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2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34:1-8)

  

지난 주, 개인적으로 참 좋은 문서를 많이 읽었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첫째, 초대 교부인 이그나티우스의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는데, 그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돌보며, 목회하다, 순교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시대였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이중으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가 쓴 서신들(Letters) 중에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Romans)는 정말 압권이다. 길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신이 로마 당국에 죄수로 잡혀 곧 죽게 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순교당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 나온다.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는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는 것”, 이것은 진정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죽음(순교)’을 통해서, ‘생명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그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순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 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라!”(5:3).

 

순교는 순식간에 목숨이 끊는 행위가 아니라, 죽기까지 모진 고통을 당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우스가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갈 수 있다면, , 참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서를 보고, 그냥 세 글자만 머리에서 떠올랐다. “미친놈!”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의 순교를 막지 말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하며, ‘순교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 안에 생수가 있는데, 그것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라!”(7:2).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것도 정말 대단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보고 놀라고 있는데, 또다른 문서를 만났다. 이사야서이다. 이사야 50장에는 세 번째 종의 노래가 나온다. 이사야서에는 네 개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고 있는 동안 만나게 된 이사야의 종의 노래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이그나티우스는 어떻게 그러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을 기뻐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사야서에서 찾은 기분이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종의 노래학자들의 혀와 학자들의 귀를 주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시고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사야 50:4). 종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혀와 귀를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종은 학자들의 혀를 가지고, 곤고한 자(지치고 약한자)에게 힘이 되는 말을 전한다. 종은 깨우쳐진 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종의 노래의 압권은 이 구절이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을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5-6).


이그나티우스만 그런 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의 영성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은 이사야에게서 왔다기 보다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처럼 동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간 순서 상으로, 이사야가 먼저 있었고, 이사야의 말씀을 회당에서 낭독하며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이 다음에 있었고, 그 이후에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고난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데, 고난 받는 것을 불사하더라도, 그 생명에 이르겠다는 불굴의 의지(욕망)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가? 우리가 생명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는 게무엇인지, 정말 알고 있는가?

 

마음에 남는 시를 한 편 읽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서신과 이사야의 종의 노래로 씨름하고 있는데,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 시가 내게로 왔다.

 

<우리 명랑이랑 둘이>

ㅡ 황인숙

 

우리 명랑이랑 둘이

광화문을 다 걸어 보네

살랑살랑 햇살이

겨울을 어루만져 잠재우고

이상하게 조용한

한낮

우리 명랑이가

은행에를 다 들르고

버스에 다 타 보네

저 인간이 맨날

어디 나가나 궁금했지?

뭐하고 다니나 궁금했지?

버스를 내려

비탈길을 걸어서

알지, 명랑아?

우리 집이지?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네 계단,

한 층, 두 층, 세 층, 네 층,

다 왔네!

상자에 담겨 나갔다가

단지에 담겨 돌아왔네

, 우리 예쁜 명랑이……

 

이 시를 읽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한 동안 먹먹해서, 아무 말 못하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명랑이는 시인이 키우던 개다. 그런데, 그 개가 죽었다. 시인은 명랑이를 집에 놓아두고, 매일 집 밖을 나섰다. 물론 시인은 생명을 위한 일을 하러 돌아다니느라, 개와 함께 시간을 못 보냈을 것이다. 자신을 집에 남겨두고 집을 나서는 주인을 보며, 개는 궁금했을 것이다. “저 인간은 뭐하고 다니나?”

 

시인은 그런 개의 마음을 몰랐다. 그것을 알았다면, 자신이 어디를 가는 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지, 그곳에 개를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개와의 그 간절한 나들이는 개가 죽고 나서야 이뤄진다. 죽은 개를 상자에 담아, 시인은 그가 다니던 곳을 간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광화문도 가고, 은행도 들르고, 버스도 타고, 집 앞 골목길도 걷고, 계단도 오른다. 그런데, 그 계단은 ‘4에서 끝난다. 아마 시인은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시인의 개는 상자에 담겨 나갔다, ‘단지에 담겨 돌아왔다.


이 모든 문서를 읽으며, 동시에 들여다 본 문서는 레위기 신학이다. 이 문서는,이렇게 생명을 얻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 사실은 죽음의 영역에 놓여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한 문서다. 레위기 문서에서 가장 마음을 두들긴 내용은 속죄에 대한 것이다. 레위기 공부를 통해서 속죄가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배우겠지만, 그 속죄를 온몸으로 떠 안았던 모세의 삶이 내 심장을 파고 들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신명기의 마지막 장이다. 오경의 마지막 내러티브(이야기)이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을 보면서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죽는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의아해 한다. 흔히 우리는 그가 반석에 물을 내는 사건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냈기에, 그 죄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오경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모세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의미를 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레위기 신학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신명기 전체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세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심지어 모세는 고난받는 중재자이고, 가나안 땅 밖에서의 그의 죽음은 일정 정도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대세자장의 죽음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은 폭력적인 죽음과 결부된 피의 죄책으로부터 땅을 정화해 주고,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으로 피신했던 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그 자신의 죽음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재자였던 모세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유업인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마이클 모랄레스, <레위기 신학>, 321).

 

우리는 집(생명)으로 가고 싶어한다. 오경의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을 떠나 죽음의 영역에서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다시 집(생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집(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속죄이다. ‘속죄는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시인을 깨우쳐 준 것은 명랑이의 죽음이다. 박해를 두려워 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쳐 준 것은 이그나티우스의 죽음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종의 죽음이다. 가나안 입성을 압 둔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모세의 죽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발생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치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 비즈니스의 점원이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알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삶을 주님께 드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생명을 얻었고, 우리의 이웃들이 그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랑이가, 이그나티우스가, 여호와의 종이,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묻고 있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11. 03:16

미니스트리

(출애굽기 32:30-34)

 

오경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발견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니스트리이다. ‘Ministry’, 우리는 이것을 사역이라고 부른다. 사역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역교회의 일로 여겨진다. 교회에서 하는 일을 우리는 보통 사역이라고 부른다.

 

우리도 사역을 한다. 작년, 2020년도를 준비하며, 우리는 5가지의 핵심 사역에 대하여 논의했다. 우리교회의 5가지 핵심 사역은 다음과 같다.

 

1) 주일예배 (찬양예배+온가족성찬예배)

2) 소그룹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3) 교육/훈련 (세화성서아카데미)

4) 에클레시아 사역 (2021년 론칭 목표)

5) 차세대 (청년/청소년/아동부)

 

이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주일예배에 집중하고, 차세대 사역(특별히 청년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수요예배를 청년예배로 전환하는 방안과 수요일, 또는 목요일에 청년사역(청년예배/친교를 돕는 일)을 하고, 어른들이 청년들을 돕는 사역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것을 내리사랑 사역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어른들이 청년들을 돕고, 청년들이 청소년을 돕고, 청소년은 어린이를 돕는 사역의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주중/주말, 소그룹 모임 활성화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소그룹 모임의 활성화를 위하여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속회라는 이름을 좀 더 부드럽고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이름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누었다. 무엇이든지, 제도적 용어에서 선교적 용어로의 전환의 필요성과 중요성도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교회의 이러한 사역 방침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난 3년간 여러분과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가며, 많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사역의 방향이다. 교회의 사역을 이러한 방향으로 정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시대와 우리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의 요청이다.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요청은 선교적 교회로 거듭나기 Born again as a Missional Church’이다.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키워드는 단순함과 집중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신 아래, 교회의 사역을 단순하게 만들고, 집중력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의 정신이 곧 우리의 정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한다!”

 

시적인 표현을 쓰자면, ‘사역이 우리에게 왔다.’ 사역은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사역은 오는 것이고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한다. 사역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어느날 우리는 하나님이 사역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사역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오경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사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오경의 내러티브를 읽어나가면서 매우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한다.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추방 사건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의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다 갑자기 3장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선하고 아름다운 동산,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오경의 내러티브 맥락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을 보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아담(잇쉬)은 하와(잇샤)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수 없었을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은 하와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잇샤', 즉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고 들었을 때, 아담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나? 우리가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목격하는 아담(잇쉬)의 반응은 하와(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짓는 모습이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아담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담은 하와의 죄를 목격했을 때, 동일하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속물로 내어 놓고, '속죄(atonement)'할 수 없었을까?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보는 아담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속죄를 하지 못하고, '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경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아담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은 하나님의 집, 즉 에덴동산에 오른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성경공부를 하신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이해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세화성서아카데미를 통한 교육/훈련은 우리교회의 핵심 사역 중 하나이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의 심층적인 깊이로 들어가게 도와드리는 성경공부에 꼭 참여하시라. 시간이 맞지 않아 못 참석하시면, 동영상 시청을 꼭 하시라. 힘들게 촬영해서 업로드 해드리는 이유다. 이 사역을 위해 힘쓰는 미디어팀의 헌신을 잊지 마시라.)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오른다. 그곳은 에덴동산이고, 성막의 지성소이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바람에 인간들이 에덴동산 바깥에서 유랑하며 죽음의 영역에서 살았는데, 인류는 비로소 출애굽사건을 통해, 시내산에 올라(에덴동산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에덴동산인 시내산 꼭대기에서 새로운 아담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이에, 산기슭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줄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신들을 인도해낸 이라고 선포하며 축제를 벌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출애굽하여 겨우겨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될 기회를 얻는 이스라엘은 또다른 추방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에 처해질 것인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구원 받을 것인가)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것은 바로 모세의 미니스트리(사역)’ 덕분이었다. 죽음에 처하게 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30).

