1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언 19:6).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언 21:14). 야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해결해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가 야곱을 데리고 가고 있는 지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야곱이 기도하고 난 후, 이처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야곱의 지혜가 발휘되는 상황(선물준비)이지만, 기도는 야곱을 더 이끌고 나간다. 야곱은 예물을 앞서 보내고, 식구들을 강 건너 먼저 보낸다. 그런 후에 발생하는 사건이 중요하다. 24절은 이렇게 그 상황을 묘사한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4). 여기서 쓰이고 있는 문법은 수동 재귀형 동사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뜻이다. “야곱이 스스로 홀로 남겨지게 했다.” 야곱은 자신의 소유와 가족들을 모두 먼저 강 건너로 보내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이 강을 건너기 20년 전과 같이 지팡이만 가지고 홀로 남겨지도록 했다.

 

기도가 우리를 마지막으로 데리고 가는 지점은 하나님 앞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으면 만족하지만, 그것은 기도를 통해 가야할 끝을 가지 못하고 도중에 멈추는 것에 불과하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려서 다시 표현해 보자면,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홀로 남은 사람)”로 만든다. 야곱은 홀로 남았다. 야곱의 손에 있는 것은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움보다 이제 외로움의 감정이 그를 더 짓눌렀다. 그때 야곱이 대면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홀로 남겨지게 한 뒤 발생한 일은 신비 그 자체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야.” 언뜻 듣기에 이 진술은 신앙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신앙은 공동체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도 사회적이지 개인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실존적 개인(단독자)’으로 서야 하는가?

 

기도가 우리를 데려가는 종착점은 하나님 앞이다. 그곳에는 누구와 함께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공동체적인 문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는다는 뜻이다. 창세기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되어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을 보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리개(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로 자신을 가리면서 사는가? 그 가리개 뒤에 꽁꽁 숨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뀌기 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가? 야곱이 기도하면서 소망했던 것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선물을 형 에서에게 보내며 형 에서의 마음이 바뀌길원했다. 그러면서 야곱은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가리개로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우리는 기도를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리고 기도해서 얻은 지혜로 얼마나 부단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조건을 바꾸려 하는가.

 

야곱의 기도는 야곱을 거기에만 머무르게 놓아두지 않고, 더 밀고 나가, 결국 하나님과 대면하게 만든다.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한다. 그 씨름으로 인하여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상하여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야곱이 씨름한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천사 또는 하나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비에 싸여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현현을 어렴풋이 경험할 뿐이다.

 

야곱은 그 사람과의 씨름에서 겨루어 이겨 축복을 받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축복을 받게 된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지만,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그가 하나님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권력을 가지다’, ‘우세하다’, ‘싸우다라는 뜻을 지닌 사라라는 동사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은 야곱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왕이신 하나님의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후,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바뀐 것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가리개를 쓰고 그 뒤에 숨어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에서 자기 자신을 바꾸어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대면하기까지 우리에게는 쉼이 없다. 주변, 환경, 여건에 영향을 받아 그 현재적 상황들이 자신을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지혜를 간구하여 그러한 현재적 상황들을 통제하기 바쁘다. 그러니 우리 안에 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비로소 대면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은 존재가 바뀌고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자기 존재의 바깥에서 오는 어떠한 위협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그 자리를 브니엘이라 이름을 짓는다. 브니엘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영화(glorification/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입는 것)’한 야곱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형 에서의 위협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존재)이 바뀌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입게 된 상황(영화)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더 이상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다. 밤새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존재가 바뀐 야곱 앞에 뜬 해는 그에게 새롭게 펼쳐진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신적 드라마(theo-drama)인가.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의 실존에 다가오지 않으면, 매우 무감각하게 산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어도 그것에 우리가 무감각한 이유는 그 고통이 나의 실존에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것이 실재하지만 그 암이 나의 몸을 파고들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 암이 실재하는 것을 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암이 세상에 편만해도 암은 실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실재하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만하시지만, 그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야곱의 브니엘 사건에서 보듯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는 마디가 있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삶의 마디를 건너려는 시도는 (물리적이든 영적이든) 실패를 불러온다. 그리고 삶의 마디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기도하더라도, 기도를 통하여 지혜를 얻어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데만 그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로 이끌어줄 것을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실존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이루는 성취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겨루어 이겨낸 성취가 아니라면, 그 성취는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어느 순간 오히려 나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성취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브니엘.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브니엘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 또는 공간이 있는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실제적 에너지는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외로움인가? 대개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인생에 브니엘을 가진 사람은 결코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브니엘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인생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이겨낸다(겨루어 이긴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낸다.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형 에서를 대면하게 되는 이스라엘인 야곱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무엇을 전파하는 사람인가. 두려움인가, 믿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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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