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10. 08:03

토브와 헤쎄드

(시편 118:1-9)

 

시편 118편은 제의 시편으로 분류된다. ,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던 시편이라는 뜻이다. 제의 시편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고, 서로 주고 받는 교독의 형식이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다. 두 무리가 서로 마주 보고 서로 주고 받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서, 제의를 이끄는 제사장이 1절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한 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이라고 선창하면, 제사장 무리들을 뒤따르는 모든 회중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후창한다. ,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 제사장 무리들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한다.

 

이들은 왜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일까? 이들의 감사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토브와 헤쎄드이다. 토브는 선하다는 뜻이고, 헤쎄드는 인자하다라는 뜻이다. 선함과 인자함(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원칙이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며 산다.

 

5~9절은 인도자의 독창이다. 인도자의 고백은 개인의 고백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인도자가 독창을 하고 있지만, 이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대신한 고백이기도 하다. 예배는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의 모임이다.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이 모였을 때 예배는 더 깊은 감사와 찬양이 넘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연대성이 묻어난다. 그것만큼 공동체를 끈끈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5절의 말씀이 인상적이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5). 우리말 번역에는 히브리어의 문학적 기교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반의적 평행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다. 우리말로 고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메차르비좁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 뜻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내가 비좁은 곳(메차르)에서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메르하브)에 세우셨도다이다.

 

이 구절을 현대인들의 심상으로 읽으면 탐욕스럽게 변한다. 요즘 현대인들은 비좁은 곳’, ‘넓은 곳’, 이러한 심상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비좁은 평수의 집, 넓은 평수의 집, 또는 작은 차, 큰 차,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위의 구절을 이렇게 오해한다. “내가 좁은 평수에 사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셔서 큰 집으로 이사하게 하셨다!” 성경을 자기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데 쓰는, 명백한 오용이다.

 

이 구절은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의 심상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유목민들에게 넓은 곳은 소와 양을 먹일 수 있는 목초지의 심상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은 오히려 시편 23편의 구절이 떠올라야 한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넓은 곳이라는 뜻은 매우 긍정적인 심상이다. 이것은 절대 탐욕의 표출이 아니다.

 

이 심상을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이야기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살아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키우는 양떼와 소떼의 수가 많아지게 하셨다. 그때 발생한 문제는 좁은 목초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 더 넓은 곳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넓은 곳으로 간다는 의미는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생명이요 축복의 의미였다. ‘넓은 곳의 심상은 그들에게 구원을 의미하기에 좋은 심상이다.

 

또한, 6절과 7절에서 조심해서 해석해야 할 구절이 등장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이기심의 고백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다.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고백하며, 여호와는 언제나 나의 편에 계시다는 신뢰의 고백이다. 이러한 내 편의 신앙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 가운데서도 예수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이게 바로 여호와는 내편이라고 하는 신뢰의 고백이 담고 있는 뜻이다.

 

7절 말씀은 짧지만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독창자는 내 편이 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원수들이 지켜보고 있다. 고통을 당하는 자의 고통은 자신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웃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함께 예배 드리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사랑, 헤쎄드)을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사랑)은 나에게 전해지지만, 나를 통해서 고통 당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공동체는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를 구현하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7절의 짧은 말씀 안에는 반전이 담겨 있다. 7절의 앞 문장은 원수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나와 이웃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 원수들이 고통 당하는 우리들을 지켜보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면, 7절의 뒷 문장은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로 인하여 상황이 역전된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들이 보응(고통) 당한 원수들을 지켜보게 된다는 것이다. 시선의 역전이 이루어졌다.

 

8절과 9절을 통해서 독창자는 이러한 구원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온전히 하나님께 돌린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고관을 의지하는 자는 이러한 구원의 역전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나 고관은 토브와 헤쎄드가 영원하지 않거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이러한 구원의 역전을 창조해 내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 예배 공동체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고관을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편 되심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옮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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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