 

속죄(atonement)’는 오경의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오경의 문학구조 내에서, 오경의 중심은 레위기 16장에 있다.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에 대한 내러티브가 나오는 것으로, 오경의 내러티브는 레위기 16장의 속죄를 수렴했다 발산한다. ‘속죄는 죄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기는 속량이고, 죄의 영역에서 더렵혀진 것을 깨끗케 하는 정결이다. 그리고 속죄는 그리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는 다시 시내산 정상에 올라, 즉 에덴동산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한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상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1-32).

 

여기서 우리는 미니스트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모세에게서 아담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위대한 미니스트리를 발견한다. 아담은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와를 위하여 속죄하지 못했다. , 아담은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인 하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지 못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위하여 모세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속죄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다.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일명, '아담신학'은 그렇게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다( 5). 첫째 아담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는 속죄에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아, 속죄에 성공한다.

 

요한복음도 '아담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동산(에덴동산의 메타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찾아온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19:41, 20:15). 예수님은 동산지기, 즉 아담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경의 내러티브의 중심은 레위기 16, '속죄'이다. 오경의 모든 이야기는 '속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속죄에 성공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생명을 얻지만, 속죄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다.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미니스트리는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나느냐,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고 죽게 되느냐가 결정된다. , 미니스트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 즉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주신 미니스트리를 생각하며,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를 묵상해 보면 좋겠다.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이 속죄가 되는 것일까?(생명을 창조해 낼 것인가?) 이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영원한 대속물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미니스트리를 믿음으로 감당해 나가자. 그러면, 우리의 삶과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 생명이 풍성하게 넘치게 될 줄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10. 04:17

무엇을 기억하는가

(미가 6:1-8 / 마태복음 5:1-12 / 고린도전서 1:18-31 / 시편 15편)

 

성경에는 기억하고 있으면 참 좋은 말씀들이 많다. 오늘 우리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기억하고 있으면 좋은 구절들이 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 좋다. 어떤 삶이 복 있는 삶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미가(Micha)의 말씀 중에는 8절을 기억하면 좋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 선지자의 메시지와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매우 비슷하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문제 의식을 가졌다는 뜻이다. 미가는 다른 곳에서 이런 말을 한다.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7:3). 두 손으로는 악을 부지런히 행하면서, 와서 예배만 드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생활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아주 중요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매우 심했는데, 분열이 심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그 복음 안에 충분히 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의 말씀 중에는 두 개의 구절을 기억하면 좋다. 첫째,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둘째,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우리는 살면서 뜻하기 않게 삶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위기는 스스로 만든 위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닥쳐오는 위기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라. 다른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삶의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최대한 많은 구절을 기억해 두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구원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 오늘 선포한 미가서의 말씀에서도, 미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하라!”라고 외친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6:5).

 

인생에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력을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가. 에덴동산에서의 두 번째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지혜를 제공했다. 우리의 기억력이 하나님과 관계 없는 것을 기억하는 데만 쓴다면, 우리의 인생은 쓸모 없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데 열심을 다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자, 생명을 얻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31. 04:10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디아코노스(일꾼)

(골로새서 1:24-2:5)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초대교회, 바울이 활동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있어, 어려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본문도 그러한 정황을 담고 있다. 이 문장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2:4).

 

골로새 교회,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는거짓 교사가 활동했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다음 말씀이 담고 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3). 그 무엇인가가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다고 주장을 했고, 그에 대하여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에 지난 2천년 간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다. 무엇이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식은 물론 구원을 가져다 주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혜와 지식일 것이다. ‘무엇이 구원인가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아우성은 구원에 대한 아우성이다. 구원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구원이라고 외치는 형국이다.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지혜, 그리고 서비스는 모두 자신이 구원을 줄 수 있으니, 자신을 선택하라고 손짓한다. 사람들은 구원을 주겠다고 손짓하는 것들에 마음을 준다. 얼마간 성공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궁극적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시다!”를 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주고, 그분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구원자들과 경쟁한다. 우리는 그 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이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맞다. 그것을 비밀(미스테리온)’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것은 비밀이라기보다는 신비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비밀과 신비는 명백하게 다르다. 비밀은 알고 나면 싱겁지만, 신비는 알면 알수록 놀랍고 신비롭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다 드러나면 그만이지만, 신비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 안으로 계속 이끌려 들어가며, 그 안에서 놀라운 생명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분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 신비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성도들에게 드러났다”(1:26). 비밀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면 가십(gossip)거리가 되거나 싱거운 일이 되어버리지만, 신비는 그 모습을 드러내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거나, 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비는 성도들’, 즉 믿는 자들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믿음이 없이는 신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을 알아볼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비밀(secret)’이었다면, 사역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베일을 벗겨서 보여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mystery)’이기 때문에 사역이 어려운 것이다. “그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야하기 때문이다(1:28). 그래야 그리스도의 신비를 조금씩 알아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갈 수 있다.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나 혼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협업(working together)이 필요하다. 바울은 말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 교회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적어도, ‘내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 즉 성령과 협업이 필요하다. 사역(ministry)은 태생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성령이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성령은 사역(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드러난 신비를 알리는 일)을 위해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1:25).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디아코노스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표현할 때,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는 둘로스()’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디아코노스(일꾼)’이라는 말이다. ‘둘로스()’은 주인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를 말한다.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그 무엇의 종(노예)이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의 노예라고 표현한다. 노예제도가 편만했던 로마제국 시대에 예수의 노예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주 보편적인 언어로,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아코노스(일꾼)’둘로스()’와 매우 다른 표현이다. ‘디아코노스(일꾼)’라는 말은 책임을 맡아 자원하는 심정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강렬한 마음이 담긴 표현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둘로스, (노예)’이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하여는 디아코노스(일꾼)’이라고 말한다.

 

노예라고 하는 말이 이제는 보편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바울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오래고, 노예로 살아보지 않아서 그렇다. 그리고, 그 어감이 부정적이라,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좋은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했을 때, 부정적인 의미를 풍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맡겨져 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이고, 여전히 우리가 동일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도대체 무엇에 맡겨져 있는가? Insurance?

 

바울의 이 고백은 가슴 뛰는 고백이다. 감정적인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달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하는 고백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여기서 채우노라채우다라는 뜻의 동사 플레로오와 접두사 안타나가 연결된 단어이다. 접두사를 안티로 쓰면 대신하여라는 뜻이 되고, ‘아나로 쓰면 다시 한 번/재차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채우노라는 고난을 대신 감당하겠다는 의지와,

고난을 여러 번이라도(몇 번이라도)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내는 동사이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노예(둘로스)’, 그리스도의 일꾼(디아코노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당시 노예는 주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거나 죽었다. 그리고, 일꾼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삶이 아니라, ‘책임을 맡아 자원하는 심정으로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골로새서의 말씀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이끈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백이 나왔다.

나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로 결단했다. 그래서 나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모두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싶다.

 

이렇게 결단한 동역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들과 함께 사역하며 생명을 주님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내어주다 죽고 싶다.

 

영광의 소망이신 주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소서.아멘.”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종(둘로스)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디아코노스(일꾼)”이 되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우리 모두 서로 합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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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30. 05:50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요한복음 1:45-51)

 

건유가 한창 말을 배울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네 살쯤 됐던 것 같다. 어떤 변신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변신을 해야하는데, 잘 안 되자 힘들어 했다. 힘을 아무리 써도 잘 안 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서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건유야, 힘을 쓰지 말고, 머리를 써!” 그랬더니, 건유는 머리를 장난감에 갖다 대었다. 자기 딴에 알아들은 대로 행한 것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속뜻을 배운다는 뜻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머리를 써의 속뜻을 알지 못하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똑같이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속뜻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 머리를 써했는데 머리를 갖다 대는 행동을 하면 얼마나 웃기겠나. 언어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성숙해졌다는 뜻인데, 성숙한 사람은 언어가 말하고 있는 속뜻을 알기 때문에, 그 속뜻을 파악해서 행동하고 말한다.

 

이런 웃지못할 일이 신앙의 세계에서 아주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성경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위에서 본 것처럼 네 살짜리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발생한다. 유명한 언어학자인 소쉬르나 비트겐슈타인 등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는 어떠한 실체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언어 능력은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언어 능력의 성숙과 병행하여 일어난다. 언어, 말의 힘은 곧 존재의 힘이다.

 

가령,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6-8). 어떤 이는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무슨 사자 풀 뜯어 먹는 소리냐.’ 또 다른 이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니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독사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의 어떠한 기독교 신자가 믿는 자에게는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며, 독사를 가지고 놀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독사에 물려 죽었다. 2014217일자 연합뉴스에 실린 기사다.

 

미국에서 '뱀 목사'로 불리는 제이미 쿠츠 목사가 독사에 물려 사망하는 변을 당했다.

16(현지시간) CNN AP 통신에 따르면 쿠츠 목사는 전날 오후 830분께 자신이 목회하는 켄터키주 교회에서 뱀에 물린 채 귀가했으며 오후 10시께 결국 집에서 절명했다.

