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2. 07:38

영적 전쟁

(에베소서 6:10-18) 

 

(spiritual)’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뭔가 거룩해지는 것 같긴 한데, 그와 동시에 뭔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전쟁은 무엇을 뜻하는 지 알겠는데, ‘영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영적 전쟁은 갑자기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해진다. ‘영적 전쟁’, 뭔가 거룩한 전쟁인 것 같은데, 어떠한 전쟁인지 손에 잘 안 잡힌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수도 없이 영적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는 주님의 군사라는 말은 듣는데, 사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면 뭔가 거룩해 보이는 것 같지만, 영적이라는 말을 통해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요즘 한국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어느 대형교회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서 영적 미세먼지로부터 보호해주는 특새 마스크를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특새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뭔가 거룩해 보이긴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호하다. 서울에 미세먼지가 많은 것은 알겠는데, 영적 미세먼지는 무엇이며, 그 영적 미세먼지는 영적 마스크를 쓰면 물리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이처럼, ‘영적이라는 말은 참으로 무엇이든지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다. 본문은 영적 전쟁을 벌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으로 알려져 있다. 겉으로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손에 잘 안 잡히는 말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2절 말씀이 가장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의 씨름(전쟁)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어렴풋이, 우리의 씨름(전쟁)은 뭔가 영적인 세력들과 하는 것이구나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영적인 세력들은 통치자들, 권세자들이기 때문에 이 센 것 같다. 그래서 그들과 싸워 이기려면 우리에게도 그에 필적할 만한, 아니 그를 능가할 만한 힘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는 것 같다.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에서 보듯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힘이 우리에게 전가되고 부어졌을 때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고 말한다. 그래야 마귀의 간계, 즉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인 것 같다. 기도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우리가 싸우는 영적 싸움의 실체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엄청난 영적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초월적인 어떤 힘을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탈육신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플라톤 철학의 유령이다. 기독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육신을 말하는데, 이상하게 플라톤 철학의 유령에 사로잡힌 어느 기독교인들은 탈육신을 말한다. , 싸워야 할 대상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엉뚱한 데로 돌린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사람은 그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오히려 육적인데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교회 지도자들, 권력을 잡은 자들이 그렇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고, 영적인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을 영적인 데 관심을 두게 한 뒤, 자신은 육적인 것을 취한다. 사실, 이게 바로 마귀의 간계이다. 마귀의 간계는 우리의 정신을 다른 데 팔게 만든 뒤,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실상, 자신은 육적인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두고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은 탈육신이 아니라, 오히려 성육신이다. ,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육신이 영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본다. 영적이라는 말은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여서 우리 인간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인간성을 그 창조의 질서대로 아름답게 지키고 가꾸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은 탈육신의 싸움이 아니라, 성육신의 싸움이다. 다시 말해, 영적 전쟁은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망치는, 짓밟으려 드는 모든 유무형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을, 인간성을 짓밟으려는 모든 유무형의 세력을 본문은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가슴 아픈 인류 역사의 한 장면이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 나치군은 유대인들을 잡아들여 수용소에 가두고 그들을 학대하며 학살했다.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들을 죽이기 전에 먼저 행한 일은 유대인들을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일례로, 그들은 수 천명이 모여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 하나 만을 설치한 뒤 그들이 아무데나 소변과 대변을 보게 만들어 분뇨와 뒤엉켜 살게 만들었다. 그러한 모습을 본 독일 나치군은 유대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승으로 생각했기에, 어렵지 않게 그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잔혹한 독일 나치군들도 오늘은 누구를 잡아다 죽일까궁리하며 유대인들 앞에 서서 죽일 사람들을 선발할 때, 사람의 얼굴을 한 유대인들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독일 나치군은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루 따뜻한 물 한 컵 씩을 제공했는데, 어떠한 유대인들은 그 물 한 컵으로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고 하면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유대인들은 결국 독일 나치군의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나치 수용소 생존자 엘리 위젤의 이야기에서도 증언된 것이다.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통해 펼쳐지는 마귀의 간계는 집요하게 인간성을 파괴하여 인간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리려 한다. 그 마귀의 간계에 무너지는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가 인간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성을 저버린 짐승 같은 인간으로 타락하고 만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그 모든 추악한 일들은 아름다움을 상실한 가슴 아픈 사람의 이야기들이다.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반대로,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아름다움와 인간다움, 즉 아름다운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의 은혜, 하나님의 영이 날마다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그 성육신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지지 않으면, 마귀의 간계를 이길 수 없다. 그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가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성령이 그것이다.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두면,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낼 수 없다. 그러나 보라.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얼마나 우리의 관심을 딴 곳에 돌리게 하는지!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이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무엇이 마귀의 간계인지 보이고, 무엇이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키는 것인지 보인다. 마귀의 간계는 자꾸 탈육신을 부추기지만,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성육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준다.


며칠 전, 신문 기사(2019816일 연합뉴스)를 통해서 독일 정부가 약 5천명의 나치 유대인 생존자들에게 매월 수백 유로씩 재정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에 현재 생존해 있는 나치 생존자들은 21만 명 가량 되는데, 2차 대전 이후 독일 정부가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반성하며 유대인들에게 배상한 금액이 현재까지 800억달러(93조원) 가량 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독일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과거사를 반성한다. 그리고 그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돕다가 피해를 입은 비유대인들에게까지도,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리고 그 유가족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내는,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다.

 

이렇게 영적 전쟁은 손에 안 잡히는 싸움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싸움이다. 성육신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파괴하려 드는 모든 마귀의 간계를 물리치고, 십자가 위에서 그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잃지 않으시고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아름다운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 공동체 -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0) 2019.08.27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0) 2019.08.24
생태계를 바꾸는 교회  (0) 2019.08.19
공부하는 교회  (0) 2019.08.17
포이에마  (0) 2019.08.0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19. 09:32

생태계를 바꾸는 교회

(사도행전 2:43-47)

 

예배 컨퍼런스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기념품을 샀다. 아이들 기념품으로는 껌을, 집사람 기념품으로는 열쇠고리를 사왔다. 열쇠고리를 고르는데, 각종 문구가 있었다. “number 1 dad, number 1 husband, number 1 grandpa”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number 1 wife”만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른 기념품 문구는 “number 1 mom”이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때 “number 1”이라는 수사를 동원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교회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때 “number 1 church”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우리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여, 우리 교회가 “number 1 church”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개인도 마찬가지겠지만, 교회 공동체는 그 공동체 구성원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number 1 church”가 될 수도 있고, “the worst church”가 될 수도 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많은 이들은 좋은 교회를 떠올릴 때 외적인 것(시설, 규모, 프로그램 등)부터 떠올린다. 그런 것(외적인 것)도 좋은 교회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겠으나, 교회 공동체를 규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좋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인식)’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인식)’은 자기 스스로를 생각할 때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존재로 인식하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음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말씀인 에베소서 2:1-10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포이에마이다.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른 서신에서 이것을 옛사람새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조시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사람을 새사람이라고 하고,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한다.

 

이 논리에 의해서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그 교회에 옛사람이 많은 지, 아니면 새사람이 많은 지를 보면 그 교회가 “number 1 church”인지, 아니면 “the worst church”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어중간한 so-so church”도 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를 누구라고 규정하는 지에 대한 자각이다. 나는 포이에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인이다!)

 

에를레프니스(Erlebnis)’라는 독일어는 이러한 상황을 잘 담고 있다. ‘에를레프니스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어떤 힘이 개입해 기존의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키고 개별적 사실을 뛰어넘어 보편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이러한 경험은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힘이라는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힘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기존의 사고방식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더 이상 이전에 살던 삶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되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사는, ‘개별적 사실을 뛰어넘어 보편적 진리를 드러내는삶의 방식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롭게 창조되었고, ‘에를레프니스의 순간을 경험하였기에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개별적 사실을 뛰어넘어 보편적 진리를 드러내는 삶의 방식을 취한다. 그들은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것이 가능한가? 대개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산당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공산당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포이에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제로 발생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그들이 생태계를 바꾸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에서처럼 살아간 이유는 그 당시에는 가난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로마제목의 착취가 심했다. 귀족들과 로마제국에 부역한 몇몇 관리층만 빼놓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한 상황은 이미 요한계시록 공부할 때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사람들을 가난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남의 것을 착취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제국주의적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삶의 방식이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굶주린 사람들, 가난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은 복지가 아니라 나눔이다. 복지는 세금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나눔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기에 행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살리는 그 나눔을 기꺼이 행한 것이다. 이게 바로 복음의 능력이다.

