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30. 13:23

성령과 방언

(사도행전 2:1-13)

 

본문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성령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다. 기독교 역사/신학에서 성령론이 자리잡은 것은 성령강림절 후 3,4백년이 지나서이다. 특별히 329년에 태어나서 390년에 죽은, 갑바도기아의 교부 중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에 의해서 기독교의 성령론은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성령론을 영어로 ‘pneumatology’라고 한다.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령론은 성령이란 무엇인지’, 성령의 본성에 대하여 논하는 분야이다. 성령론의 발전은 기독론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고, 성령론의 발전과 함께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발전된다. ,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person)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정말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성령을 어떤 귀신이나, 또는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 같은 존재로 취급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알 수 없듯이,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본문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묘사할 때 모두 비유를 들어서 설명할 뿐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이라든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등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령의 임재를 묘사하는 낱말 중, 가장 중요한 낱말은 홀연히(아프노)’이다. 홀연히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아프노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우리가 임하라고 해서 임하는 분이 아니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는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난다. 램프의 주인인 알라딘이 소환하면 지니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이여 임하소서!’라고 주문을 건다고 성령이 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성령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다.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홀연히임한다.

 

홀연히라는 말은 우리의 신앙에 두 가지 큰 의미를 준다.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홀연히의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홀연히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자칫 잘못하다간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실망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실 때, 우리는 낙심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한다. 그런데, ‘홀연히의 믿음의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낙심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처럼 ~’하고 나타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의무가 하나님에게 전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홀연히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홀연히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더 이상 안 된다고 할 때, 더 이상 소망을 갖지 못할 때,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홀연히나타나셔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신다. 이러한 홀연히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섣부르게 낙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홀연히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홀연히 나타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홀연히의 믿음을 너무 좋아한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소란을 떠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잠잠한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을 돌보신다. 지금 이곳에서도 그러한 홀연히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지만, 좀 더 세월이 지나서 그 은혜를 나누기로 하고, 한 가지, 조지아에서 경험한 홀연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교회 건축할 때, 기도 의자를 만들면,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기도하는 시간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내가 1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은 1시간 일하실 것이고, 내가 10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은 10시간 일하실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만큼 일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상관 없이 일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홀연한 역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땅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다.

 

기도 의자를 만들고, 그 기도 의자를 의지하여 교회 건축을 위해 2년을 기도했다. 부족한 게 많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기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 의자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를 시작하면, 대개 2시간 정도 기도를 했다. 그렇게 2년을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다. 마음에 약간 낙심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 넋두리를 했다. “주님, 이렇게 응답을 안 주십니까? 낙심되지만, 주님께서 더 기도하라고 하시는 줄로 믿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하박국의 말씀을 묵상했다.

 

그런데, 하박국 23절의 말씀을 읽는 중이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성경에서 매직 아이처럼 한 건물이 떠올랐다. 그래서 수련목 전도사님에게 차를 대라고 하여 그 매직 아이처럼 떠오른 건물이 있는 곳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 건물과 부지가 For Sale로 나와 있었다. 간판에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 곧바로 전화를 했는데, 가격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면서 교회 건축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는데, 정말 홀연히임한 하나님의 은혜였고,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다른 일들은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나누겠다.)

 

우리가 홀연히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또한 걱정 근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홀연히역사하실 것이다. 이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의 입술에는 감사와 찬송, 그리고 간증이 늘어간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그리고 누군가 들었을 때에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홀연히 임한 성령이 제자들에게 건네 준 것은 방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이지, 방언이 곧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방언이 엉뚱한 증명서가 된다. 방언을 하면 마치 성령을 받은 것처럼, 방언을 하지 못하면 마치 성령을 받지 못한 새내기 신앙인처럼 취급하는 데 잘못 쓰인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의심을 갖는다. “목사님, 저는 방언을 못합니다. 방언을 하고 싶은데, 방언이 나오질 않습니다. 저는 성령을 받지 못한,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이것은 방언만이 성령의 역사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과 방언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 물론 성령께서는 방언이 필요한 이들에게 방언을 주시지만, 방언이 곧 성령의 임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접하면서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왜 방언을 했을까?”

 

방언은 자기 자랑의 도구가 아니다. 방언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방언하는 사람이, ‘나 성령 받았나봐. 나 신앙이 좋은가봐하면서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신앙인처럼 생각한다면, 오히려 방언을 받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다. 본문에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된 이유는 11절에 나와 있다. 열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인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자기들끼리 한 말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내린 이유는 오순절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열방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울리는 꾕과리와 같은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불경한 생각을 한다. ‘성령이 계시다면, 나에게 임하셔서 내가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한 번 해 보세요!’ 방언은 내 의심을 종식시키는 도구이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가 아니다. 방언은 오직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다.

 

처음, 제자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그들이 성령을 통해 받은 은사는 방언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제자들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우리가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방언을 받게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필요하다면 방언을 받겠지만, 아마도 방언보다는 다른 은사를 주어서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게 하실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이미 구글통역기가 받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령은 홀연히 임하신다. 그리니,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달라고 자해수준으로떼쓰지 말라. 잔잔하고 묵묵히, 성실하게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령은 홀연히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묵묵히 성실하게 맡은 바 사명을 다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실 지 모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고자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령은 때와 상황에 맞게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은 은사를 주어,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열방에 증언하도록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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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