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17. 09:04

잃은 양의 시편

(시편 119:105-112) 

 

제목을 정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원래 119편은 토라시로 불린다. 그런데, 내가 119편을 잃은 양의 시편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마지막 절 때문이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19176). 무리를 떠나 길을 잃은 양이 길을 찾아 무리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애타는 심정이었겠는가. ‘살려달라고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큰 소리로 구원을 호소했을 것이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선 부모와 무리의 심정을 어떠했겠는가? 동일한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큰 소리를 구원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을 간구하는 잃은 양이다.

 

시편 119편은 가장 긴 시편이면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다. 일명 토라 시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총 22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토라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함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편 119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119편은 크게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단락(1-24)복 있는 자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다. 첫 단락에서 시인은 묻는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우리 인생은 모두 행복을 찾아 나선 방랑자와 같다. 각자 나름대로 삶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 누리며 산다. 그런데 시인은 이 노래를 통하여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를 알려준다. 사실, 이것은 비밀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귀 기울일 만하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정작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혜의 비밀을 알려준다.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주의 말씀을 사모하라!” 시편 1편도 같은 말을 한다. “복 있는 사람은(행복한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이것을 우리는 얼마나 실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생활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지만,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사는가? 세상은 물질에 압도되어물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가르친다. 전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물질을 많이 가지게 된 것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이 갑자기 무너진다. 이런 빈곤한 인생이 없다. 물질은 신기루와 같아서 마치 우리가 행복한 것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에 취해 살다가 어느 순간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게 현대인들의 불행이다.

 

모두 다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행복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나의 인생은 왜 이럴까, 한탄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우리의 자식들에게 비밀의 지혜를 가르치자.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주야로 묵상해 보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신비하게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자녀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두번째 단락(25-48)말씀이 가리키는 길에 대한 노래가 담겨 있다. 우리는 지금 길을 걷고 있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좋은 메타포이다. 그런데, 이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줄지 몰라 우리는 날마다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이라는 길을 걸으면,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번째 단락(49-88)기억하고 지켜야 할 말씀에 대하여 노래한다. 시인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쓴다(49, 52, 55).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 말씀을 기억해 두면, 고난과 시련의 시간에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면 죽는다. 실패한다.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기억하면 산다. 성공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현대인들이 기억력은 스마트하지 않다. 기계에 의존하게 된 포스트 휴먼(Post-human)은 생명을 얻고 있는가, 잃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전화번호를 기억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다 돼서 스마트폰을 켤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가? 구글 맵이 없으면 길을 모르는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암송의 전통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려 하지 않는다. 키워드만 넣으면 어렵지 않게 스마트 폰을 통해서 원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기억인가?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기계에 맡겨 놓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가? 기억을 맡겼다는 것은 생명을 맡겼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정말 생명이 있는 존재인가?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되다. 그러나 기억된 순간 우리는 그 기억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생명을 살리겠다는 교회가 가장 중요한 생명 살리는 일을 안 하면 모순인 것이다. 한 구절만이라도 외워보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을 쏟아보자. 우리가 말씀을 붙들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정말 그렇다. 그 경험을 하고 나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구원의 밧줄인지 깨닫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네번째 단락(89-144)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노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값지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신을 노인보다 지혜롭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금보다 값지다고 노래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길을 비추시는 빛이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깜깜한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한다. 위험에 처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기에 우리의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락(145-176)말씀과 기도에 대하여 노래한다. , 의인의 삶에 대하여 노래한다. 말씀과 기도는 의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단락 중에 있는 이 말씀이 눈에 들어 온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니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7-148). 의인은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묵상한 말씀에 근거해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주저리는 기도는 의인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다. 의인은 말씀에 기대어 기도한다. 말씀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말씀 없이 기도할 수 없다. 말씀을 사모하여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게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말씀은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기도를 불러온다. 기도가 안 나오고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말주변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지 않아서 그렇다.

 

시편 119편은 지루하게 긴 시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귀하고 값진 것이라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절절하여 그 절절한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느라 길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말씀의 귀함을 어떻게 다 담아내겠는가. 그 간절한 마음이 마지막 176절에 담겨 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잃은 양이라고 말한다. 서두에 밝혔듯이, 자기 자신을 잃은 양으로 생각하여 구원을 갈망하며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잃은 양을 찾으시는 구원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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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