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11. 03:16

미니스트리

(출애굽기 32:30-34)

 

오경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발견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니스트리이다. ‘Ministry’, 우리는 이것을 사역이라고 부른다. 사역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역교회의 일로 여겨진다. 교회에서 하는 일을 우리는 보통 사역이라고 부른다.

 

우리도 사역을 한다. 작년, 2020년도를 준비하며, 우리는 5가지의 핵심 사역에 대하여 논의했다. 우리교회의 5가지 핵심 사역은 다음과 같다.

 

1) 주일예배 (찬양예배+온가족성찬예배)

2) 소그룹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3) 교육/훈련 (세화성서아카데미)

4) 에클레시아 사역 (2021년 론칭 목표)

5) 차세대 (청년/청소년/아동부)

 

이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주일예배에 집중하고, 차세대 사역(특별히 청년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수요예배를 청년예배로 전환하는 방안과 수요일, 또는 목요일에 청년사역(청년예배/친교를 돕는 일)을 하고, 어른들이 청년들을 돕는 사역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것을 내리사랑 사역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어른들이 청년들을 돕고, 청년들이 청소년을 돕고, 청소년은 어린이를 돕는 사역의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주중/주말, 소그룹 모임 활성화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소그룹 모임의 활성화를 위하여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속회라는 이름을 좀 더 부드럽고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이름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누었다. 무엇이든지, 제도적 용어에서 선교적 용어로의 전환의 필요성과 중요성도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교회의 이러한 사역 방침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난 3년간 여러분과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가며, 많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사역의 방향이다. 교회의 사역을 이러한 방향으로 정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시대와 우리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의 요청이다.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요청은 선교적 교회로 거듭나기 Born again as a Missional Church’이다.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키워드는 단순함과 집중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신 아래, 교회의 사역을 단순하게 만들고, 집중력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의 정신이 곧 우리의 정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한다!”

 

시적인 표현을 쓰자면, ‘사역이 우리에게 왔다.’ 사역은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사역은 오는 것이고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한다. 사역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어느날 우리는 하나님이 사역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사역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오경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사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오경의 내러티브를 읽어나가면서 매우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한다.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추방 사건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의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다 갑자기 3장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선하고 아름다운 동산,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오경의 내러티브 맥락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을 보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아담(잇쉬)은 하와(잇샤)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수 없었을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은 하와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잇샤', 즉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고 들었을 때, 아담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나? 우리가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목격하는 아담(잇쉬)의 반응은 하와(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짓는 모습이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아담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담은 하와의 죄를 목격했을 때, 동일하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속물로 내어 놓고, '속죄(atonement)'할 수 없었을까?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보는 아담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속죄를 하지 못하고, '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경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다 보면,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아담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은 하나님의 집, 즉 에덴동산에 오른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성경공부를 하신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이해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세화성서아카데미를 통한 교육/훈련은 우리교회의 핵심 사역 중 하나이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의 심층적인 깊이로 들어가게 도와드리는 성경공부에 꼭 참여하시라. 시간이 맞지 않아 못 참석하시면, 동영상 시청을 꼭 하시라. 힘들게 촬영해서 업로드 해드리는 이유다. 이 사역을 위해 힘쓰는 미디어팀의 헌신을 잊지 마시라.)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오른다. 그곳은 에덴동산이고, 성막의 지성소이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바람에 인간들이 에덴동산 바깥에서 유랑하며 죽음의 영역에서 살았는데, 인류는 비로소 출애굽사건을 통해, 시내산에 올라(에덴동산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에덴동산인 시내산 꼭대기에서 새로운 아담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이에, 산기슭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줄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신들을 인도해낸 이라고 선포하며 축제를 벌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출애굽하여 겨우겨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될 기회를 얻는 이스라엘은 또다른 추방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에 처해질 것인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구원 받을 것인가)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것은 바로 모세의 미니스트리(사역)’ 덕분이었다. 죽음에 처하게 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30).

 

속죄(atonement)’는 오경의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오경의 문학구조 내에서, 오경의 중심은 레위기 16장에 있다.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에 대한 내러티브가 나오는 것으로, 오경의 내러티브는 레위기 16장의 속죄를 수렴했다 발산한다. ‘속죄는 죄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기는 속량이고, 죄의 영역에서 더렵혀진 것을 깨끗케 하는 정결이다. 그리고 속죄는 그리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는 다시 시내산 정상에 올라, 즉 에덴동산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한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상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1-32).

 

여기서 우리는 미니스트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모세에게서 아담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위대한 미니스트리를 발견한다. 아담은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와를 위하여 속죄하지 못했다. , 아담은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인 하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지 못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위하여 모세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속죄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다.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일명, '아담신학'은 그렇게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다( 5). 첫째 아담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는 속죄에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아, 속죄에 성공한다.

 

요한복음도 '아담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동산(에덴동산의 메타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찾아온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19:41, 20:15). 예수님은 동산지기, 즉 아담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경의 내러티브의 중심은 레위기 16, '속죄'이다. 오경의 모든 이야기는 '속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속죄에 성공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생명을 얻지만, 속죄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니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중재요 속죄다. 미니스트리 없이 하나님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하면 하나님의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미니스트리는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가 미니스트리를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나느냐,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고 죽게 되느냐가 결정된다. , 미니스트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 즉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주신 미니스트리를 생각하며,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를 묵상해 보면 좋겠다.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이 속죄가 되는 것일까?(생명을 창조해 낼 것인가?) 이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영원한 대속물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미니스트리를 믿음으로 감당해 나가자. 그러면, 우리의 삶과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 생명이 풍성하게 넘치게 될 줄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