 

지역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가 쿠츠 목사에게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뱀 다루는 능력을 지닌 그는 일부의 성경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믿음만 있으면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른바 뱀 구원설을 신봉해왔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출연해 방울뱀 등 온갖 종류의 독사를 다루는 시범을 보인 바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웹사이트에서 쿠츠 목사에 대해 "뱀에 물려 자기 손가락의 절반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예배 중에 죽어가는 것을 보더라도 뱀들을 계속 움켜쥐면서 성령의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뱀 물림 등 신비주의 현상을 이용한 개신교의 전도 행위는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 법으로 금지돼 있으나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켄터키주 등 중부 내륙과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쿠츠 목사는 2008년 뱀 74마리를 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체포됐으며 지난해 2월에는 독사를 소지한 채 테네시주에 들어갔다가 체포돼 1년 보호관찰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테네시주는 1947년 교회에서 5명이 뱀에 물려 사망하자 뱀을 이용한 목회활동을 금지했다고 CNN은 전했다.

 

jah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4/02/17 06:53 송고

 

언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언어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데거이다. 그가 한 이 말을 너무도 유명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언어는 어떠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언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세계를 매트릭스라고 한다. ‘매트릭스자궁이라는 뜻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여 만든 영화다. 배경은 2199년이다.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해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자 기계는 인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과 전쟁을 벌인다. 누가 셀까? 당연히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세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삶의 자리를 잃어간다. 기계에게는 단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원은 태양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인간들은 생각했다. 태양을 차단하면 기계들은 힘을 잃을 것이라고. 인간들은 핵을 터뜨려 핵구름으로 하늘 덮었다. 성공적이었다. 기계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기계들은 똑똑했다. 어떻게 에너지를 얻으면 좋을지 생각했고, 그들은 그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계들은 매트릭스라는 인공자궁을 만든다. 그리고 인간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인간들을 매트릭스에 집어넣는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한 번에 쪽 빨아 쓰는 게 아니라, 매트릭스에 집어넣은 뒤, 그 인간이 거기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있도록 만든다. 기계들은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이 나는 지금 매트릭스에 갇힌 게 아니라 나의 인생을 살고 있어라고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매트릭스에 들어간 인간은 그 프로그램을 뇌에 접속하게 되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상을 사는 것처럼 산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친구랑 놀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가정도 꾸미고, 아픔도 당하고, 그러다 죽는 인생의 사이클이 매트릭스 안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매트릭스 안에서 인간들은 현실의 세계와 똑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현실적인(이것을 하이퍼 현실이라고 한다) 인생을 누린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매트릭스 안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현실이 인생인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매트릭스에 웅크리고 가만히 갇혀 인공지능 기계가 마련해준 프로그램에 의해서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그 매트릭스를 박차고 나와 진짜 현실, 어렵고 힘들지만, 나의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은가?

 

<매트릭스> 영화의 주인공 니오(Neo)’는 매트릭스 안에서 그게 마치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다. 자신의 인생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것은 인공지능 기계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버그. 그때 출동하는 요원이 있다. 그게 그 유명한 스미스 요원이다. 그는 버그가 발생할 때마다 가상현실에 나타나서 그 버그를 바로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니오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온 동지들의 도움으로 매트릭스에서 깨어난다. 그 장면은 너무도 중요해서, 한 번 같이 보는 것이 좋다



성경은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것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잊는다. 언어는 어떠한 현실을 담아내고 가리키고 있는데, 마치 그 언어 자체가 현실인양 잘못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그 언어에 갇혀, 매트릭스에 들어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어떠한 사악한 무리들은 그 성경의 언어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기 위하여 매트릭스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 순진무구한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들의 사악함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폭력의 희생자인지도 모른 체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성경공부를 통해 사람들을 매트릭스 안에 가두어 버린다. 성경공부하는 이들은 자신이 매트릭스 안에 갇힌 줄도 모르고 즐거워한다.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장에 많이 발생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없다. 성경공부 해야 한다. 그러나, 매트릭스 안에 가두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는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성경공부의 방향이다.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나에게 니오가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오는 것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매트릭스에게서 빠져나오고 나니, 다시는 매트릭스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트릭스에 갇혀 가상현실/가상신앙을 하고 있는, 노예와 같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느꼈다. 나랑 같이 성경공부 해 보신 분들은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이다.)

 

본문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장면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이 고백이 있기 전,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그당시 성경연구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로 꼽혔다. 요즘으로 따지면, 도서관인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메시아가 눈 앞에 나타나도 그를 알아볼 수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심을 다해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는 성경공부, 나를 넘어서는 성경공부는 무엇인지 살짝 설명해 보겠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는 히브리성경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는 구약성경은 약간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배치가 다르다. 이것을 간과하면 아주 큰 것을 놓치게 된다.

 

유대인들의 성경(Tanak/타나크)은 토라(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에스더서, 에스라-느혜미야서, 다니엘서, 그리고 마지막에 역대기)로 되어 있다. 토라로 시작한 성경은 역대기로 끝난다. 성문서의 마지막 역대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회복의 모습을 담고 있다(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90).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은 그 배치가 확연히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게 아니다. 배치가 다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오경,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마지막에 예언서가 나온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처음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 않았고,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었다. 그것이 그 유명한 ‘70인역(septuaginta/셉투아진타)’이다.

 

히브리인들의 구약성경은 그 자체로 안정된 구조를 지닌다. 역대기가 마지막에 오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성경이 끝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은 아주 불안정하게 끝난다. 성경의 마지막이 예언서들로 배열되어 있고, “말씀을 떠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심판 선포와 더불어 다가올 새롭고도 참된 회복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김근주, 91). 왜 그럴까? 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의 배열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마치도록 해 놓았을까? 누구 때문에? 바로,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필연적으로 신약성경을 통해 성취되고 실현된다”(김근주, 91).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구약의 성취이시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약의 마지막에 놓인 예언서들이 전하는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김근주, 92).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는 기독교의 클리쉐(진부한 구호)만 반복하고 만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굉장히 미흡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매트릭스 안에 갇혀, 프로그램밍된 삶을 살면서 평안하다 하며, 자기를 잃어버린 삶, 노예 같은 삶을 살 것인가? (그들이 주는 고깃국과 밥을 먹으며 노예로 살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박차고 나와,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자유를 건네주기 위해서 투쟁하는 삶,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삶을 살 것인가? (광야 같은 삶이지만, 주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을 믿고, 바라며,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봐야 하는 이유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매트릭스에 갇혀 노예 같은 삶을 살지 않고, 매트릭스를 깨뜨리고 나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2) 인생/신앙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 되는 알 수 없는 불행한 일들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를 경험하여,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3) 지금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시고 계신데, 그것을 모르고, 불평하며 눈 앞에 놓인 복을 차버리거나,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는 어리석고 불행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여전히, 주님께서는 나다나엘과 같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 함께 무과화나무 아래로 가자.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자. 그래서 매트릭스 안에 갇히지 말고, 매트릭스 안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누리며, 광야 같은 삶일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깊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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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23. 09:13

샤마 – 순종

(삼상 15:10-23)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듣고 밤새껏 기도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다. 사울 왕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 같다. 근심 되는 일이 있으면 밤새껏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도하고 나면 뭔가 마음에 응답이 오기 때문이다. 밤새껏 기도하고 났을 때, 사무엘은 어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12).

 

이것은 사무엘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소식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벌인 사울의 행동은 하나님이 후회하실 만 한 것이었다. 사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손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자신의 손 또는 능력을 기리기 위한 것이 기념비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의 마음에는 온통 자기 자신만이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웠어야만 한다.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것은 헤렘법을 말하는데, 헤렘법의 목적은 진멸에 있지 않고, 진멸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있다. 사무엘의 질문은 이것이다.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하셨거늘, 샤마하지 않았는가?

 

샤먀라는 히브리어는 듣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는 것은 이것이다. “왜 순종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사울은 이렇게 변명한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인데,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울의 잘못된 생각을 질타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

 

번제와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함(순종함)이 없이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지 않은데, 하나님께 번제와 제사를 드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 사무엘은 이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신(邪神) 우상이란 사악한 거짓 신을 말한다. 사울이 한 행위는 신앙행위가 아니라,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순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부터 바르게 가질 필요가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두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에 온 존재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순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위계질서적인 생각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이니까, 위계질서적인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마님이 돌쇠에게 명령할 때 순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님이 말씀하신다. “얘 돌쇠야 나무도 좀 해 오고 물도 좀 길어 오고 마당도 좀 쓸어 놓거라!” 그러면 돌쇠는 네 마님~”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돌쇠의 입장에서 마님의 말씀은 주인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직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란 이처럼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명령과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과의 관계는 위계질서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순종을 생각할 때 이점을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순종을 해야 하는가? 이것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사랑의 관점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신다. 사랑이 담긴 말은 언제나 생명으로 이끈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모두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결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곳에서 이끌어 잔잔한 물가로 쉴만한 물가로, 즉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생명을 이끄는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혼나지 않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순종은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공덕 쌓기가 아니다. 순종은 우리를 위한 일,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이다. 순종할 때 생명을 얻고 이로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가끔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요한복음은 또한 이렇게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끊임 없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말씀을 육신이 되게 하여우리에게 보내셨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울의 가장 큰 잘못, 그것으로 인해서 왕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기념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순종이란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인생을 세워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의 빛이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성례전(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생명의 빵이시며 생명의 물이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공기 중에 떠돌아 다니는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고도의 수련을 통해서 분별하고 잡아낸다는 뜻이 아니다. 잘 들리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음성)을 듣느라 시간 낭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오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 순종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여,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강제적이고 위계질서적인 요구가 아니라, 사랑의 요구이다.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의 역사에 응답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요, 우리가 사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3-24).