 

생태계란 생명이 생명을 보존하는 시스템이다. 생태계에 교란이 오거나, 생태계가 파괴되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는다. 그래서 생태계를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교회이므로, 교회의 생태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회를 다니는 인구가 계속 줄고 있다. 왜 그러한 일이 벌어질까? 교회의 생태계가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UCLA의 한국교회사가 옥성득 교수가 밝힌 한국의 대표 교단 중 하나인 장로교 통합측의 교인 추이와 전망 통계표이다.

이 그래프를 보면, 현재 교회의 생태계가 심각하게 망가져 있고, 그래서 앞으로 10년 후에는 교인수가 엄청나게 줄어들 것을 예상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이 이러한 상황이니, 다른 교단은 어떻겠는가? 다른 교단의 통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계속해서 교회의 생태계는 무너져 가고 있고, 생태계가 무너져 가니 그곳에 더 이상 생명이 깃들 수 없어, 생명(교인수)은 계속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원인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인을 찾아내고, 그에 따른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부이다. 그래서 지난 주일 예배 설교에서 강조했듯이,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공부를 하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을 해야만, 그 이후 우리의 행동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해 나가는 교회를 일컬어 나는 생태계를 바꾸는 교회라 부르고 싶다. 무너진 교회의 생태계를 바꾸는 일은 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기서 생태계는 범지구적인 보편적인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우리 교회, 지역 교회의 한 교회만 아무런 문제없고 평안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만족한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지역 교회도 언젠가는 그 생태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민기가 불렀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우리가 논하고 있는 생태계를 예쁜 언어로 잘 말해주고 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우리는 부흥하고 싶어한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 중,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에 집중하며, 우리 교회도 그렇게 부흥하게 해 달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가히, 놀부심보라 할 만하다.

 

본문의 방점은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에 있지 않다. 이것은 결과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본문의 방점은 그들이 바꾼 생태계에 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생명이 깃들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되니, 생명이 풍성해졌다. 너무도 당연한 창조의 이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고백 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다!”

 

애들만 낳아 놓으면 뭐하나? 가정이 풍비박산인데! 그 아이가 풍비박산인 가정의 생태계에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는가? 죽거나, 비뚤어지거나, 가정을 떠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다. 교회가 부흥만 되면 뭐하나?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면 뭐하나? 교회의 생태계가 풍비박산인데! 죽거나, 비뚤어지거나,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 포이에마가 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선한 일에 힘쓸 믿음과 용기와 헌신이 없다면, 그래서 교회의 생태계를 생명이 풍성하게 번성하도록 아름답게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을 입술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포이에마가 되고, 그래서 선한 일에 힘쓸 믿음과 용기와 헌신을 체득한다면, 그래서 교회의 생태계를 생명이 풍성하게 번성하도록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을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동일하게 입술로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공부하는 교회,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고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야 하는지 발견하는 교회, 그래서 교회의 생태계를 바꾸어 생명이 풍성하게 깃들도록 만드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교회의 생태계가 무너져 많은 어려움이 있는 이 시대에, 할 일이 정말 많다.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우리 함께 공부하는 교회’, ‘생태계를 바꾸는 교회를 세워 나가자. 그리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number 1 church”가 될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0) 2019.08.24
영적 전쟁  (0) 2019.08.22
공부하는 교회  (0) 2019.08.17
포이에마  (0) 2019.08.09
오후 4시에 일어난 일  (0) 2019.08.0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17. 04:17

공부하는 교회

(요 1:45-51)

 

성경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두 명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빌립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인 빌립니다. ‘빌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누구인가? 대체적으로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를 가리킨다고 본다. 바돌로매(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이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것처럼, 빌립도 자신이 먼저 만나 알아본 예수님을 가장 친한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소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나사렛 출신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실망한듯 이렇게 답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여기서 선한 것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메시아는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출신이어야 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5:2). 그런데, 빌립이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있는 예수가 나사렛출신이라고 하니, 나다나엘은 실망한 것이다.

 

그래도 빌립은 포기하지 않고 나다나엘을 계속하여 설득한다. “와서 보라!” 베스트 프랜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 그때, 자기에게 오고 있는 나다나엘을 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아마도 예수님이 열 두 제자 중 가장 덕망 있던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자기에 대하여 이러한 평가를 하시는 예수님에게 나다나엘은 묻는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 그때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런 대답을 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겉으로 봤을 때는 별 말 아닌 것 같은 예수님의 이 말에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대한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꾼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왜 갑자기,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을까?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이 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는 말씀에 마음을 바꾸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랍비 문헌에 따르면, 낮에 토라를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나무 그늘은 무화과나무 아래라고 가리킨다. (복음서의 유대적 배경, 21).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넓다. 그래서 그늘을 짙게 만든다. 옛날, 무덥기로 유명한 중동 지역에서 낮에 공부할 만한 곳은 단연 무화과나무 아래로 꼽혔다. 또한 무화과나무 아래서 공부하면 무화과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어 좋았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토라(하나님의 말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시편 1편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복 있는 사람은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토라를 주야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토라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당연히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이고, 메시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의 뜻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진심으로 간구하고 찾고자 했던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했다라는 뜻이다. (복음서의 유대적 배경, 22).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며 열심히 공부했던 나다나엘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임한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진리는 운 좋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자가 발견하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니까, 엉뚱한 것(우상)에 마음을 빼앗겨 인생을 망치며 산다. 며칠 전 신문기사를 보니, 타작마당으로 신도들을 때리고, 피지 섬에 지상 낙원 건설한다며 신도들을 감금, 노역 시킨 신옥주 목사(목사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가 징역 6년을 구형 받았다.

 

묻고 싶다. 이것을 법원이 판결해 주어야 아나? 법원이 판결해 줄 정도 되면, 이미 개인의 영혼은 상할 대로 상해 있고, 가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때다. 그제서야 법원이 판결해서 징역 6년을 구형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라도 그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러한 일이 나 자신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 공동체에 일어나지 않도록, 그래서 한 영혼도 상하지 않도록, 가정을 지켜내기 위하여, 공동체를 튼실하게 세워나가기 위하여,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면, 영혼을 망치고 가정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일은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와 우상을 구별하는 분별력은 공부를 통해 기르는 수밖에 없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진리를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판에, 아무런 공부도 안 하면서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속지 않고 인생을 망치지 않을 거라는 요행을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고 어리석은 발상이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을 행하는 사람과 같다.

 

물이 귀해 식수마저 부족한 어느 나라 사람이 서구를 방문했다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 그래서 수도꼭지를 여러 개 사서 자기 나라로 돌아와 벽에 꽂아 놓고 틀어 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 벽 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배관도, 급수 펌프도, 정수장도 없으니 물이 쏟아져 나올 리가 없다. 심층적 이해(공부) 없이는 해결책도 없다.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8-9).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교회의 사업이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면 우리의 삶과 영혼,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를 지키며 아름답게 세워 나갈 수 있다. ‘공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중의 하나이다.

