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21. 06:44

열망과 절망

(욥기 23:1-14)


수능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길 기도한다. 고등학교 입시 시험 때, 시험 당일 아침 내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나랑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덕에, 우리 아버지한테 기도 받고 가서, 답안지 밀려 썼는데, 오히려 시험을 더 잘 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기도 받는데 엄청 신비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엄청 고마워하고, 좋아했다.

 

종교적 체험은 참 신비할 때가 있다. 페북에 딸이 수능을 보는 것에 대한 글을 올린 친구가 있어, 이렇게 복을 빌어줬다. “찍은 거 다 맞아랏!” 모두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소망한다. 언제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없어질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 지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 그 지옥이 없어질 텐데, ‘자기의 노력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지옥을 삶으로 들이는 것 같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욥은 처절한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다. 부인만 빼고, 삶의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부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욥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보면, 욥은 다시 회복하여 자식을 낳아 더 큰 복을 누리며 살았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애굽 왕이 모자란 것은 유대 민족의 부흥을 걱정했다면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하면 안 되고, 여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했어야 한다. 한국이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이번에 수능시험 치르는 학생이 55만명 정도 되는데, 이 중에 고3 재학생은 40만명 정도다. 정확히는 39424명이다. 역대 가장 적은 수험생이다. 이러한 인구절벽을 극복하려면, 여성에 대한 정책과 복지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은 모든 생명의 희망이다.

 

욥기는 장대한 지혜문학이다. 구약성경 중 가장 심오한 철학과 신학을 담고 있다. 구성도 드라마틱하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소발, 빌닷은 그 당시(지금도 여전히 우세한 생각이지만) 만연했던 사상을 대표한다. 그 사상은 보상교리이다. ‘라고 하는 요소를 통해서 인간론을 생각하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들은 모두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대조적인 사고를 지닌 문명은 헬라문명이다. 그리스/로마신화를 통해서 보듯이, 인간과 신은 한 데 어우러져 세상의 악을 구성하고, 악과 맞서 싸운다. ‘라고 하는 개념이 인간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운명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운명을 극복하고 신적인 경지에 오른 사람을 영웅이라고 한다. 지금도,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과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은 지구인들의 사고방식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보상교리는 매우 실존적인 고민이다. 욥의 재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욥의 세 친구(엘리바스, 소발, 빌닷)는 욥을 정죄한다. 니가 이렇게 고통에 처하게 된 것은 너가 의롭지 못하고, 너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런 와중에 나오는 말씀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말씀이다. 빌닷이 욥을 정죄하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싶어한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내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아 의인이 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심히 창대해 질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실제의 삶 속에서는 회개를 통한, 의로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죄 용서함을 받고, 심히 창대해지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인가? 이러한 신앙의 갈등, 아이러니, 역설 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정죄 당하는 아픔, 밀려오는 죄책, 흔들리는 믿음, 이러한 삶의 요소들이 우리를 사납게 흔들어 댄다.

 

욥은 보상교리에 온 몸을 다해 저항한다. 욥의 세 친구는 보상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욥을 온 몸 다해 정죄한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본문은 열망과 절망을 담고 있다.

 

욥은 절망 속에 있다. 세 친구들에게 사납게 당하고 있는 정죄가 절망이다. 사람은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죽는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상대방을 가리키는가. 그 행위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인지 모르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너무도 쉽게 한다.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질이 아니라, 따스한 마음이다. 내가 손가락질 하지 않아도, 죄는 그 속성상 심판을 이미 담고 있다.

 

욥은 죄가 없다. 손가락질 당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는 지금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절망이다. 그런데, 그는 절망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절망 속에서 열망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대화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가 하나님을 움직여 복과 저주를 내리게 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욥은 하나님의 자유/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절망 가운데 있는 욥의 열망이다.

 

욥의 처절한 열망은 이 구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12). 우리는 보통 말씀이 밥 먹여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죽을 처지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내 앞에 밥과 말씀이 있다. 무엇을 먹겠는가? 밥을 먹겠는가? 말씀을 먹겠는가?

 

엘리야의 이야기가 오버랩 된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모두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살리기 위하여 보낸 곳이 사르밧 과부의 집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과 더불어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한 끼 밥을 해 먹고 굶어 죽을 작정이었다. 그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도착하여, 그들이 먹고 죽으려 했던 음식을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의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양식을 택하지, 말씀을 택하지 않는다. 만약 사르밧 과부가 말씀을 택하지 않고 양식을 택했다면, 그와 그의 아들은 한 끼 음식을 먹고 죽었겠지만, 사르밧 과부는 말씀을 택함으로, 그 어려운 가뭄의 때에 구원을 경험한다. 매우 도전적인 놀라운 말씀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양식과 말씀 중, 무엇이 더 귀한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 즉 진리를 아는 사람은 욥의 고백처럼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여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진리의 경지, 신앙의 경지에 오르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신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유를 줄까?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하는 열망 가운데 있는 욥에게는 또다른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은 바로, 욥의 그러한 열망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숨어 계신하나님 때문에 발생한다. 그 절망은 이 구절에 담겼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뵐올 수 없구나”(8-9).

 

욥에게는 꽉 막힌 절망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절망이 욥의 열망을 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열망은 희망으로 피어나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He knows the way I take, when He has tried me, I shall come forth as gold.”

 

욥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열망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저런 절망이 너무 많다. 그 절망을 우리가 일일이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절망 투성이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절망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겐 욥과 같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겠다는 그 열망! 말씀이 정말 밥 먹여 준다! 그 열망이 우리에게 있는 한, 절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 우리를 단련하소서. 우리가 정금같이 나오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