 

사울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말씀으로 인생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그래서 그는 버림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으로 인생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즉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면 생명을 얻지 아니 하겠는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온 존재를 집중하여 생명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순종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17. 03:36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골로새서 1:1-14)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에바브라(Epaphras)가 세운 교회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사역할 때 문하생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참 대단한 거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조지아에서 교회를 개척한 경험이 있다. 교회를 개척한 뒤, 우리 교회에서 사역한 수련목들도 대개 다 개척을 했다. 한 수련목이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교회를 개척할 당시, 여러 교회에 후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써준 추천서에 나는 개척의 필요성을 절절히 서술한 일이 있다. 개척하는 일은 연못에 계속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는 논지였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교회 개척은 교회라는 물이 썩지 않도록 계속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난 연말에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며, 우리 교회의 창립일을 2017 430일로 정한 것도 사실 그런 원리다.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연못에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회는 늘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와 함께 사역을 한 후배 목회자들이나, 주변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늘 개척을 권면한다. 개척하여 연못과 같은 교회의 맑은 물이 되라고 말한다. 물론, 대개 맑은 물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개척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후배들을 내가 나무랄 자격은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든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성장하면 나는 교회 개척하는 것을 돕고 싶다. (물론 내가 또 개척을 나가게 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나도 때론 힘들다.)


복음을 듣고, 에바브라와 같은 열정이 생겨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바울이 에바브라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말한 것처럼, 성령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인가. 우리 모두 그러한 믿음이 더욱 성장하도록 간구하고 기도하면 좋겠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다. 복음주의적인 주석서들은 대개 이렇게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러면서 골로새서는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잘못된 가르침은 이성주의, 율법주의, 금욕주의이다. 이게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잘못 이해하면, 우리에게 이성, 율법, 금욕은 다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우월성만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치 기독교는 반이성주의, 반율법주의, 반금욕주의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를 불러온다. 예수 그리스도만 중요하고, 다른 것을 다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것 같지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는 세상을 등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에 사로 잡히면, 세상과의 소통이 멀어지고, 세상의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며, 자기 신앙 안에 갇혀 고립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정말 답 없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성의 완성이시고, 율법의 완성이시고, 금욕의 완성이시다. , 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고, 율법도 마찬가지고, 금욕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성과 율법과 금욕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있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근본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아주 중요한 기도를 담고 있다. 9절부터 12절이 기도이다.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9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서 아는 것에피그노신이라는 헬라어를 쓴다. 이것은 의도적인 표현이다. 골로새 교회가 맞닥뜨린 도전은 영지주의(그노시스즘)’에 대한 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들이 주창하는 지식(그노시스)’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말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쭐해진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은 그 누구도 우쭐해질 수 없다. 모든 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고 있고, 누구든지 어떤 지식에라도 접속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어떠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듯 말하는 집단은사이비. 대개 이단이나 저급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푸는 성경의 내용이 대단히 비밀스러운 것인데 그 비밀을 특별히 노출하고 있는 양 말한다. 지식의 독점을 주장하는 사람은 건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다만 진리는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자신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고 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진리는 자신을 숨긴다. 그러나, 진리를 어린 아이와 같이 사모하고 누구와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진리를 모습을 드러낸다.

 

바울은 기도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며!”(9, 10). “아는 지식”, (knowledge)”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에서 시작된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말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참된 이치를 깨달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이렇게 들리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 알게 된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위에서 이야기 한 에바브라 이외, 에바브로디도와 디도가 있다. 에바브라, 에바브로디도, 디도는 한결같이 바울처럼 순교하기를 결심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힌 바울을 돌보며 빌립보 교회와 가교 역할을 했다. 그가 왜 그런 수고로운 일을 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도는 그당시 목회하기 가장 힘들다는 크레타 섬에 가서 목회를 했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디도서에 나오듯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고, 마음이 사악했고, 행동이 게을렀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1:12-13). 그런데, 디도는 왜 그런 곳에 가서 기꺼이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브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듣고, 고향인 골로새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구는 교회 하나를 세우기도 힘든데, 세 군데나 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면,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게으른 종으로 사는가?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우리 교회를 향해 드리는 기도로 들리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들이 모인,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면 좋겠다. 우리 얼른 부흥해서, 교회 개척 많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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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14. 08:15

You’re in good hands

(잠언 1:20-33)

 

세상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많은 일들에 우리가 다 적절하게 대처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것들 때문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보다 큰 존재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 우리의 삶을 평안케 하고자 함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긴 하지만, 모든 종교에는 기복(복을 간구함)’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 문제지, 만약 우리의 신앙에 기복의 요소가 없으면, 누가 종교에 매력을 느끼겠는가.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야말로 지혜롭게대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그러한 지혜를 얻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육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특별히 잠언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깊이 가르쳐 준다. 나는 잠언서 읽는 것을 참 좋아한다. 마침 잠언서는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한 달에 한 번씩 통독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문서/지혜서’(시편, 잠언, 전도서)는 삶의 방향을 잃은 것 같았을 때,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묵상하면 신비스럽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말씀이다.

 

본문을 보라. 우리를 부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평소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시집 가야하고 장가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서’,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를 매일 부르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지혜이다. 지혜는 우리를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20).

 

이렇게 불러 대는 데도, 우리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다. 지혜는 우리를 불러서,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지를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를 멸시한다.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그러다, 재앙을 만나면 울고, 슬퍼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환란의 때에 구원을 받는다.

 

이게, 당연한 이야기 같고,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자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지혜로운 줄 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심리학적 용어로 메타인지가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저 너희가(어리석은 사람)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30).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해서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예언과 환상을 주셨고,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두려움 없이교회를 세워 나가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예언과 환상을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이다.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의 말씀은 어디에서 왔는가?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기억하고 계신가?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이다.

 

에스겔서 16장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피투성이 같은 연약한 이스라엘을 씻기시고 입히셔서, 왕후의 지위에 올리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에스겔서 47장은 성전에서 물이 나와 강을 이루고 그 강 좌우편에 심긴 나무들이 다음 말씀처럼 되는 환상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47:12).

 

지난 2019128일을 일컬어 코스피 굴욕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날 애플(사과주식회사/우리동네기업)의 주식 시가총액은 1,402조가 되었고, 그 총액은 코스피 전체의 주가 시가총액 1,384조를 넘어섰다. 애플이 주식의 시가총액이 높은 이유가 뭔가? 미래에 대한 성장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할 때, 이렇게 미래에 대한 성장 기대치를 말해주는 시가총액을 보고 투자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보고 미래 대한 성장 기대치를 가질 수 있을까? BTS의 팬덤 Army1억명이 넘는다. 여기 1억명은 BTS를 위해서 뭔가 하나라도 구매를 통해서 기여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이 BTS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치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보고 교회를 정해서 다니며 그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투자하는가? 규모나 시설 등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시가 총액이 아니라, 그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비전)’의 말씀이다.

 

여러분은 내가 바보 같은가? 어떤 바보가 망해가는 교회에 오는가? 여러분은 바보인가? 어떤 바보가 망해가는 교회를 지키는가? 내가 우리교회에 오게 된 것, ‘아 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나의 인생을 헌신해야겠구나!’라고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외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 때문이다.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치가 없는 곳에 자신의 돈도 아니고, 인생을 투자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내가 바보처럼 보이는가?

 

3대째 목회자로서, 그리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일에 인생을 건 목회자로서 내가 평소에, 그리고 평생 연마하는 기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술이다.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신비를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지혜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시끄러운 길목에서, 성문 어귀에서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훈련 받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이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최근 Netflix에서 상영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꼭 보시라! 정말 좋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가톨릭의 전현직 교황 두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고해성사이다. 두 교황이 서로 고해성사 하는 가운데,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전직 교황(베네딕투스 16/조세프 라칭거/265)은 교황직을 내려 놓는 자리로, 사직하고 싶었던 추기경(프란치스코/호르헤 베르고글리오/266)은 교황직에 오르는 자리로, 서로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과정은 서로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다. 전직 교황 베네딕투스 16세는 자신이 교황직을 내려 놓으려는 가장 큰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요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았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다. 요세프 라칭거는 원래 엄청 유명한 신학자이다. 여성신학자로 유명한 하버드대학의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라는 분이 있다. 사실 이분 보다 더 유명한 분이 그의 남편 프란시스 피오렌자이다. 프란시스 피오렌자가 하버드 대학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본인의 부인을 함께 임용하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도 엄청 뛰어난 학자였기에 하버드에서 프란시스 피오렌자의 요구를 승락했지만, 프란시스 피오렌자는 그만큼 뛰어난 학자다. 프란시스 피오렌자의 스승이 누구냐면, 철학자 하버마스와 요세프 라칭거이다교황 베네딕투스 16세는 결국 베르고글리오 추기경과 대화하며 고해성사하는 가운데,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비전)의 말씀이 없는 곳에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다. 정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주변여건사정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을 고려한다. 그게 없으면 발을 들여 놓지 않고, 그게 있으면 지옥이라도 간다! 루터도 이런 말을 했다. “지옥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나는 지옥에 가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라. 진지하게, 그리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라. 마리아가 어린 예수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둔것처럼, 그렇게 내가 간곡하게 드리는 말씀을 마음에 두시라.

