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25. 15:42

바나바는 왜 그랬을까?

(사도행전 4:23-37)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로 알려진 초대교회 인물이다. 바나바는 바울이 사도와 제자들의 서클에 들어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로 유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전도하여 교회 공동체에 정착시키는 사역을 바나바 사역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만약 누군가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TV 드라마를 제작한다면, 바나바의 등장을 어떻게 그릴까, 궁금하다. 내가 드라마 PD였다면, 한 회의 마지막 장면에 멋지게 등장하는 바나바를 그리면서, 다음 회를 궁금하게 만들 것 같다. 실제로, 본문을 보면, 바나바의 등장이 심상치 않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상상력을 가지고,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6-37).

 

상상이 되는가? 드라마 마지막 씬으로 이 장면이 등장하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생각만해도 짜릿하다. 그렇게 강렬하게 등장하는 바나바의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은 앞으로 발생하게 될 바나바의 활동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바나바는 왜 그랬을까? 바나바는 왜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까? 바나바도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의 한 명이었던 것 같다. 그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설교를 통해 증언한 것을 믿었던 것 같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는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사도행전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첫회는 반드시 십자가 사건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사건의 발달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십자가 사건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 그 당시 평범한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한 유대의 시골뜨기 사내가 하나님 나라 운동하다가 당국의 눈 밖에 나서 체포되어 죽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건으로 봤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언은 그들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사건에 대하여 강력한 클레임을 걸고 있다. 십자가 사건은 평범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클레임 중의 하나가 본문에 담겨 있다.

 

공의회의 심문과 재판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와서 그간 되어진 일에 대하여 보고하며, 어려움 가운데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기도를 드린다. 본문은 그 기도가 주된 내용이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매우 특별하게 해석한다. 아니, 아주 정당하게, 진리로 해석한다. 사도들의 해석이 맞다는 뜻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사도들은 기도 속에서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자가 사건이 메시아 대적 사건,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란 사건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위해서 시편의 말씀을 잠깐 들여다 보자. 시편 2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편 21-3).

 

사도들은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자가 사건을 해석한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집결하여, ‘기름 부름 받은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는 것이다. 시편 2편의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메시아 대적 사건,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란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대적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지 가운데 사람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들의 무지와 불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이다. 이것을 모르면, 기독교 신앙은 한낱 반역과 죽음의 잔치로 끝나고 만다.

 

사도들이 말하고 싶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진리의 메시지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재라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여셨다.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죄악과 폭력과 죽음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 용서와 화해와 구원과 생명을 감추어 놓으셨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악과 폭력과 죽음을 보느냐, 용서와 화해와 구원과 생명을 보느냐, 무엇을 보는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도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그들은 십자가 사건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재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담대하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폭력과 죽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폭력과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우리에게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신앙의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그들의 위협을 보고 주의 종들을 도와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소서. 주의 손을 펴서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해 병을 고치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소서”(29-30, 우리말성경). 이것은 단순히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종말론적 실재가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증언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을 이렇게 질문해 보면 좋겠다. 사도들은 기도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부활(십자가 사건)을 증언하는 데 큰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간구했을까? 그냥 말로 전하면 안 되나? 꼭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필요한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사도들이 기도를 통해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권위를 얻고, 사역을 수월하게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함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큰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이 필요한 이유는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실재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따라 논증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큰 능력과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적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도 십자가 사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바나바는 왜 그랬을까? 그는 왜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까? 단순히 사도들의 말씀에 은혜받아서가 아니다. 그의 행동은 심리적인 심경의 변화에서 온 게 아니다. 그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도들이 십자가 사건에서 본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재를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에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갔다.

 

십자가 사건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참 된 해방을 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다.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바나바의 자세한 심경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장면을 드라마로 만드는 작가는 반드시 바나바의 심경을 묘사해야 할 것이다. 바나바는 분명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밭(/재산/)으로 인해서 곤경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바나바를 그 탐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된 것이다. 더 이상 그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떤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따라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가 오늘 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는데, 우리의 감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감사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의 탐욕이 채워진 것에 대한 감사인가. 우리는 바나바처럼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 왔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