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31. 07:12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편 142:1-7)

 

한국교회가 실패하고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이유는 만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신앙이다. 그런데, 어느덧 한국교회의 신앙은 (말씀)’말 있고 육신이 없어졌다. 형체가 없는 말은 유령일 뿐이다. 형체가 없으니, 거룩한 것 같고 신령한 것 같으나, 결국 그 실체가 없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실체를 만들어 퍼뜨린다. 말만 난립하고 있다.

 

복음은 성육신을 말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의 삶은 탈육신을 지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일상의 언어를 요구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은 자신들만의 은어를 사용한다. 은어를 아는 사람들끼리는 좋고, 은어를 알아들으니까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지는 몰라도, 결국 이것은 성육신이 되지 못하고 탈육신이 된 유령의 복음을 생산하고 만다.

 

본문은 마스길이다. 잘 구성된 지혜의 시라는 뜻이다. 이 시는 기도이다. 전형적인 탄식의 기도이다. 다윗을 내세워, 기도를 구체화시킨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라고 구체화시킨다. 이렇게 구체화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시켜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 기도를 구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기도한다. 2절에서 토로라는 단어를 쓰는데영어로는 ‘pour out’이라는 단어를 쓰고, 구약성경적 의미는 전제를 말한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 기도를 하는데, 마치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기도자의 기도는 그냥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배의 의미를 담은 기도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이렇게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을 때,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예배가 된다는 것을 알면 좋다.

 

기도자의 절망은 매우 깊다. 3절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했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아타프를 번역한 것인데, ‘아타프약해지다, 사라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도자는 그의 영, 즉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용기, 열정 등이 약해져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것만큼 절망이 없다. 사람은 몸이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마음이 힘들어서 죽는다. 용기와 열정이 사라지면, 사람은 급격하게 약해진다.

 

기도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자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돌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오른쪽은 법정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변론하시기 위해서 서시는 자리이다. 가난한 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도울 힘도 없고, 도움을 청할 여력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냥 억울하게 죽고 만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기를 싫어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기도자는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세 가지의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호소한다. 첫째, 아무도 기도자를 아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카르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의 뜻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하고 간구한다.

 

둘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피난처가 없다. 아무도 피난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적들이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아무도 숨겨주는 이가 없다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셋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돌봄이 없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매우 적막한 인생이다. 외로움에 죽을 것 같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도자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분깃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분깃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땅 분배를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분깃은 분배받은 땅이라는 뜻이다. 분배받은 땅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모른다. 그러나,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하나님께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지, 하나님 자체가 분깃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분깃을 차지하려고 혈안인 전쟁터 같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다. 분깃을 차지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가.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때, 자신이 괴물 같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라는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정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기도자는 탄식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깃이 되어 주셔서, 생명을 보존해 주실 것을 믿는다. 기도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벌이는 분깃 전쟁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셔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 돌려야 한다. 기도자가 탄식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외롭고 쓸쓸하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오클랜드 주유소 정차 중 만난 흑인 아저씨 이야기 다짜고짜 차를 닦아준 이야기 무슨 대가를 바라면서 한 건 아니지만, 끼니를 얻어보고자 한 최선의 행위 그래서 돈을 약간 건네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이 임한 성육신의 몸이 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구성원들끼리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서로 지켜보아야 한다.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한다. 서로 돌봐 주어야 한다.

 

기도자가 고백하는 마지막 기도가 마음에 다가온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절). 의인들이 누구인가?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고 돌봐 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전혀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생긴 것 자체가 구원 아니겠는가. 의인은 쉬운 말로 하면, 좋은 사람들이다. 좋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 그것만큼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언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삶에, 나를 둘러주는 좋은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든든한 언덕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줄 때, 우리의 삶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지 않겠는가. 말만 하지 말고,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삶,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사람이 되어 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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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