 

요즘에 부모들은 스마트폰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다. 아이들하고 매일 같이 스마트폰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고 있는 책 <포노 사피엔스 Phono Sapiens>의 저자 최재붕 교수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이 자신의 장기organ’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무작정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마트폰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할까? 최재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들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연 경험이 없고, 그저 스마트폰을 통해서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나 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들 자신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그런 비효율적 경험 밖에 못하니, 아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목회자로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부모 세대는 아이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본을 보이지 못할까? 교회에서 싸움 박질하고, 교회가 갈라지고 깨지고, 시대에 뒤처진 복음 이야기만 듣고, 뭔가 혁신적이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경험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신비로운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다. 그러한 경험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이 주어진 우리 교회에 그냥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면 된다. 그것을 교회 용어로 교제(fellowship)’라고 한다. 아주 쉽게 말해,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처럼, 생수가 강단으로부터 흘러 나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우리 교회 와서 드린 첫 새벽기도회 때 본 것이다. 나는 그런 환상 보는 것을 추구하거나 갈망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어떻게 하는가. 본 것을 봤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증언할 뿐이다. 그것이 강을 이루고 있다. 그 강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는 것이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잎사귀가 풍성하고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그 잎사귀가 약재로 쓰임을 받는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사는 길이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살며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막에서 우물을 판다고 물이 나오나?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팔 때마다 하나님이 물을 주셨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 이삭은 그렇게 하나님께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다. 우리교회도 하나님께서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을 통해서 복을 내리셨다. 강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보여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눈으로 그게 안 보일지라도, 말씀을 믿는 자는 그것을 보는 자와 같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라. 여러분을 심으라. 여러분을 귀찮게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그렇다. 이 절절한 심정을 보여줄 수 있다며 좋겠다. 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이야기했는데도 안 들리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삶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달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다. You’re in good hands! You’re in God’s hands and his servant’s hands.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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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6. 02:13

기억하고 기대하라

(이사야 46:8-13)

 

2020년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주일 첫 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신과 문화에 압도당해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바벨론의 신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신이 자신들의 여호와 하나님보다 강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패역한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패역한 자들(포쉬임)이라는 뜻은여호와께 돌이키지 않으면 최종적 심판을 맞게 될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 그들에게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과 회개였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라!” 여기서 옛적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 천지창조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출애굽을 통해 구원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그들은 바벨론 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는 것(remember the former things long past)’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구원 사건을 기억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둔다는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예언과 성취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알면, 우리는 모든 우상을 다 버리고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뜻이 설 것이며 내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10).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1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반드시라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하나님의 택한 종고레스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고레스에 대한 예언이 있고, 고레스를 통한 성취가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사나운 날짐승나의 뜻을 이룰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하여내가 말하였을즉 반드시 이를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1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마음에 두면서,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기대하는가?” 세화교회 공동체는 아무렇게나 시작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을 통해서 시작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비전)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우리 교회 공동체에 말씀과 환상(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주식투자도 전망이 있는 회사에 하게 됩니다. 교회에 전망이 없다면 누가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헌신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예언과 성취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 말씀과 환상(비전)은 에스겔서에서 왔습니다.

 

우선, 에스겔서 16 6~14절의 예언이 우리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6).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개인이든 (가정, 교회) 공동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부임하며 이 말씀이 우리 교회 공동체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투성이였고, 알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서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칭송하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시켜 주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에스겔서 16장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해 보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예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서 47 1~12절의 예언이 우리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온 땅에 흐르는 환상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과 연관됩니다.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은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와 그 물을 통하여 강이 형성되고, 그 강 가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그 물로 인하여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고, 나무에서 열리는 과실은 끊이지 않으며 맛있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로 쓰이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에 부임하여 처음 새벽기도회를 드릴 때, 저는 이 환상이 우리 교회에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앉아서 기도하는 강대상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회중으로 흘러 들어가,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처럼 교회 바깥으로 그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한 환상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볼 수 있는 환상입니다.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저는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부르시고 보내셨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교회를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섬기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해예언하셨습니다. 에스겔서 16장의 말씀처럼 우리 교회를 영화롭게 하시고, 47장의 말씀처럼 생명력 넘치고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힘입어, 우리는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시대를 이끄는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열심을 낼 이유가 없고, 수고할 필요가 없고, 기도하며 기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기억(말씀과 환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화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의 관전포인트는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words)과 환상(vision)을 잊지 말고 기억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환상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인간의 교제 가운데 세워가는 인간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언(말씀과 환상)을 주셔서 세워 가시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영광을 누리는 세화 공동체의 아름다운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문

 

주님,

주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비전)을 기억합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모였으며

그 예언이 성취될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예언을 성취하도록 부르신 고레스가 되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믿음과 상상력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비전)을 공유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를 영화롭게 하시고 생명력이 넘치고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 공동체로 세워 가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하며

열심을 내고 수고하며 기도하고 기대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주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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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4. 01:52

흔들리며 성장하는 믿음

(마태복음 14:22-36)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2019년 한 해, 흔들리면서 잘 살아왔다.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시간을 돌아보면 그렇지만, 어려운 순간 순간에서는 이러한 찬양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먼저 나오기 마련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큰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동안 자기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기 위하여 모세라는 지도자를 준비하신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스로 출애굽에 성공한다.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날 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했던 말씀은 유명하다.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높이 찬양한다. 그런데, 그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서 사흘길을 걸었는데, 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발견한 물이 있었는데, 먹으려고 보니, 써서 못 먹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마라(쓰다)’이다. (먹지 마라,의 마라가 아니라, ‘쓰다의 마라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큰 역사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물이 없자, 금방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우리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라, 우리의 본연적인 모습이다. 그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만들어 주신다.

 

본문은 이러한 정황을 담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교회를 시작했으나, 마태공동체(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마치 그것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갈릴리는 원래 호수이다. 그런데 너무 커서 호수라고 안 부르고 바다라고 부른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상상태가 변해 고요하다가도 풍랑을 만나기 일쑤다. 갈릴리 호수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마태공동체(초대교회)를 표현하기에 딱 좋은 메타포이다.

 

마태공동체가 겪는 고난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4). 배는 마태공동체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시작된 지 시간이 지났다. 이제 다시 배를 육지로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24). 예수에 대한 신앙은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앙공동체는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토요일(1228) 어른 넷, 청년 셋, 이렇게 7명이 에머리빌항구에서 고기잡이 배를 타고 출항했다. 날씨는 좋았으나, 파도가 좀 높게 출렁였다. 나름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옷도 스키복으로 따스하게 입고, 멀미약도 먹고 붙였다. 따스한 물도 준비했고, 먹어도 크게 부담이 없는 간식들도 준비했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공기는 청아했다. 지나치면서 본 샌프란시스코와 알카트레즈, 그리고 금문교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금문교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니 태평양이 펼쳐졌다. 등대가 깜빡였다. 파도가 절벽을 쳤다. 등대의 깜빡임과 절벽을 끊임없이 때리는 파도소리는 감성을 자극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뱃머리에 앉아, 파도의 출렁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쯤 지났다. 이제는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와서’ 돌이킬 수 없는 거리에 당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반복해서 출렁이는 파도를 몸이 견디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워 왔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손과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을 눕히고 싶었다. 그런데, 배 안에 몸을 눕힐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이미 좋은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자비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뱃머리에 몸을 눕혔다.

 

육지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파도는 거세 졌다. 파도가 배를 덮쳤다. 바닷물이 뱃머리에 누워 있는 나를 덮쳤다. 그래서 나는 바닷물에 젖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내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움직일 수 없었고, 피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는 계속 어지러웠고, 팔 다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존재가 이렇게 나약할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더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배가 섰다. 배가 서니 출렁임이 더 심해졌다. 더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고기를 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이 자연스럽게 푹신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는 의자가 공석이 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곳으로 가서 몸을 눕혔다. 찬 바닥에서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눕혀서 고통은 약간 덜했지만, 이제 바람이 불면서 젖은 몸이 추워졌다. 몸을 떨었다.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엄마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순간 마침 챙겨온 손난로가 생각났다. 손에 쥐는 아주 작은 난로였다. 나는 그것을 부여잡고 추위를 견뎠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는 동안 몸은 체온유지를 하기 위해서 저절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래서 추위가 사라졌다. 잠에서 깨니 뜨거워져 있던 몸이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또 추웠다. 나는 잠 들려고 노력했다. 잠을 자면 몸이 저절로 뜨거워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 가운데, 8시간 동안 배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고기잡이 배가 다시 금문교를 통과해서 항구로 입항할 때쯤 몸을 다시 가눌 수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물결로 말미암아 당한 고난은 멀미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다. 그것은 리얼이다. 가상의 고난이 아니다. ‘리얼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고통이 극심해졌을 순간, 밤 사경(새벽 3-6시경), 밤이 가장 깊은 시간, 즉 고통이 가장 극심한 순간에,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제자들은 처음에 그것이 유령인 줄 알았다. 죽음의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데,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결정적 한방이 온 줄 알고, 그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런데, 다행히 그것은 유령이 아니고, 예수님이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예수님인 것을 확인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이것은 고통 가운데서 외치는 간곡한 기도이다. “주님, 지금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물 위를 너도 걸어보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능히 이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힘을 내서 바다 위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예수님만 보고 물 위를 걸어갔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이고 이상한 걱정이 들었다. 바람이 부니, 파도가 쳐서 자기를 덮칠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순간 베드로는 바다에 빠져갔다. 베드로는 소리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예수님은 바다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그리고, 베드로를 건져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른다. 그랬더니, 바람이 그쳤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함께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또는 내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동역자는 참 귀하다!” 생각해 보라. 출애굽 해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출애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출애굽하지 않고, 그냥 애굽에 남아 있었다면, 그러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원망과 불평이 얼마나 귀한가! 원망 없이, 불평 없이, 어떻게 출애굽을 하며, 그 험한 광야를 어떻게 건너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는예수님의 제자들이 참 귀하다. 그들이 배를 타지 않았다면, 그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면, 그러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를 탔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넜다. 그러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니, 고난 당하고 있는 그들 입에서 나오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탄식이 얼마나 귀한가.