 

일례로,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오신 OOO 권사님 내외분이 동생의 장례를 도와준 어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를 가서 단 번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단다. 그 이유는 우리 교회에서 얼마 전 했던 <두 편의 영화와 한 번의 강의>를 통해서 기독교 죄론에 대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 교회를 가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죄에 대한 이야기밖에 안하고, 죄만 강조해서 사람들을 죄인 만들어 놓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사님 내외분은, 그 교회의 위성험을 알겠더라고, 말씀해 주셨다.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몰랐던 것, 잘못 알았던 것이 보이고, 어떠한 것이 선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선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우리의 영혼,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악한 것에서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나는 지금 선한 것과 사귐을 가지며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혹시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착각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석 같은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영혼,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 나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는 공동체, 그래서 선한 것을 알아보는 공동체, 그래서 생명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공동체,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전쟁  (0) 2019.08.22
생태계를 바꾸는 교회  (0) 2019.08.19
포이에마  (0) 2019.08.09
오후 4시에 일어난 일  (0) 2019.08.02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게 하라  (0) 2019.07.2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9. 03:37

포이에마

(에베소서 2:1-10)

 

포이에마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10절을 다시 풀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인데, 어떠한 작품이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작품이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spirit / 정신)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가?

 

본문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말하고 있다. 가장 깊은 인간론이고, 가장 깊은 구원론이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구원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명시적으로 선포한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여기서 기독교 인간론의 기본적인 명제가 제시된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다. ‘허물과 죄는 기본적으로 완전하지(holy)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구원을 합격점으로 생각해 보자면, 100점을 맞아야 구원을 받는데, 허물과 죄, 100점에 모자라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 비참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3절까지 전개되는 기독교 인간론의 핵심은 인간의 비참한 존재에 관한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좀비를 생각해 보라)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게 조종을 당하는 삶을 살고, 불순종의 아들의 영에 사로잡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온갖 불의한 일에 연루되어, 결국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다.

 

여기서 본질상이라는 말을 좀 더 살펴보자. 본질상(휘시스)이라는 말은 태생으로 결정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전자보다 더 깊이 새겨져 있는 본질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허물과 죄로 인해 구원 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질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질문이 든다. 이것은 마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던졌던 질문과 같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이에 대해 니고데모는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3:4). 이러한 질문처럼,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자가 소위 가난한 자이다. 자기 존재의 비참한 실존을 볼 수 있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물질이 없는 자가 가난한 자가 아니다. 물질이 많은 자가 부자가 아니다. 자기 존재의 비참한 실존을 발견하고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지?”라고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이 가난의 영성은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 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곤궁함을 늘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본질상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구원을 점수로 말해 100이라고 하면, 우리의 힘으로(노력으로)는 절대로 100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 우리의 본질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의 상실이다. 여기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 시작된다. 펠라기우스는 우리의 본질을 우리가 바꿀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의 본질이 바뀐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주장 중, 기독교 전통은 어거스틴의 주장을 옳다고 판단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직접 원인이지, 간접 원인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간접 원인이고, 어거스틴에게 은혜는 직접 원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 선물이지, 간접 선물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간접 선물이고, 어거스틴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 선물이다.

 

펠라기우스의 생각이 이단으로 정죄되고 어거스틴의 생각이 정통으로 인정 받은 이유는 기독교 구원론의 독특한 변증법 때문이다. 기독교 구원론은 기독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기 복잡하다고, 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마구 떼어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단순하지 않다. 신비는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복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존재가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구원론은 인간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의 오류는 이것이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 개인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 개인이 노력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에 무의미해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구원의 경륜을 말하고 있지, 인간 개개인에 직접 임한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은 무엇인가? 본문은 이렇게 답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5-6). 여기서 계속 제시되는 단어는 함께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적이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 십자가에 달리셨고, 혼자 부활을 경험했으며, 또한 혼자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는가?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대표자(맏아들, 맏형, 새아담)로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대속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대속은 단순히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싸구려 신앙이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이 언제 일어나는가? 우리는 언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데, 그 본질이 바뀌어 구원 받은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는 것은 오직 그와 연합할 때 일어난다. 이 순간이 믿음의 순간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그와 함께 부활하며, 그와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는다. ‘대속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맡겨 놓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도록 이끌어 주는 마중물이다.

 

기독교 인간론의 완성은 구원에 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비참함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러한 긍휼하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주기 원하시는데, 그 방식이 매우 신비롭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기독론 안에서 발생한다. ,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다. 이것은 아주 신비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다. 인간에게 직접 은혜를 주어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창조에 집중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창조에 집중할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게 된다. , 이 말은 우리의 존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그 본질이 바뀌어 본질상 축복의 자녀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작품(포이에마)’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작품(포이에마)로 탄생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는 악한 일을 일삼겠지만, 이제 본질상 축복의 자녀는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질이 선하게 바뀌었는데,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이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가슴 벅차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 06:14

오후 4시에 일어난 일

(요한복음 1:36-39)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 그 중 마태, 마가, 누가를 공관복음서라 부른다. ‘공관’, 즉 보는 관점이 같다는 뜻이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여러모로 세 개의 공관복음서와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라고 하지 않고, 4복음서라고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예수를 어린 양에 비유해서 부르는 것은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언어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온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칭하며 그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소개한다. 여기서 어린 양희생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어린 양을 통해서 죄사함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의 어린 양개념은 이와 다르다. 요한계시록은 천상의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묵시문학적 심판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를 가리켜 어린 양이라고 부르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희생양의 의미와 세상 끝날에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의미를 담아서 부르는 것이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사역이고 역할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 없다. 그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설 뿐이다. 요한은 그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비둘기 문양은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서고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인해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렀을 때 즉시따랐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즉시따르는 게 아니라,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이 상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가리켜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고, 자신이 그렇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는 자신의 뒤에 와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을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이라고 소개한다.

 

스승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여기서의 따라 나섬은 공관복음에서의 따라 나섬과 다르다. 공관복음에서의 따라 나섬은 즉시따라 나서는 제자됨이었지만, 요한복음에서의 따라 나섬은 일종의 탐색전이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묻는다. “무엇을 구하느냐?” 무슨 이유로, 무엇을 바라면서 자신을 따르는 것인지 물으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Rabbi, Where are you staying?”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이것은 어디에 사세요? What is your address?’라는 뜻이 아니다.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는 말인데, 여기서 머무르다로 번역된 메노성령이 예수님에게 머물렀다라는 곳에 쓰였던 그 동사와 같다. 요한복음에서 메노(머무름)’은 두 인격체의 관계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머무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랍비여 어디에 계시오니이까? 선생님,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는 질문은 이런 뜻이다. “예수님, 당신은 어떠한 인격체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신들의 스승 세례 요한을 통해 소개 받은 예수님을 만나, “선생님, 당신은 어떠한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두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는다. “와서 보아라!” 그 초대에 응한 두 제자는 그날 예수님과 함께 거한다. 여기서도 메노(머무르다)’라는 동사가 쓰인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물 때도, 두 제자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물을 때도, 그리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여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거할 때도 모두 메노(머무르다)’라는 동사가 쓰인다. 이렇게, 관계가 형성되고 그 인격과 정체가 드러난다.

 

본문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때가 열 시쯤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열 시는 현재 우리가 쓰는 시간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시간을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바꾸려면 더하기 6을 하면 된다. (질문: 예수님은 몇 시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나? 9! 거기에 6을 더하면, 15가 된다. 이를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바꾸면, 오후 3시이다.) 그러므로, 10시에 6을 더하면, 16이 되고, 이를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바꾸면, 오후 4시가 되는 것이다.

 

오후 4. 요즘 말로 하면, 퇴근 시간이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은 요즘과 달라서, 오후 6시가 되면 또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오후 4시는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또다른 하루를 맞이해야 할 중요한 시간이다. 그런데 두 제자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와 머무르기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예수님 위에 성령이 머물렀고, 두 제자는 예수님과 머무르며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싶었고, 그래서 예수님과 머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그 사람과 머물러야 한다. 충분한 머무름 없이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반칙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머무르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문명의 전환기에는 그분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에 살고 있다. 특별히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우리의 삶의 형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그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지구의 그 어느 생명체도 그 변화를 따라잡기 버거워 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하기를 포기하는 생명체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오후 4시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는 오후 4시에 집에 갈 생각을 하기 보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 위하여 예수님과 머물러 있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있는가? 오후 4, 예수님과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집에 가기 바쁜가? 아니면, 우리도 두 제자처럼,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기 위하여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머무르기로 결정했는가?

