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8. 02:22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

(사도행전 2:14-21)


오순절에 발생한 일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있었다. 한 부류는 그 일을 보고 놀라서 당황했고(amazement and great perplexity), 다른 부류는 그들이 술에 취했다며”, 조롱했다.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대개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본문은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 서서 이 일이 어떠한 일인지에 대한 증언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사람들 앞에 서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베드로는 그들이 조롱하고 있듯이, 이 일은 술 취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 근거는 시간이었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 3+6하면, 오전 9시가 된다. 물론 아침부터 해장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침부터 집단적으로 술을 마시는 일은 그 당시의 문화 뿐만 아니라 지금의 문화에서도 없는 일이다. 술 취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니 베드로는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말한다.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인 요엘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가 요엘서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것은 술 취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베드로와 열 한 사도는 어떻게 이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이다.  유대인들이 보는 구약성경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인들에게는 ‘Hebrew Bible’이라고 불리고, 그들은 히브리어로 그것을 타나크(Torah, Nebiim, Ketuvim)’라고 한다. 모세오경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이 일에 대하여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성경공부를 진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물론 명시적으로 제자들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더라같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바돌로매)의 일화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이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 사건에 휘말리고 나서, 제자들은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이게 뭐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들은 성경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베드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자기의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영적분별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리고,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발생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예언의 성취였던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들어면서, ‘, 지금 목사님이 성경공부 하자고, 성경공부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여러분의 자유를 존중한다.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의 자유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공부에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어떻게 자신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예언의 성취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예수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유익을 준다. 아주 실질적인 유익이다. 첫째,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둘째,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성경을 깊이 알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내가 몇 번 증언했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귀담아들으시고, 그것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실천하시는지 모르겠다. 내가 조지아에서 이곳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첫째, 사도행전 169절의 말씀 때문이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씀 때문에 나의 삶, 우리 가정의 삶이 바뀌었다. 그리고, 두번째, 우리교회와 연결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은 에스겔 166절의 말씀이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이다. 이 말씀을 듣고, ‘, 이 교회가 힘들구나. 그러나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왔다. 이 말씀 때문에, 나는 이곳에 왔고, 여기서 아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

 

성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베드로가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는 증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삶은 의미로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사도행전의 말씀을 몰랐고, 에스겔의 말씀을 몰랐다면,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예언의 성취’,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아직도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한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찬송가 347 1).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다. 힘들고 어려운 게 참 많다. 그런데, 나는 참 행복하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어, 나의 마음은 늘 뿌듯하고 평안하다. 마음이 낙심되지 않고, 희망이 넘친다. 왜 그럴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삶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삶을 바꾼다. 내 인생에 벌어지는 그 수많은 사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 사건들 속에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삶 자체의 질이 다르다.

 

이것은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야”,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의 사건이 있는가?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인지 아닌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것을 알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바꾸고, 질이 다른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성경공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까지 증언했는데도 성경공부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 분까지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고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바라며, 불철주야 여러분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며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이 부족한 종의 이 절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껴지시는 분은, 마음을 돌이켜 발걸음을 돌려보시라. 성경공부는 교회의 이벤트/행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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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