 

사역(ministry)을 진짜(real)로 하지 않으면, 고난도 없다. 파도가 일렁이는 배를 타지 않으면 멀미때문에 고난 당할 이유가 없다. 배를 탔을 때 겪는 뱃멀미가 리얼이듯이, 사역을 하면서 겪는 고난도 리얼이다. 그러니, 뱃멀미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사역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믿음이 없어서 그러한 탄식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사역하면서 고난을 리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가!

 

사역하면서 우리교회에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은가? 바로 나다! 나는 매일 운다. 울면서 나는 매일 원망한다. 불평한다. 탄식한다. 배 타고 8시간 동안 꼼짝 없이 뱃멀미하며 신음했듯이, 어쩌지 못해, 매일 신음한다. 가장 많은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늘어놓는 나를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신다. ?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이고, 애굽을 따라나서 출애굽 했기 때문이고, 배에 올라타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겪는 고난을 리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역은 장난이 아니다. ‘리얼이다. 배를 타고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넘는 것과 같다. 사역을 하면 고난을 당한다. 그 고난은 가상이 아니다. ‘리얼이다. 고난이 리얼이기 때문에, 입에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하는 척 하는게 아니라, 진짜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역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쏟아 놓은 사역자를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고기 잡으러 나가서 아무런 고기도 잡지 못하고, 꼬박 8시간 동안 뱃바닥에 붙어 있다 왔지만, 나는 행복했다. 좋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우리가 두고두고 깔깔거리고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많이 당했지만, 2019년도 바로 여러분들이 곁에 있고, 여러분들과 사역하면서 행복했다.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믿음은 없다. 사역은 리얼이기 때문에, 리얼로 고난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사역을 하면서 겪는 고난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쏟아져 나오거든, 참지 말고 내놓으시라. 나한테도 내 놓고, 주님께도 내 놓으시라. 괜찮다. 믿음이 적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니라, 여러분이 리얼로 사역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새해에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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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4. 01:46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2:13-18)

 

우리는 성탄절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성탄절 때, 구유 안에 누우신 예수를 생각하며, 목자들의 찬양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도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처럼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스토리 전개를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우리는 대체로 이것을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따로 떼 내어 마치 없는 것처럼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방박사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유대땅을 떠나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잔인한 일들이 발생한다.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찬양과 경배의 아름다운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갑자기 학살이라는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해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13).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행동지침도 알려준다.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13). 이 사건에 대하여 마태는 이것이 예언의 성취를 이룬 이야기라고 설명해 준다.

 

마태복음은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자 쓰인 성경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의 구조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며,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인물로 생각나게 한다. 이런 예언의 성취모티브는 다음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요셉이 주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아기 예수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유대 땅에는 슬픈 사건이 발생한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을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모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이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16) 지시했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하여,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잃은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이 사건을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마태가 끄집어 낸 구약의 성경은 예레시야서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31:15).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질문 거리를 가지게 된다. 왜 라헬이 등장을 하며, ‘라마라는 지명은 무엇인가?

 

라헬(Rachel)은 야곱의 두 부인(레아와 라헬) 중 한 명이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2명의 아들 중, 마지막 11번째와 12번째 아들이 라헬에게서 난 아들이다. 라헬이 난 두 아들은 요셉(11번째)과 베냐민(12번째)이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는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 39장에 보면,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다. 그래서 그녀는 베들레헴에 묻힌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라헬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 때문에 발생한 유아학살사건도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래서 라헬은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라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남유다의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집결시켰던 곳이다. 라마는 슬픔이 시작된 곳으로서, 베들레헴의 이미지와 같다.

 

여기서 또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라헬의 통곡을 말하는 이유다. 라헬은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라헬의 소생 요셉의 아들)의 할머니이자, 남유다를 이루는 베냐민의 어머니이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이방인들)에 의해서 멸망할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남유다가 망해가는 것을 바라보며 한 없이 눈물을 흘렸던 선지자이다.

 

라헬의 통곡은 남유다보다 먼저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억이다. 자식을 갈망하던 라헬이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은 이방민족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며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비극적인 슬픔을 극적으로 묘사해준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할 때 가졌던 가슴 아픈 기억이, 지금 남유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라헬이 통곡하며 위로 받기를 거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리얼이다. 내장이 뒤틀린다. 그래서 그것을 단장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 민족에게 자식을 잃게 된 라헬은 통곡 소리만 낼 뿐, 어떠한 말로도 위로받지 못한다.

 

마태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끌어다가 예수의 탄생 사건과 함께 발생한 유아학살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라헬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는 예레미야서 31장의 말씀의 주제가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유대땅에는 유아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라헬이 통곡 중이다.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죽인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그는 에돔(이두메) 사람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땅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런,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은 그 옛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같은 역사적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유아학살사건과 라헬의 통곡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떡하냐. 라헬의 통곡을 하고 있는 저 수많은 라헬은 누가 위로해 주지? 무슨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저 라헬은 어떻게 위로를 받게 될까?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저 가장 큰 슬픔을 지닌 수많은 라헬은 누가 어떻게 위로를 받지?” 이러한 깊은 질문에 마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사건에 휩싸인 베들레헴의 수많은 라헬은 가까스로 애굽으로 피난하여 곧 귀환하게 될, 예수에 의해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성탄절은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탄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장사 안 된다고, 탄식을 싫어하는 상업주의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게 하여, 성탄절 이야기가 마치 기쁨만 있고, 탄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탄식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순서적으로 기쁨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탄식이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도래는 탄식때문이다. 사람들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탄식, 라헬과 같은 깊은 통곡, 그 무슨 말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위로해 주신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망인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라헬의 통곡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군가는 성탄절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아학살사건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만 살고 다른 유아들은 죽게 내버려둔 그가 무슨 메시아냐? 메시아가 탄생했을 때 왜 갑자기 그 메시아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 하나? 이 사건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군!”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면, 충분하게 가질 수 있는 의구심들이다. 나도 그랬다. 나도 의문을 던졌다. “왜 메시아가 탄생했는데,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야만 했지?”

 

그러나, 복음서를 끝까지 읽으면 그러한 의구심들이 풀린다. 우리는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자기만 살아난메시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슬픔과 고통을 몸에 지고 그들과 함께 죽는그리고, ‘그들에게 참 위로가 되기 위하여 죽는메시아를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한 신비이자, 위로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수많은 순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순교를 잘못 생각한다. 우리는 순교를 예수를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교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다. 예수를 위해 죽지 말라. 우리가 죽어서 예수를 영화롭게 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순교하는 이유는 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순교하는 이유는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는 라헬의 통곡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그래서 순교는 값진 것이다.


(아래 세바스티아의 40명의 순교자들 이야기는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옴) 

"겨울이면 생각나는 세바스티아의 40명의 순교자들이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박해종식 칙서에 공동서명한 리키니우스(Licinius) 동로마 황제는 316년 태도를 돌변하여 카파도키아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교부 바질(Bishop Basil of Caesarea (370–379))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세바스티아[지금 터기의 Sivas]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 아그리콜라우스는 40명의 기독교인 군인들을 벌거벗겨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집어넣는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한다. 그리고 호수 곁에는 장작불을 지펴 놓고 이교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옆에는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를 놓아두고 배교를 유혹했다.

 

그러나 40인의 군인들은 한 목소리로 밤새 노래를 부르며 버텼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40인의 선한 군인, 40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40 good martyrs, 40 good soldiers for Christ.” 이들은 3일간이나 지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기도와 노래를 했는데 그만 그 중 한 명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이교 신에게 절하고 따뜻한 욕조에 뛰어들었으나 심장마비로 즉사하고 만다. 동료의 배교로 슬픔에 잠긴 군인들은 다시 힘을 내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39명의 선한 군인, 39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이 때 이교도 교도관 군인이 잠시 졸다가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천사장이 내려와 순교를 작정한 이들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닌가. 이에 감동한 교도관 군인이 배교한 병사의 자리를 대신 자기가 채워 면류관을 받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도기독교인이 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순교를 다짐한 대열에 참가한다. 군인들은 다시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40인의 선한 군인, 40인의 선한 순교자라네."

 

그 다음 날 아침 총독은 아직도 숨이 남아 있는 40명을 끄집어 내어 화형에 처한다.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순교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되는데, 바로 2년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마지막 회전에서 격파시키며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고,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UCAL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 이것은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기독교 역사의 일화이기에 그대로 옮겨 적는다.)

