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2. 02:18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행전 2:22~41)

 

요즘은 카카오톡 안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맹률이 낮고, 스마트폰(컴퓨터) 보급률이 높기 때문이다. 문자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근본적으로 이러한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자만큼 소통하기에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런데, 문자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아낼 수 있지는 못하다. 그게 문자의 한계다. 가령, 카톡을 할 때 문자로 미묘하고 깊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 담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이모티콘이다. 이모티콘은 문자의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끔 도와준다.

 

문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때, 이모티콘을 적극 활용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문자는 보낸 이의 감정보다는 받는 이의 감정이 더 쉽게 개입되기 때문이다. 문자 소통 방법은 문자를 보낸 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받는 이의 감정에 따라 문자가 해석될 여지가 너무 높다. 그래서 보내는 이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모티콘을 활용하면 좋다. 그래야 문자 소통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며 소통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성경은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성경 문자에 이모티콘이 들어가 있어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직후 그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의 거류민들(유대인들)이 한 말을 적은 우리가 어찌할꼬의 문자에서 우리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는가? ‘뭐 어쩌라고?’의 감정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느껴지는가? 아니면, 급박함이 느껴지는가? 문자 소통은 화자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해석될 여지가 너무 많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상상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구성한다. 인간이 지금 이렇게 동물과 차원이 다른 문명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때문이다. 그 가장 큰 두 가지의 예가 국가와 돈에 대한 상상력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국가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와 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개념적인, 상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국가를 실재처럼 상상하고, 돈을 실재처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를 이루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 굉장히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본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들이라고 상상하며 말씀을 들어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상상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증언(설교)을 듣고 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입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동일하게 나올 것이다. 왜 그런가?

 

본문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행한 증언(설교)이다. (설교는 태생적으로 증언이다.) 예루살렘의 주민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그리스도인)’에게 발생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현상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 어찌된 일이냐?”(2:12). 이에 대해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서서 이 일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 앞에서 증언(설교)을 한다.

 

베드로가 증언(설교)을 위하여 인용하는 성경은 요엘서이다. 요엘서는 말세(종말)’에 대한 예언을 다루는 선지서이다. 요엘 선지자는 종말에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고, 하늘과 땅에 어떠한 기사와 징조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참된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의 증언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사건은 종말의 시간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깨달음이고 생각의 전환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줄 알았는데 거꾸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혁명)’이라고 부른다. 베드로는 지금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의 사건은 시간의 질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종말이 이 시간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그냥 시간을 살지 않고, 종말의 시간을 산다.

 

종말의 시간이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 새 창조의 시간이다. (종말은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심판은 존재를 새롭게 하기 위한 과정이지, 존재를 괴롭히는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활은 하나님이 전 우주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망을 무력화시킨 사건이다. 더불어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

 

베드로는 이 일을 다윗이 예언자로서 증언했다고 논증한다. 그 논증을 위해 쓰인 말씀은 시편 16편의 말씀이다.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16편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하게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9-10)라고 한다. 베드로는 이 부분이 다윗의 예언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지만, 그의 고백대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다윗은 죽지 않아야 한다. 다윗은 죽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이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자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거룩한 자당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자(하씨드카)’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서 은총은 문맥상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을 분리해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지금 증언한다. 하나님께 그 은총을 받은 자, 주의 거룩한 자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증언(설교)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밝힌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둘째, 부활을 통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 지금 오순절 아침에 여러분이 본 사건(광경),은 하나님이 여러분이 십자가에 위에서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자신의 우편에 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성령을 받아, 모든 육체, 모든 만민에게 부어주셨다!” 이게 바로 요엘서와 시편에 예언된 것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및 그의 주 되심의 사건에 대한 증거이다.

 

,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처음 시작할 때, 주문했다. 자신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이라고 상상해 보라고. 그러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의했던, 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던 청중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들이 주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그들은 큰 일 난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태복음 21:33-40)와 같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1-16)과 헷갈려서는 안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설명하신 것이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유대 지도자들과의 권위 논쟁을 할 때 하신 비유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우선시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행한 일이 어떤 일인지 낱낱이 드러난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들을 농부들에게 주고 떠났다. 시간이 지나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 열매를 얻으려고 사람을 보냈다. 처음에는 종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종을 잡아 죽였다. 그렇게 몇 번을 주인은 종들을 보내 포도 열매를 얻으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다 죽인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고 말한 뒤, 주인의 아들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여버린다. 이 이야기를 마치며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이고, 마침내 주인이 포도원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뭐 어쩌라고고 다가오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다가오는가? 아니면, ‘아 큰 일 났구나.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망했구나.’라는 탄식이 섞인 급박함으로 다가오는가? 이러한 급박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사건이 여전히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건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차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급박하여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38). 이것은 대단한 역전이다. 무지 가운데서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자신들이 죽인 바로 그 예수가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사건을 소상히 보면서 우리에게도 무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의 급박한 질문을 던졌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그 증언을 동일하게 전하는 설교자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어찌할꼬?”의 긴박한 마음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려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은 자 답게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라. 죽음이 두려워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죽음이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삶을 살라. 그러다 죽어도 괜찮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활하게 될 테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난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다. 이렇게 멋진 삶을 살게 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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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