 

예수님과 머무르기로 선택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안드레는 그 기쁨을 나누고자 가장 먼저 자기의 형 시몬 (베드로)’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어!” 예수님과 머물렀더니, 이제 예수님이 그들 위에 머물게 된 것이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머물러 있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드러났듯이, 두 제자들 위에 예수님이 머물러 있어 그들이 이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과 머무르고 있는가? 내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가? 아마도 그것과 머무르다 보면 그것이 처음에는 구원을 주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나의 생명을 헤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어느 때까지 그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려는가. 이제 그만 우리, 오늘 우리가 목격한, 오후 4시에 일어난 일을 본받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르기를 바라는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머무르게 되는 구원의 삶을 사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하는 교회  (0) 2019.08.17
포이에마  (0) 2019.08.09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게 하라  (0) 2019.07.25
신앙의 꽃 - 기도  (0) 2019.07.25
맡겨진 복음  (0) 2019.07.1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25. 10:12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게 하라

(디도서 2:1-15)


불교에 삼독((三毒)이라는 게 있다. 탐진치가 그것인데,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말한다. 신실한 불자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것은 불교에서만 적용되는 윤리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고등종교에서는 모두 탐진치가 신실함의 기준이 된다.

 

디도서는 크레타섬에서 목회하고 있던 목회자 디도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이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 서신을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서신이 신약성경에 들어온 이유는 교회에 참된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울이 직접 쓴 편지가 아니어도, 바울이 디도에게 써서 보낸 편지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크레타섬에서 목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곳의 주민들이 원래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1:12-13a). 여기에 더해서 크레타섬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그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거짓 교사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명백한 거짓 교사가 있는가 하면, 잘 드러나지 않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

 

바울은 거짓 교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1:11). 거짓 교사들의 내적 동기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아니라 이익이다.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이 그들의 내적 동기이다. 욕심에 휩쓸리면 마땅하지 아니한 것들을 가르쳐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결국 문제를 일으키는데, 바깥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가정 파괴이다. 물론 이것은 곧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디도는 거짓 교사에 맞서 구원을 주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안고 크레타섬에서 목회하는 중이다. 얼마나 힘겨운 싸움이었을까, 짐작이 간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한 거짓 교사에 맞서 바른 교훈을 전해야 하는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들을 가르칠 것을 주문한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크레타섬 교회 공동체에게 아주 실제적인 교훈이 전달된다.

 

교훈은 다섯 부류로 나뉘어 전달된다.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그리고 종들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 주어진다. 각 부류에게 전달된 교훈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그 구체적인 교훈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복음의 원리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즉 그리스도인들이 구체적인 가르침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대속) 자신을 주신 이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증거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

 

십자가의 사역은 어떠한 효력을 발생시키는데, 거기에는 죄사함의 효력이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심으로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하신다. ,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새사람을 창조한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 복음은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한다.

 

본문의 말씀대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나서 우리는 그 은혜로 양육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삶을 살 때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은 우선 늙은 남자들에게 주어진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으면 늙은 남자들은 어떠한 선한 사람이 되는가. 기본적으로 늙은 남자들은 절제력을 키워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는다는 것은 절제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른 이들에게 충고를 들을 기회가 적다. 어릴 때는 잘못을 하면 부모에게 질책을 듣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자들에게 충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점점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절제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남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유분방한 삶을 살게 되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늙은 남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2).

 

두 번째로 늙은 여자들에게 교훈이 주어진다. 여기서 이와 같이라는 말로, 늙은 여자들도 늙은 남자들과 함께 거룩한 행실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이 든 여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남에게 대한 안 좋은 말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준다. 나이가 많아지면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데, 늙은 여자들이 남을 험담할 위험에 빠지게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별히 술에 취하면 그러한 일이 발생할 위험이 높으니,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세 번째로 젊은 여자들에게 교훈이 주어진다. 이 교훈의 특징은 바울이 디도에게 젊은 여자들을 직접 가르칠 것을 명하지 않고, 늙은 여자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도록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도가 젊은 목회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사역자가 젊은 여자들을 가르칠 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나 오해를 피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경험 많은 늙은 여자들이 하도록 위임하고 있다. 여기서 늙은 여자들의 책임이 막중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라도 선할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젊은 여자들에게 주어진 교훈은 이렇다. 아주 명시적으로 쉽게 나와 있다. 첫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다른 일 때문에 가족에 대한 우선순위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둘째, 집안일을 소홀히 여기기 말고 신중하고 순전한 태도 잘 처리해야 한다. 셋째,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복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이 가정에 집중되는 것을 보면, 위에서 말했듯이,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젊은 여자들이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여자가 거짓 교사의 꾀임에 넘어가면 가정 파탄은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우려하고 있듯이, 불신자들에게 교회를 무시하거나 손가락질할 빌미를 주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로 젊은 남자들에게 교훈이 주어진다.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말을 통해서 젊은 여자에게 주어진 교훈이 젊은 남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젊은 남자들도 가정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가정 파탄에 이르는 것을 옳지 못하다. 다만, 젊은 남자들에게 주는 교훈의 특이한 점은 바울이 디도에게 이들의 본이 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목회자 디도는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선한 일에 본을 보이고, 가르침에 있어서도 본이 되는 정도를 걸어야 한다. 특별히 거짓 교사가 그러하듯 가르침을 이익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젊은 목회자 디도는 젊은 남자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도가 젊은 남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많이 끼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디도가 본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교훈은 종들에게 주어진다. 그 당시 가정은 부모와 자녀와 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 자녀들, 그리고 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이 노예계급의 존재를 질타하지 않는 것은 그가 불의해서가 아니다. 사회적 체계는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사회적 체계 안에서 현실적인 평등과 자유, 그리고 정의를 추구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도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 내에 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불평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산다.

 

다만, 종들에게 주는 교훈이 요즘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는 종들은 없고 모두 상전만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다섯 부류로 나누어서 구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지만, 그 교훈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미덕이 중심하고 있다. 하나는 절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이다. 모든 부류를 막론하고, 이 두 가지의 미덕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정욕과 경건하지 못한 모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아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절제는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두루두루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다. 특별히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이 시대에 절제의 미덕은 더더욱 필요하다. 아래의 글은 얼마전 내가 했던 단상이다.

 

오늘날은,

뭔가를 먹기보다 먹지 않는 게 생명이 더 풍성해지고,

뭔가를 하기보다 하지 않는 게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한다.

뭔가 하기를 부추기는 시대,

뭔가를 하지 않는 저항의 영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소망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드러날 것을 믿는 자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소망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해야 하는 것이고, 이 소망 때문에 절제를 하더라도 손해보는 게 없는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인내하며 살아간다.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고,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아, 두 가지, 절제와 인내의 미덕 가운데 살아간다면,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양육하도록 우리를 내어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자이다. 그 양육은 우리에게 절제와 인내의 미덕을 가져온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 안에서 선한 일에 열심히 힘쓰면,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얕잡아 보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이에마  (0) 2019.08.09
오후 4시에 일어난 일  (0) 2019.08.02
신앙의 꽃 - 기도  (0) 2019.07.25
맡겨진 복음  (0) 2019.07.18
행복한 교회  (0) 2019.07.1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25. 04:11

신앙의 꽃 - 기도

(이사야 37:15-20 / 누가복음 11:1-4)

 

지난 몇 주간, 기독교 베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인이 되면 구별되는 네 가지의 요소가 삶에 들어온다. 세례(예수 사건의 휘말림) / 성경(휘말림의 의미와 결과가 무엇인지) / 성찬례(환대와 감사의 향연), 그리고 오늘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의 기도에 의하여 우리의 기도 또한 바뀐다.