 

건장한 청년들이 전장에 나가서 적군에 죽은 것도 아니고, 그들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죽었다는 전사또는 순교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 건장한 청년들의 어머니는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이들도 라헬처럼 통곡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위로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순교는 예수를 위한 죽음아니라,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복음의 선포였기 때문이다.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기도를 드리자.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라헬의 통곡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나 자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사정, ‘라헬의 통곡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에게도, 우리의 형제자매에게도,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라헬의 통곡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위로 받기를 거부하는 그 라헬의 통곡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를 해서라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를 전하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순교자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전한다면, 머지않은 날, 세상의 모든 라헬은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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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24. 02:22

Dangerous Memory

(마태복음 1: 1~25)

 

얼마전 슬픈 소식을 들었다. 독일의 신부이자 저명한 신학자, 요한 뱁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가 소천했다는 소식이었다. 여러분들에게는 생경한 신학자일지 모르겠으나, 신학을 좀 깊이 공부한 사람, 특별히 나처럼 정치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신학자이다. ‘정치신학이라는 분야가 바로 이 신학자를 통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메츠는 몰트만, 그리고 도로테 죌레라는 신학자들과 정치신학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

 

요한 뱁티스트 메츠하면 떠오르는 말이 바로 ‘dangerous memory’이다. 한국말로는 위험한 기억이라고 번역하는데,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번역은 아니다. ‘dangerous memory’라는 것이 무슨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준비한 시가 있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이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시구절이 지니는 심상을 상상해 보면, 메츠가 ‘dangerous memory’라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으면, 우리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여기서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시방 위험한 짐승인 것이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프랑스의 클래식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Émile Frédéric Massenet, 1842 5 12 - 1912 8 13)의 오페라 <베르테르 Werther> ‘why do you wake me now’를 보는 듯하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오페라에서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해 이렇게 노래한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첫 가사가 이렇다. “Why do you wake me now, o sweetest breath of spring? 왜 나를 깨우셨나요? 오 나의 사랑스런 봄의 기운이여!”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에 대한 기록이다. 네 개의 복음서가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 위험한 기억을 풀어놓고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은 그 기억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족보를 써내려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

 

아브라함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왔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다윗을 통해 너의 씨앗을 통해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족보의 형태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족보에서 단순히 이름을 보지 않았다. 이 족보에 적힌 이름만을 불러가며 읽는 것은 1분 정도 밖에는 안 걸리지만, 그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내러티브(이야기)’를 풀어놓으면, 평생이 걸려도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내러티브(이야기)' 공동체이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러나, 이 족보는 그냥 족보가 아니라 '내러티브'의 족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누가 내러티브를 낳고, 누가 내러티브를 낳고..'하는 식이다. 마태복음의 족보도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라는 족보가 아니라, ‘누가 어떠한 내러티브(이야기)’를 낳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렇게 끝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요셉과 마리아는 내러티브를 낳는데, 그 이름은 예수다.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이야기는 범상치 않게 시작한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아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은 여느 사람과 같지 않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였으나,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마태는 아주 신비한 방식으로 마리아의 임신을 풀어낸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것 자체가 아주 위험한 기억이다. 예수는 태어나면서 스스로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고, 그는 지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다. 마태는 그것을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예수는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마태는 예수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1~23).

 

예수의 가능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렇게 방금 태어난 아기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하나님이 예수를 봄의 기운(생명을 잉태하는 기운/성령)을 통해 깨우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위하여이다.

 

이렇게 방금 태어난,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아기, 너무도 연약하여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기, 그렇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마음이 조마조마 할 것이다. 과연, “성령으로 잉태된이 아기는 자신이 지닌 이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꺾이지 않고 발현할 것인가, 아니면 도중에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꺾이고 말 것인가.

 

다시 말해, 예수의 이야기, 즉 그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천사의 예언대로자기 백성의 구원은 탄생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예수의 가능성이 펼쳐지며,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게 될지도 미지수이다. 이제부터, 예수의 이야기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펼쳐질 것이다. 싱거울 수도 있고, 대단할 수도 있다. 그러한 걱정과 기대를 품고 읽어 내려가는 예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dangerous memory’이다.

 

내러티브가 더 이상 생산되는지 않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의 이야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멈췄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예수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것이고, 예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는 그 당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가 됐으며, 그들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구원이 탄생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의 이야기에서처럼 성령을 통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예수 이야기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내러티브'를 낳아야 한다. 거기서 다른 것이 탄생하면 안 된다. 내러티브가 탄생하지 않고 다른 것이 탄생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의도'로 한 행동이 될 뿐이다. 내러티브로 시작된 공동체(또는 신앙인의 삶)에 내러티브가 없다면, 정육점에 고기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지금 어떤 내러티브를 낳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지금 어떤 내러티브를 낳고 있는가. 내러티브는 하루 아침에 낳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가 열 달 엄마 뱃속에서 잘 양육 받다가 산고의 고통과 함께 탄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내러티브도 믿음에 의한 양육과 고통 가운데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뱃속에서 어떠한 내러티브를 잉태시키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봄의 기운)’ 무한한 가능성을 지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그 ‘dangerous memory’를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말라. “우리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채워져 있다. 예수가 연약하게 태어났으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한 번도 탄생시키지 못한 부활을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그 누구도 한 번도 탄생시키지 못한 부활과 같은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예수의 그 ‘dangerous memory’ 안에서 우리들의 삶에도 떡두꺼비 같은 내러티브가 탄생하길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16. 15:36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사도행전 6:1-7)

 

우리는 지금 ‘missional church’로 거듭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있다.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 추진하고 있는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missional church’를 세워 나가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는 무엇인가?

 

‘Mission’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사명이라고 번역한다. Mission은 라틴어 ‘mitto(mittere/missio’에서 왔다. 그 뜻은 보내다, 파견하다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기독교인의 경우 보냄을 받았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고(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집무를 보시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어딘가에 가서 무슨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랜 세월, mission은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한다. “주님! 보내 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찬송 부르길 좋아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러한 신앙도 엄청난 신앙이다. 믿음이 변한 건지, 세상이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사실 요즘 이러한 신앙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미션을 생각할 때,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어디론가 보내져서 그곳에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물론 지금도 그렇다) 선교는 해외선교, 국내선교, 지역선교등으로 어떠한 공간으로 파송받아 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선교가 가지고 있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missio dei’라는 선교신학 용어를 알아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라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선교사가 주창한 개념이다. 이는 그의 선교경험에서 나온 통찰로, 서남아시아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하던 그는 그곳에서 이미선교하고 계신, ,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전까지, 그는 선교란 위에서 언급했듯이, ‘보냄을 받아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후, ‘선교에 대한 개념을 다시 가지게 됐다. 그래서 ‘missio dei’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교를 뜻하는데, 이 개념을 통해 그가 주장한 것은 선교란 하나님이 이미 선교하고 계신 그곳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선교란 보냄을 받는수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능동적개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어떠한 오지에서 일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일하고 계시고, 우리의 가정에서도, 우리의 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나라, 그리고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떤 지역에서도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붙잡고 계신다.

 

하나님의 선교란 이러한 뜻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려면 요구되는 것이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bility)’이다. 감수성(Sensibility)이라는 말은뭔가를 감지(se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말한다. 여기서 영적 감수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교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이 영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하나님의 선교를 감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그곳에서 동역한다는 뜻이다.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부모로부터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철 든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를 알고, 어떻게서든 부모님과 함께 가정을 세워 나가고 인생을 꾸려 나가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일례로, 이런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목회하시면서 교회를 세 번 건축하셨다. 강화도에서 한 번(강화도에서 목회하실 때 내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목회하실 두 번 하셨다. 강화도에서 건축하실 때는 내가 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 내 힘으로 교회 건축을 도울 수 없었다. 물론 그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돌반지는 모두 교회 건축하는 데 쓰임을 받았다. (그 전통에 따라, 우리 두 아들의 돌반지도 모두 조지아에서 교회를 건축할 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교회 건축을 하실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싶었고, 아버지의 목회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학생이 무엇으로 건축헌금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르바이트를 할까? 어디 가서 모금을 할까?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싶어하실까? 내가 무엇을 하면 아버지가 기뻐하실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래, 내가 학생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자!” 그래서 학생신분에 맞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장학금을 탔다. 그 당시 장학금은 70만원이었는데, 세 번을 연속해서 탔다. 210만원을 교회 건축하는 데 드릴 수 있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이 교회 구성원으로 많이 들어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multi-cultural church였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문화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문화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때론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본문은 그 갈등 상황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뤘던 곳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유대 땅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유대문화와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불평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만해도, 사도들은 가난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굶지 않도록 밥을 잘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보니, 단순히 밥을 잘 먹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고, 그들의 마음을 돌보며, 그들이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행정적으로 조직을 잘 정비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님은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까지도 일하신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지혜를 모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 쓰리라!”(2-4).

 

사도들은 사역을 하면서 아차싶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선교’, 또는 사역이라는 것은 그들이 발명(invent)’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mission)에서, 사역(ministry)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감수성이다. ,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하는 일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발명해서 해 놓고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행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 그게 누구인가? 나중에 이름이 바울로 불리는 사울이다. 사울의 등장은 스데반의 죽음과 엮여 있다. 바나바의 등장도 심상치 않았듯이, 사울의 등장도 심상치 않다. 일곱 집사 중 가장 촉망받던 스데반이 그 짧은 인생을 순교로 마감하게 될 때, 사도행전은 사울의 등장을 알린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7:60; 8:1).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울이 어떻게 초대교회를 박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울은 초대교회를 박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해 교회를 박해했다. 그런데, 사울은 어느 순간, 자신이 하는 일이 선교가 아니라,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메섹 도상의 이야기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9:4) 사울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bility)’이 부족하면 누구에게든지 이러한 일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영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바로, 본문에서 사도들이 깨닫고 시행한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 이 말은 사도들이 다른 일에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밥 퍼주는 일은 느그들이 하고, 우리는 그 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본인들이 행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져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과 상처를 불러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말씀과 기도 사역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다.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영적 감수성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의 선교는 구원을 이루지만, 자기기만은 죄악(추악한 일)’을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고, 생명을 죽인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선교인가.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생명을 낳는다(풍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지, 우리가 선교를 발명하면 안 된다. 인간의 일은 생명을 풍성케 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영적 감수성은 말씀과 기도로 키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언어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발명해서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실제 삶 속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것때문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가. 부부의 예를 들면, 꽃 사오는 것을 싫어하는 부인과 꽃 사오는 것을 즐기는 남편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들꽃 하나에도 감동을 느끼는 아내와 그러한 마음을 전혀 모르는 남편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아내는 들꽃 하나만 꺾어다 주며 사랑을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남편은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다줘야지 행복할 거라고, 들꽃 따위에게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돈을 버느라 생명을 허비한다면, 이 소통의 부재가 그 가정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missional church”는 단순히 선교 많이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여, ‘하나님의 선교’, 즉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사역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하여, 부르심을 받아,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 성경공부와 기도훈련을 통하여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중이고,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를 통하여 영적 감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속회의 mission project발견해야 하는지 감이 잡혔으리라 믿는다.) 이 가슴 벅찬 일을 진행하고 있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영적 감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부르심을 받고,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삶에는 아주 실제적이고 생생한 구원의 열매가 팝콘처럼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파루시아를 살다,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진지하게 읽어보시라.)

