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4. 13:40

그리스도인의 표지 (signs of Christians)

(사도행전 2:42-47)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이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초대교회가 태동이 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태동되는 것이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다니는 신앙인들이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무엇이 나를 일반인들과 구별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무엇인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을 때, 성경은 초대교회의 처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ASB).

 

헬라어 성경은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 말로는 오로지힘쓰니라로 번역을 했고, 영어로는 ‘continually devoting’으로 번역했다.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끊임없이 헌신하다, 반복해서 계속하다의 뜻이다.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어떠한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들에 전념하고 있는 지, 아닌 지를 보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전념하는존재인가? 본문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사도들의 가르침 Apostles’ teaching (Bible study, Bible Reading)

2) 교제(나눔) fellowship

3) 만찬 breaking of bread (성만찬+성도들 간의 식사 교제(만찬하늘 잔치의 모형)

4) 기도 prayer (pray to God in the name of Jesus Christ)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면서 구약의 말씀을 면밀히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성경공부를 통해서 사도들의 가르침 배우기를 계속하여 전념하고 있다. 성경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시간이거나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해 주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둘째, 교제이다. 교제는 흔히 친교라고 부르는 것이고, 영어로 ‘fellowship’이라고 부른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라고 한다. 그런데, 교제(코이노니아)는 문자적으로 나눔(sharing)’을 뜻한다. 이것은 서로 주고받은 일, 서로 필요한 것들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물질 뿐 아니라 정서적 교감까지도 우리는 모두 나눌 수 있다.

 

본문에서 나눔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44-45). 매우 급진적인(radical) 본문이지만, 이 본문이 오용되기도 한다. 특별히, 이단들은 이 본문을 들어 교인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까지 벌인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마치 믿음을 가지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재산을 가지면 안 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 받기도 한다.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나눔이 무엇인지는 그 당시의 상황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각지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이었다.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유대인들을 맞아들였다. 그들이 예루살렘 주민이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었지만 환영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었고, 또는 유대인으로 개종을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연히 말하면, 여행객이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집을 개방하여 맞아주지 않으면 묵을 곳도 없고 밥 먹을 곳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는 순례객이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들의 미움을 받는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집으로 들여 재워주고 먹여주어야겠는가?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갈 곳이 없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하지만 이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된 그들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주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배척 받는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들였고, 거주 공간이 부족하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공간을 제공했고, 공적인 모임은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 같은 곳에서 가졌다.

 

예수 믿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일은 정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성을 상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도 그렇지 않겠는가? 먼 곳에서 여행을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잠 자리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내어주지 않겠는가? 그 수효가 너무 많아서 우리들 거처에 수용하지 못하면, 호텔방이라도 잡아주지 않겠는가? 재산과 소유는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아주 이성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합리적이다. 그 합리적인 나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지금 여기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슨 나눔을 실천해야 할까?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나눔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기의 손으로 수고하며, 자기의 소유를 들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나눔이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마음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믿음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 나눔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셋째는 만찬이다. 초대교회는 떡을 떼는 것에 전념했다. 이것은 성찬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성찬을 하지 않는다. 성찬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식사의 원형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찬 때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먹는 모든 식사를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만찬으로 생각한다. 형식상 일반 식사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먹는 모든 식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을 기억하는식사다.

 

이러한 식사를 종말론적인 식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는 의미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내가 먹는 식사가 이 세상의 마지막 식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식사를 허투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의 식사라는 의미다. 다른 말로 천국 잔치이다. 얼마나 기쁜 식사인가. 그리고 얼마나 복된 식사인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했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토록 화를 냈던 이유는 예수님이 거룩한 천국 잔치를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천국 잔치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말론적인 식사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식탁 교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고 거룩하겠는가. 이 식탁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식탁 기도) 이러한 기도가 저절로 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성만찬을 시행하기를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식사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마지막으로, 기도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기도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있는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왜 이렇게 쉬지 말고 기도해야하는가?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그리스도인이다. 그 뜻 가운데 하나가, ‘쉬지 말고 기도하기이다. 우리는 그 뜻대로 살고 있는가?

 

기도에 관해서라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다. 우리는 누구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매일같이, 쉬지 않고, 기도 드리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기도하고 있는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필요할 때, 생각날 때, 시간 날 때 하는 게 아니라, 기도에 끊임없이 전념하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proskartereo)’. ‘끊임없이 헌신하다/전념하다라는 뜻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러한 열정이 생긴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열정이 생기고, 나눔에 열정이 생기고, 떡을 떼는 일에 열정이 생기고, 기도에 열정이 생긴다. 다른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열정이 세상을 바꾼다. 이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당신,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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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