 

지난 한 주간 미국의 뉴스에서는 이 한 가지 사건을 집중보도했다. 바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사건이다. 50년전(1969720), 인류 최초로 달 탐사에 성공했다. (1969년 생은 50살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폴로 11호를 통해 달에 간 우주인은 세 명이다. Neil Armstrong, Michael Collins, 그리고 Buzz Aldrin가 그들이다. 모두 1930년 생이다. 이 중에서 닐 암스트롱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닐 암스트롱은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생존해 있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달에서 처음 읽은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55절과 시편 83-4절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시편 8:3-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나중에 Buzz Aldrin이 아폴로 11호 달 탐사 회고록에서 밝혀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Aldrin 달 착륙 후 휴스턴의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준비해 간 성만찬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낭독했다. Aldrin은 휴스턴의 나사 근처에 있는 Webster Presbyterian Church의 장로였다. 그는 그 교회의 목사와 의논한 후 빵과 포도주를 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혼자 성찬식을 집례했다.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경건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게 참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 사진 중, 달 표면의 발자국이 바로 Aldrin의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신앙인이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물론 그가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만은 매우 경건했다.) 우리는 우리의 경건한 신앙을 어떻게 표현하며 살아가는가?

 

5. 현재 과학기술의 꽃은 우주탐사이다. 우주탐사의 발전은 그 나라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냉전 시대에 우주탐사를 통해서 미국과 소련은 과학기술의 우위를 다투었다. 중국이 얼마 전에 달 탐사를 했고, 인도도 달 탐사에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미국은 현재 화성탐사를 진행 중이다. 화성에 대한 데이터는 이미 많이 확보된 상태이고, 곧 유인 우주선을 보내 화성을 탐사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꽃은 무엇인가? 바로 기도이다. 우주탐사가 한 나라의 과학기술의 질적 역량을 보여주듯, 기도는 한 사람의 신앙의 질적 역량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례를 통해 시작된 신앙의 여정은 기도에 다다라 꽃을 피운다. 한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꽃을 피우기 때문인데, 우리가 기도라는 꽃을 피울 때,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비로소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된다.

 

기독교 역사와 신학을 통해서도 그 사실이 계속 증거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 신학의 대가들은 모두 그들의 마지막 신학 여정으로 기도를 지목했고,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신학 여정을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의 성숙이다”(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97). 왜냐하면, “기도가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인간성이 무르익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로완 윌리엄스, 97).

 

어떻게 보면,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기도라는 행위는 모두 같지만,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기도가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도록 한다. , 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삶이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있었기에, 그들의 기도 또한 그 안에서 새롭게 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외우는 주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 우선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자.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왕 외에 히스기야 왕 만큼 경건한 신앙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경건한가. 그는 앗수르 침공으로 나라가 백척간두 사이에 놓인 상황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37:16).

 

히스기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도 하는 고백이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이와 매우 다르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이러한 예수의 기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은 기도의 혁명이다. 예수님의 기도 이전에, 그 누구도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기독교의 신학 교사들(교부들)은 하나 같이 기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 중에서 254년경 박해를 받고 순교한 오리게네스(Origen)라는 교부가 있다. 그도 기도에 대한 책을 저술했는데, 기도에 관한 그의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었다. “우리가 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아신다면 왜 번거롭게 기도해야 하는가?” 굉장히 재미나는 질문이다. 우리도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드는 질문들은 거의 모두 이미 기독교 역사에서 던져졌던 질문들이다. 우리가 그러한 질문이 던져졌고, 그에 대한 답이 주어졌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 많은 문헌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리게네스는 거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고 행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아시지만, 우리가 그리 하기로 결심한 것들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치유나 화해를 이루거나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고 하실 경우, 여러분의 기도가 그 일을 일으키는 일련의 원인에 포함되도록 선택하십니다”(로완 윌리엄, 102).

 

조금 다른 말로 위 대답을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 주체적으로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서 이루실 수 있다. 그렇게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소외시키기 원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굉장히 따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외로움을 죽어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소외이다. 사람은 소외 당할 때 가장 비참함을 겪는다.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행위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행하시든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일의 주체가 되게 하셔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신다. 얼마나 따스한 하나님의 마음인가.

 

예수의 기도 안에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와 같이, 우리도 다른 이들을 소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이 왜 어지럽고 힘든가? 왜 이렇게 다툼이 많은가? 모두 소외때문이다. 누군가를 소외하려는 사람과 그 소외 당함에 분노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이 일으키는 무역 분쟁의 내용은 결국 한국을 소외시키는 전략이다. 거기에 분노한 한국도 그들과 같이 불매운동을 통해서 일본을 소외시키려 한다. 이렇게 소외가 난무하면 결국 다툼만 늘어갈 뿐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도 모두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발언이다. 난민 출신 국회의원들에게 자기의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발언은 부적절하다.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소외에 동참하면, 그들은 기도를 잘못 배운 것이다. 아니, 그들은 예수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기도 안에서 저 멀리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소외시키지 않고 품어 안으신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의 기도를 드리며,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기도 안에서 이 세상의 고통과 곤경을 하나님의 마음 한 가운데로 가져간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룰 수 밖에 없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적 인간성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무르익게 끔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신다.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고, 우리가 그 일의 주체가 되게 하신다. 그래서 기쁨을 주신다. 반대로, 기도를 안 안다는 것은 기도를 안 하는 것을 통해서 상대방을 소외시키겠다는 불경한 마음이다. (넌 내 삶의 바깥에 있어. 그러니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꺼야!)

 

우리가 예수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삶 속에서 어느 누구도 소외시키면 안 된다. 특별히 가족 간에 서로를 소외시키지 말라. 남편은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이 하려는 일에 아내를 동참시키고, 아내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하려는 일을 동참시키라. 그렇게 부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부부 간에 서로 모르는 영역이 있으면 안 된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기도 제목을 계속 나누는 이유는 그 일을 잘 이루기 위한 주술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일에서 소외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일의 주체로 초청하기 위함이다. 교회의 일은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믿는 바이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요,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 위함이다.


신앙의 꽃은 기도이다. 기도가 활짝 필 때, 그리스도인은 가장 아름답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기도를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기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꽃을 활짝 피워내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18. 09:22

맡겨진 복음

(딤후 2:1-13)

 

요즘 한국의 뉴스 중,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것 중 하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에 대한 법적 싸움이다. 최근 대법원에서 상주본은 국가의 것이라는 판결이 나온 이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소장자 배익기씨와의 법적 싸움이 치열해졌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을 보면서, 그래도 한국 사회가 많이 민주화됐다는 생각이다. 예전 같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상주본을 국가에서 몰수했을 텐데, 그래도 법적인 싸움을 벌여가며 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가 많이 발전했다. 대한민국이 계속하여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응원한다.)

상주본이 학술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해례본이기 때문이다. 상주본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해 놓은 책이다. 그래서 가치가 높다. 항간에는 그것의 가치가 1조원 정도 될 거라해서, 배익기 씨는 그 가치의 10분의 1, 1천억원을 주면 국가에 내놓겠다고 맞서는 중이다. (국가와 문화재청, 그리고 학자들과 국민들, 또한 배익기 씨, 모두가 행복한 해법이 등장하여,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

 

상주본이 골동품 상의 손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가치는 사람에 따라 매우 상대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도 일맥상통한다. 상주본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몰라본 사람은 무지에 휩싸여 자기의 가치 또한 별로인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상주본 때문에 국가와 한 개인 법적 싸움을 하는 이유는 상주본이 지니고 있는 가치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놓아두고 세상과 싸우는 이유도 복음의 가치 때문이다. 복음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 골치 아픈 싸움을 이어가겠는가.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강해야한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은혜 가운데 강하라는 말을 한다. ‘강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엔뒤나무권능을 부여받다’, ‘힘을 받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게서 권능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싸움을 이어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싸움을 결코 이어갈 수 없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4:16).