혹시, 복잡하다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딱 한가지만 해달라. 참여! (함께 가자!)

 

‘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 ‘spiritual sensibility 영적 감수성’, 그리고 말씀과 기도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good spirit’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세상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시대를 이끄는,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10. 07:08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도행전 5:27-42)

 

200611월에 시작하여 2007년도 7월에 막을 내린, MBC<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이 있다. <순풍산부인과> 이래 최고의 인고를 끈 시트콤으로 기억되는 TV 프로그램이다. <순풍산부인과>를 통해서 송혜교가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면,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박민영, 정일우, 김범 등이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특별히 정준하와 박해미의 부부역할, 그리고 야동순재로 이름을 날린 이순재의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제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시트콤은 한마디로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한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이들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서 함께 웃고 울며 즐거워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연상케 한다. ‘유쾌통쾌상쾌의 코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활동에 중점을 둔 성경이고, 바울서신은 본인이 개척한 교회를 잘 세워 나가려는 복음과 교훈에 중점을 둔 성경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신약성서 내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의 승천(부재) 이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한, 활동이 담겨 있다.

 

사도행전을 보고 있으면, ‘이게 뭐지?’라는 질문이 저절로 생긴다. ‘복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성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들은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은 여전히 답답하고 악이 판을 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모습은 유쾌통쾌상쾌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하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유쾌통괘상쾌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있다.

 

본문은 사도들(제자들)의 예루살렘 사역의 절정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 공의회는 사도들을 협박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마라고 했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계속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도들의 행동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으며, 교회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성장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들어가고 결심한 백성들이 줄을 섰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유대 지도자들은 시기(젤로스)’에 가득 찼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또 잡아다가 공의회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성전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사도들을 감옥에서 놓이게 한다.

 

공의회 감옥에 갇혀 있는 줄 알았던 사도들이 감옥에 있지 않고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보고 당황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을 잡아 다시 공의회 앞에 세운다. 대제사장이 묻는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에 대한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우리말성경).

 

이에 대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29/우리말성경). 그리고 그 앞에서 유쾌통쾌상쾌한 모습으로 그들이 가르치지 말라고 한 복음을 다시 전한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30-31/우리말성경).

 

사도들은 왜 이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것일까? 이어지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32/우리말성경). 사도들이 이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하시는 분이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성령과 더불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증인이 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어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성이 아니라 역동성이다.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여 일어나게 되는 구원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사도들에게 한 방 맞은 공의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회개대신에 크게 노를 발한다. 사도들의 거침없은 하이킥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무죄한 피를 흘린 죄이다. 지도자들의 불감증이 얼마나 심한 지,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려는 모습이 전혀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들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피를 우리와 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5).

 

이 구절은 굉장히 논쟁적인 구절이라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 구절을 근거로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굉장히 사악한 해석이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성경은 복음이 아니라 사람 잡는 살인병기가 된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무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은 죄에 대한 불감증의 증세도 보인다.

 

자신의 죄를 들추려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보통 회개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인 양 변명하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사람을 공격한다. 죄는 이래저래 미움과 다툼과 분열을 낳는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게 은혜다. 그 기회를 회개라 한다. 회개는 대단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을 탄생성(natal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들의 거침없는 하이킥에 한 방 맞은 공의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반격에 나선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한다. 그때, 바리새인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 공의회 회원들에게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가말리엘은 덕망 있는 율법학자로서,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행한 연설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지금 저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언젠가 드다가 나타나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공포하고 다니자 400명가량의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 뒤에도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인구 조사를 할 때 나타나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도모했지만 역시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35-39/우리말성경).

 

우리 나라 말에는 그 헬라어의 표현 문법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말리엘의 연설에서 쓰인 첫 번째 문장은 개연조건문(eventualis)이 쓰인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은 미래에 있을 가능성을 가정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는 사실 조건문(realis)이 쓰인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은 사실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물론, 이것은 가말리엘 자신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의도된 문장이다. 누가는 가말리엘의 연설을 통해서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났으므로(사실이다!), 너희는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이들을 박해하므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이어진다. 가말리엘의 설득력 있는 연설에 의해 공의회는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채찍질 몇 번을 한 뒤 그들을 놓아준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을 기분 나빠 하거나 불쾌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유쾌통쾌상쾌하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의회를 떠났습니다”(41/우리말성경).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이 증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더불어 전하는 복음의 증언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성령 또한 영원하시니,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고 힘들어도, 이 세상이 아무리 세속에 물들어 교회가 힘을 잃는 것 같고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도,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령을 받는 한, 성령과 더불어 행하는 우리의 증언이 그지치 않는 한, 교회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성령을 날마다 간구하며, 힘을 내자.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유쾌통쾌상쾌하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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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3. 07:00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사도행전 5:1-11)

 

사도행전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촉발되었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발생한 일들이다. 사도행전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령 강림을 통해서 탄생하게 된 교회 공동체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공동체임에 틀림없다.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공동체, 교회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다(2:3).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다(3:16). 셋째,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다(4:28). 다시 말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롯이 드러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처럼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이 각 사람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 간구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성령을 부어 주소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을 일으키면서 한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일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합니다. 그 이름이 이 일을 이루실 줄 믿나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공의회에서 놓임을 받은 후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뜻을 구하는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예정하신 그 일들을 이루소서!”


성령 임재를 통해 새롭게 세워진 공동체, 교회에 위기가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위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매우 당혹스러운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촉발되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행진이 갑자기 멈춰 설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여호수아 7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해석되어 왔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이고, 그래서 기독교인은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을 볼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단이라기 보다는 무식한 이라고 부르는 게 낫다. 아이러니컬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를 깊이 이해하려면 신약보다 구약에 대한 지식을 깊게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은 하늘에 뚝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구약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1세기와 2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헬라철학을 염두에 둔 것은 사실이나 신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개념과 용어, 그리고 상징들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신약에 등장하는 상징은 모두 구약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배치했을 거라고 말한다.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을 드디어 끝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드디어 입성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 무엇도 그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가나안 입성 전에도 주변 나라들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전투에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처음 치른 여리고성 전투에서도 하나님은 그 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여리고 성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작은 성, 그래서 이름도 아이성인 바로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한다. 행진을 멈추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승리할 줄 알았던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퇴각했고, 무엇보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됐다.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성 전투를 통해, 백성의 마음에 담대함이 사라지고, 절망이 싹 튼 게 문제였다. 절망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이 아이성 전투에서 멈추어 섰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겪은 첫 번째 위기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하나이까”(수 7:6-9).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응답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헤렘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헤렘법을 어긴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며, 그 헤렘법을 어긴 당사자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과 함께 멸절하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7:15).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 만난 원수들을 모두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군대가 강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이 그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제비를 뽑아 헤렘법을 어긴 자가 누구인지를 색출해 낸다. 그가 바로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었다. ‘헤렘법을 어긴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다. ‘헤렘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행진의 원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그들이 가진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었다. 헤렘법에는 그 마음과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바로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이야기와 연결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한 물질 문제가 아니라 헤렘 개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 없으면, 교회 공동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 거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 없으면,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행진은 멈춰 설 수밖에 없다.

 

탐욕을 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더니 탐욕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는 탐욕의 원리로 돌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탐욕만큼 필요 없는 것도 없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자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을 흉내만 냈을 뿐, 실제로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가 사람(사도들)에 의해 세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그 땅 판 값 중 얼마를 자신을 위해 떼어두고(노스피조마이)’서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이 전부인 양 속인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두지 않는, 아간이 보였던 헤렘범의 위반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아간이 죽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또한 죽게 된다.

 

남편 아나니아가 죽고 나서, 세 시간쯤 뒤에 영문도 모르고 사도들 앞에 선 삽비라는 남편과 함께 지식을 공유(쉰오이다)’했기에 남편과 동일한 대답을 늘어 놓는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삽비라를 꾸짖는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 여기서 함께 꾀하다서로 같은 목소리를 내다’, ‘함께 일치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내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와 같은 운명을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그녀도 남편처럼 죽게 된다.


아나이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개인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속이면 죽게 된다는 협박도 아니다. 아간의 이야기가 아간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는 교훈이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또한 교회 공동체에 주는 교훈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고, 예수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 같다.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두지 않는다면, 한걸음도 행진할 수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보았듯이, 그 무엇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거나 막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대림절(Advent),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최고의 갈망이고, 구원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다. 멈추지 않고 기어이 오시는 하나님 나라를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기다리고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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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