 

무엇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2). ‘부탁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쑤의탁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긴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도 맡겨서 그들이 그 복음을 계속해서 퍼뜨려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상주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가치를 아는 원작자는 그것의 가치를 아는 또다른 누구에게 잘 맡겨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상주본은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 계속 맡겨지다가 어떠한 일을 통해 골동품상의 손에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중간에 그것의 맡김이 약간 허술해졌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그것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은 그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지는 것이고, 맡겨진 복음은 그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세대를 거쳐 맡겨진다. 상주본을 소장한 배익기씨의 삶은 온통 상주본에 얽혀 있을 것이다. 상주본을 소유한 동안 그는 자기의 사생활에 얽히거나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오직 상주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인생의 전부가 휘말려 있을 것이다.

 

복음을 맡은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맡은 자의 삶을 좋은 병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3). 그러면서 병사로 복무하게 되면 자기 사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군생활 할 때, 참 어려웠다. 그때 아버지는 암투병 중이셨고, 아버지 병간호 하시던 엄마마저 간에 고름이 차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셨다. 나는 장군의 배려로 45일간 특박을 받아 집에 와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엄마를 정성껏 간호했다. 삼성병원의 의료진들은 엄마가 곧 죽을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의식이 별로 없었고, 간에 꽂아 놓은 튜브를 통해서 고름이 계속 흘러 나왔고, 엄마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다 받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45일간 엄마 곁을 지키다 부대로 복귀했다. 그런데, 내가 거의 넋이 나가 있으니까, 장군이 나를 불러서 서울로 보내줄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제대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제대할 때까지 끝까지 장군님을 모시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육군본부에 남아 계속 군복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 (45일 동안 엄마를 정성스럽게 간호하고 부대 복귀 한 이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간의 고름이 다 빠진 것이다. 의료진들이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회복하셨다.)

 

병사로 복무하는 기간 동안 병사는 자기 사생활에 얽매일 수 없다. 완전히 제대하지 않는 이상, 병사는 병사의 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음을 맡는 일은 그것을 맡겨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수고를 바울은 농부에 비유해서 말하는데, 거기에 쓰인 헬라어 코피아노(수고)’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은 무엇인가? 이 복음도 상주본처럼 실체가 있다. 복음은 말이 아니다. 실체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은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8)이다. 배익기씨가 상주본에 얽매여 자기의 사생활을 잊어버린 이유는 상주본이 자신에게 어떠한 실제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상주본의 경우는 이다.

 

그리스도인이 맡겨진 복음을 위하여 좋은 병사가 되어서 자기의 사생활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 복음을 지켜내고 그 복음을 다른 충성된 이들에게 전달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10).

 

배익기씨가 상주본에 모든 삶을 걸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주장대로 이루어진다면) 1천억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모든 삶을 걸고 있는 이유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 복음상주본과 비교하며 설명하긴 했지만, 사실, 복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 가치를 실제로 알아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좋은 병사(군사)’가 될 수밖에 없다. 맡겨진 복음을 지켜내고, 또 계속하여 다음 세대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은 허황된 말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실제 인물이다. 복음을 맡는다는 것은 한 실체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하나님에 의하여 부활했다. 그래서 복음을 맡은 자는 바울의 말처럼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다(11). 또한 참으면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다(12). 우리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복음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 복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지 않으면 아예 맡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셔서, 그것을 맡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 그 복음을 맡은 사람은 그것에 휘말려 들어 자기의 사생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씀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생활에 얽매여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일 뿐이다. 복음의 가치를 안다면, 그 가치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그 가치를 아는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밖에없다. 그것이 복음의 가치를 아는 자들의 숙명이다.


복음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그 맡은 것을 지켜내고 또한 맡기기 위해서 받는 고난은 말로 표현해서 고난이지 전혀 고난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것이 고난일지 모르지만, 그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다. 기쁨이고 감사이다. 이게 바로 복음의 신비이다. 그러니, 고난 받을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맡겨진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15. 14:43

행복한 교회

(딤전 5:1-16)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지금은 에베소교회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유추해보자면, 에베소교회는 꽤 규모가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본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대인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대인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관계로 인한 어려움이 존재했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공동체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뜻이다.

 

대인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다. ‘아버지를 대하듯, 어머니를 대하듯 교회 어르신들한테 잘 해라. 젊은 여자들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이런 가르침들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보편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다.

 

도산 안창호의 삶을 보면, 참 놀라운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대인관계를 어떻게 했는가이다. 안창호에게는 혈족관이라는 게 있었다. 특별히 여성에 대한 대인관계를 조심했는데, 본인보다 나이가 많으면 어머니처럼 대했고, 본인과 나이가 비슷하면 누이처럼 대했고,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면 딸처럼 대했다. 이러한 혈족관은 불교에서 배운 것이라 한다.

 

안창호의 삶에서 놀라운 것은 독립운동하느라 가정을 떠나 오랜 세월 바깥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과의 스캔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안창호가 특별히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 본문에 보면, 과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공동체에 과부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에베소교회는 그만큼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았다는 뜻이다. 요즘은 과부라는 개념 자체도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남편을 잃고 살더라도 사회에서 그렇게 약자로 살지 않는다. 좀 외로울 뿐이지, 경제적, 법적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에는 달랐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혼자 남겨진 여인, 과부는 사회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이러한 상황은 많이 알려진 것이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본문에서 한 가지 매우 섬뜩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8).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을 믿음과 연관시켜, ‘믿음의 배반’,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에베소교회 내에 가족을 잘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이러한 말씀도 별로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사회적 통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여성가족부에서 발행된 가족 부양에 대한 인식 통계에 나타난 것처럼, 이제 부모 부양이나 가족 내 부양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부양은 가족이 하기보다 국가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리고 국가 정책이 실제로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일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대인관계나 가족과 과부를 돌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공동체가 사람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전부다. 행복한 교회는 각 사람의 행복과 직결된다. 교회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행복해야 교회 공동체도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특성 상, 집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특성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교회 구원성인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있다. 왜 그런가?

 

요즘은 많은 것을 조사하는데, 글로벌 행복 지수라는 것이 있다. 세계 각국의 행복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싱가포르 같은 아시아의 경제대국들의 행복지수가 경제 수준에 비해서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동양 나라들의 공통적인 문화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집단주의이다.


대체로 소득이 오르면 행복해지는데, 소득이 올라도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행복도가 소득이 오른 만큼 오르지 않은 데, 그 이유는 집단주의적 문화에서 부족한 심리적 자유감때문이다. “자유감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행복에 관한 연구를 행한 학자들의 견해는 이렇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행복을 만든다.” (<완벽한 공부법, 240).

 

그런데, 한국은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곳이고, 더군다나 한국교회는 교회의 집단주의적인 문화가 거기에 더해져 집단주의 문화가 더 강한 곳이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곳의 특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좋아하고, 누군가의 평가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평가하고 평가 받느라 만성적 긴장과 피로가 심하다. 하물며 한국 교회는 어떻겠는가?

 

한국 교회의 특징을 보면, 어떠한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될 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역의 방향이라든지, 아니면 신학적 견해, 또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 때문에 떠나는 비율을 매우 낮고, 대개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교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대인관계의 문제이다.

 

소득이 높은 사회일수록 집단주의 문화보다는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개인주의 문화를 선호한다. 다른 말로 해서, ‘심리적 자유감에 대한 욕구가 높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심리적 자유감의 욕구를 억압당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심리적 자유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에 나설 것이고, 그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될 것이다.

 

심리적 자유감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은 에베소교회 때에 과부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과 같다. 과부를 돌보는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어려움이 닥쳤던 것처럼, 요즘은 심리적 자유감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목회자로서 교회 구성원의 심리적 자유감을 존중하고 싶다. 교회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집단주의’, 더 심하게는 파시스트 집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더 조심해야 한다. 바깥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나는 가끔 민망할 때가 있다. 어떤 분이 교회를 안 오셔서 안부 전화를 드리면, 대개 교회 안 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다음 주에는 교회를 꼭 가겠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교회 출석때문에 전화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진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때 매우 민망하다. 내가 무슨 공산당의 지도자 동무 또는 감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그냥, 정말 목자의 마음으로 그 분의 삶을 살피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고 카톡을 하는 것인데, 교회를 안 오신 분은 교회 안 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을 자진해서 고백하실 때, 나의 마음은 매우 민망하다.

 

우리는 성경 시대를 사는 게 아니라, 21세기를 산다. 그때는 그때의 문제가 있었고, 지금은 지금의 문제가 있다. 문제는 다르지만, 그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똑같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행복은 심리적 자유감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구성원인 사람심리적 자유감을 서로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에 실패하면,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개신교회는 이 점을 더욱더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대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자유/또는 개인의 자율이다.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자유(또는 개인의 자율)이 억압을 받았다. 구원도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교황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깨 버렸다. 구원이 교회나 교황의 손, 즉 교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대해서 개인의 자유/개인의 자율을 선언한 혁명적인 일이다.

 

물론, 개인의 자유와 자율이 강조되면, 그만큼 개인의 책임도 늘어나는 법이다. 책임이 늘어나면 그만큼 스트레스도 깊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수행하고 지키느라 스트레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빼앗기고 싶어하는 현대인은 없다. 그게 현대인이 빠진 딜레마이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 , ‘심리적 자유감을 지켜주는 문화, 이것은 행복의 수준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집단주의나 파시스트의 성향을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에 저항하면서, 교회 구성원 각 사람심리적 자유감을 지켜주고 존중해 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 우리 교회는 선진국형 교회 아닌가. 다만,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담임목사로서 나는 우리 교회 각 구성원의 심리적 자유감을 존중한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안부 전화를 하더라도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마시라. 그리고 반대로, 여러분도 나의 심리적 자유감을 존중해 주시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보듬어 줄 때, 우리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행복한 교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꽃 - 기도  (0) 2019.07.25
맡겨진 복음  (0) 2019.07.18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0) 2019.07.11
환대와 감사의 향연  (0) 2019.07.08
성경과 그리스도인  (0) 2019.07.0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11. 09:39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딤전 4:6-16)

 

디모데전후서의 말씀은 성경공부 고급반에서 다루면 참 좋은 성경이다. 구원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조언하고 있는 것처럼 전념해야 한다. 물론, 무엇이든 인스턴트처럼 단 순간에 이루는 것을 좋아하는, 그리고 그러한 것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원은 이지, 한 순간의 성취가 아니다.

 

요즘, 교회 쇠퇴의 원인을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교회가 구원을 너무 한 순간의 성취로만 가르치고, 구원을 로 제시하는 데 게을리하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가장 오용된 신학 개념이 루터의 칭의개념이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완성되고 성취되는 것처럼 오해되고 오용되어 왔다.

 

그러나, 루터가 칭의개념을 쓰는 이유는 그 당시 가톨릭의 잘못된 가르침과 교권(교황권)에 대한 반발과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루터 당시 구원은 교회와 교황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구원은 교회와 교황이 제시하는 어떠한 행동을 잘 따르면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대표적인 예가 면벌부이다. 그 당시 교회는 교회에서 판매하는 면벌부를 사면 구원이 임하는 것처럼 가르쳤다.

 

루터의 칭의개념은 그 당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루터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교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은혜에 의한 선물이지, 중간의 누군가가, 즉 교회가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뜻이다.

 

정말로 훌륭한 가르침이다.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심지어 복음서에서도 등장하는 경고이지만, 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교회는 계속하여 거짓 교사와 거짓 교훈에 몸살을 알아 왔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거짓 교훈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훈에 맞서 참된 복음/선한 가르침을 전하라고, 그들과 맞서 싸워 진리를 지켜내라고 격려하고 있다.

 

지금도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 내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가르침 때문이다. 적이 교회 바깥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어려움은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을 선한 교사로 위장하여 선량한 교인들을 꾀해 자신의 탐욕을 채우며 이득을 취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러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선한 교사들과 선한 가르침이 거짓 교사들과 거짓 가르침에 의해 도리어 핍박을 당하고 내몰림을 당하기도 한다. 비극이다.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구원이란 한 순간의 성취가 아니라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대개 세 단계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칭의(justification)-성화(sanctification)-영화(glorification)가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루터에 의해서 칭의개념에는 익숙하나, 성화와 영화의 개념에는 익숙하지 않다. 특별히 한국 개신교가 그렇다. 여기서 칭의는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s)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권은 구원의 완성, 완전한 구원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이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은 성숙하는 단계(성화)를 거쳐, 구원의 완성이 영화에 이른다. 여기서 또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세 단계가 뚝뚝 끊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길(way)이다.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상, 인간의 인식이 가지는 한계상, 그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부르는 것뿐이다.

 

구원이란 지난한 길(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에 위험하기도 하고 필요한 것도 많다.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과 동료 그리스도인들(fellow Christians)이 없으면 그 길을 완주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끝까지 잘 가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간구하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란 교회 일 열심히 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그 길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어가는 자를 말한다. 우리는 대개 교회의 일꾼을 오해한다.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교회의 행정이 잘 돌아가고,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교회의 일꾼에 대한 매우 얕은 이해이고, 건강하지 못한 이해이다. 교회의 일꾼을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교회의 일꾼이 교회 일을 하다가 탈진하거나 시험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일꾼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이다. ,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칭의로 시작한 구원의 길을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다음의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한다. 좋은 일꾼은 믿음의 말씀좋은 교훈으로 만들어진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성경에 대한 관심과 깊은 이해가 없으면 좋은 일꾼으로 성장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는 갓난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지 않으면 성장하기는 커녕 죽을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이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가르침이 동시에 들어와 있다. 복음서에 말하는 알곡과 가라지가 논밭에 함께 자라는 것과 같다. 알곡을 지키겠다고 가라지를 다 뽑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라지 뽑아내려다 알곡까지 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라지에 대한 심판은 말씀에서처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안타깝고 억울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은 가라지는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고, 가라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가라지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면 결국 가라지만 좋은 거다. 가라지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가라지는 그냥 놓아두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성경이 전하는 진리의 선한 가르침(복음)을 힘써 배워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경건의 연단을 즐겨야 한다. '연단하다'는 헬라어 귐나조의 번역인데, 이는 운동선수처럼 연단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말한다. 운동 선수가 자신이 하는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리고 자기가 하는 운동을 즐기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연단은 헬라어 유세베이아의 번역인데, ‘좋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세베이아두려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유세베이아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을 뜻한다.

 

다시 말해, ‘경건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을 말한다. 우리는 평소에 이것을 연단,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가? 대개 우리는 두려움을 가질 때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 보다는 나쁜 두려움, 어두운 두려움을 갖는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범죄한다. 대개 사람들이 엉뚱한 죄를 범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자기 삶이 어떻게 될까바, 두려워서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한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이웃의 삶을 파괴한다.

 

경건이란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신다는 믿음, 즉 경건한 신앙을 갖는다면, 눈에 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 주고 이웃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바울은 경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허탄한 신화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경건을 연단하기 보다, 허탄한 신화를 좋아한다. 성공과 출세와 부와 명예에 관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사모하고 연단한다. 결국, 사람들이 성공, 출세, , 명예에 대한 허탄한 신화를 꿈꾸는 이유도 결국 경건을 사모하지 않아서,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다른 것을 두려워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허탄한 신화를 꿈꾸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경건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길 바라신다. 경건의 연단은 범사에 유익하다. 결국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의 연단을 즐기는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오직 소망을 주님께만 두어야 한다. 소망은 내적 기쁨의 원천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일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과 같은 내적 에너지이다. 그 기쁨은 소망에서 온다. , 우리가 소망을 어디에다가 두고 있는지에 따라서 기쁨이 일시적이냐 영원하냐가 갈린다.

 

현대인들의 기쁨은 매우 짧다. 냄비와 같다. 일시에 기뻤다, 일시에 기쁘지 않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정신적 장애가 심하다. 조울과 우울을 짧은 시간에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을 하거나 어떠한 것을 관람할 때만 기쁘고, 뒤돌아서면 기쁘지 않다. 참 애처롭다. 그들이 소망을 너무 감각적인 눈 앞에 있는 것에만 두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어보면 좋겠다. ‘인생의 낙이 어디에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소망을 자식(가족/아내나 남편에게 두는 사람은 별로 없다.)에게 두거나, 재물에게 두거나, 건강에게 두거나, 친구에게 둔다.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에 둔다. 물론, 이러한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위에서 열거한 소망들이 모두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에게 소망을 두었다가 자식이 잘 되지 못하면 기쁨()을 잃어버리고, 재물에 두었다가 재물이 사라지면 기쁨을 잃어버리고, 건강에 두었다가 건강을 잃어버리면 기쁨을 잃어버리고, 친구에게 두었다가 친구가 떠나면 기쁨을 잃어버린다.

 

소망을 주님께 둔다는 것은 길을 가는 동안 길 위에서 만나는 어떠한 것에 소망을 두는 게 아니라, 가는 길의 끝에 있는, 구원의 완성이신 주님께 소망을 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주님께 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그 길을 걸어가다 낙망하거나 머무르지 않고, 항상 기뻐하며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에 맞서서 많은 것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구원에 대한 개념부터 바꾸어야 한다. 구원은 일순간의 성취가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동료 그리스도인(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 길은 멀고 험한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교회의 행정이 잘 돌아가고,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는 개념보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 ,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칭의로 시작한 구원의 길을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걸어가는 자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경건의 연단을 즐기며, 오직 소망을 주님께만 둔다. 그래야 그 길을 잘 걸어가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맡겨진 복음  (0) 2019.07.18
행복한 교회  (0) 2019.07.15
환대와 감사의 향연  (0) 2019.07.08
성경과 그리스도인  (0) 2019.07.03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0) 2019.06.2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8. 15:56

환대와 감사의 향연

(요한계시록 3:20)

 

사건이 벌이지고 난 다음에,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한다. 사건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삶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사건은 없다. 사건 자체는 의미가 없다 할지라도, 사건에 휘말린 사람은 그 사건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의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람의 아주 고유한 특성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그리스도인)은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그 사건의 의미를 하나씩 발견해 간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예수 사건의 의미를 발견해 가면서 참 신비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 신비의 중심에 성찬례가 있다.

 

성찬례(성만찬)’는 간단히 말해서 공동식사이다. 예수의 일대기에서 공동식사를 빼놓고는 그의 삶을 논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함께 교제동아리’(로완 윌리엄스의 용어)를 세웠다. 요즘 말로 하면, ‘같이 밥 먹자라며 사람들을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했고, 또는 사람들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환대를 뜻한다. 원수랑은 밥을 먹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하여 마음을 열 때의 궁극적인 수단은 함께 밥 먹는 것이다. 또는 밥을 함께 먹다 보면 마음이 열리기도 한다. 아무튼, ‘함께 밥 먹기환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 등 고위 관리층에게 예수가 환대를 받지 못했던 이유가 매우 아이러니하다. 예수가 그들에게 환대 받지 못한 이유는 예수가 그 사회에서 천대 받던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식사를 하며 그 천대 받는 사람들을 환대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오는 데, 그것이 환대의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이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 그렇지만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아. 삭개오는 엉금엉금 올라갔어요, 뽕나무 꼭대기로 올라갔어요. / 내려와요 내려와요 착한 삭개오 예수님이 아래에서 부르셨어요 삭개오는 불이 나게 내려왔어요 예수님을 제 집으로 모시었어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삭개오 찬송이다.

 

어린이 찬송에는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을 매우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성장하여서 본 그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고 기이한 이야기였다. 삭개오는 로마 제국에 부역하는 세리로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자조차도 배제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환대했다. 삭개오는 예수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했고,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셨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고, 거기에는 구원이 선포되었다.

 

성경이 예수의 환대 사건(식사 사건)을 계속하여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함이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할례를 받은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 아니다. “예수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이다!”(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76).

 

예수는 십자가 위에 달려 죽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식사에서 나눈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매우 신비한 선언을 하신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2:19,20).

 

떡과 포도주는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게 될 예수의 살과 피를 말하는데, 예수에게 닥치게 될 그 죽음이 희망의 문(구원의 문)’을 열게 된다고 말한다(로완 윌리엄스, 81). 예수의 환대에 응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신비는 곧바로 감사로 연결된다. 예수의 초대(환대)에 응한 사람들은 그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위에 언급한 삭개오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행하는 일에 때문에 그는 언제나 그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왕따를 당했고,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공동체밖으로 내쫓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의 환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이 환대는 감사를 불러온다. 감사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행동으로 이어진다. 삭개오의 행동을 보면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삭개오는 예수의 환대를 받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행동을 감행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

 

삭개오의 이러한 행동을 회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환대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의 환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또다른 환대를 불러일으킨다. 삭개오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대 받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환대하지 못하고 그들을 착취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에게 환대를 받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삶을 살지 않고, 환대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포한다.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하는 것,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를 더해서 갚아주겠다는 것은 환대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고 선포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우리는 예수의 마지막 식사에서 드러난 구원의 신비를 통하여 그의 죽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인식한다. 그리고 예수가 그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죽음의 자리는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두려움의 자리이다. 죽음의 자리는 존재의 부재를 경험하는 자리이다. 죽음의 자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진 흑암의 자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사건을 통해서 그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성찬례의 어원은 유카리스트이다. 유카리스트는 감사를 뜻한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성찬례는 감사의 표현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깊은 어둠을 경험하는 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 죽음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체이다.

 

성찬례는 환대와 감사의 향연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예수의 살과 피를 통한 식사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성찬례를 그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에게 환대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 환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 자신과 세상에 선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에게 환대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예수의 환대의 자리로 초청하기 위함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예수의 살과 피를 통한 식사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깊은 어둠을 경험하는 중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용기를 내고 힘을 내고 담대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환대와 감사의 향연을 펼친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도 환대와 감사의 향연을 펼친다. 환대와 감사만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환대를 경험하여 감사의 자리에 날마다 나오는 그리스도인은 환대와 감사를 통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된다.

 

지금 이 시간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주님께 문을 열고, 환대와 감사의 향연을 즐기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교회  (0) 2019.07.15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0) 2019.07.11
성경과 그리스도인  (0) 2019.07.03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0) 2019.06.24
세례란 무엇인가?  (0) 2019.06.1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3. 07:58

성경과 그리스도인

(디모데후서 3:16-17)

 

작년(2018년) 2월경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우리 교회를 출석하였던이자경 자매는 남미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유럽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이자경 자매는 여행 중에 제 설교를 꼬박꼬박 챙겨서 듣는답니다. 그리고, 종종 저한테 엽서도 보내고, SNS 메신저로 근황을 알리고 이런 저런 질문도 합니다. 아래의 글은 이자경 자매가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에 비추어 우리 교회에 대하여 느낀 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내온 편지입니다.

 

“목사님 제가 북미 남미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이게 틀릴 수도 있어요. 근데 제가 교회에 대해서 느낀 거는 옛날에 개발도상국 시기에 교회는 그 사회에 확실히 물질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는 게 정말 많았어요. 왜냐하면 선진국에서 재정적인 지원과 문화적인 경험을 가지고 후진국에게 많는 도움을 줬잖아요. 그래서 콘서트나 집회같이 사람들 많이 모이고 하니까요. 그래서 교회가 그 사회 제시해 줄 수 있는 게 선진 문화로 여겨졌는데, 현재 선진국의 교회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더 세련된 문화를 다 돈으로 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개발도상국의 교회에서 행사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건데 주님은 모르고 행사에만 집중했을 때, 그리고 그거를 그냥 사람들 의식 선에서 좋게 받아들이고요.

 

그 이상의 신앙적 발전이 없어서 지금은 자본이나 또 약간 팬시해 보이는 사상(낙태, 동성애 등)에 무너진 거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부자 나라 사람들이 엄청 필요한 게 있잖아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인정과 사랑과 정말로 나를 지켜 줄 것 같은 공동체. 그런 게 되게 필요한데, 세화교회가 샌프란시스코 중심에 있잖아요. 그래서 더욱 그런 쪽으로 잘 가는 거 같아요.

 

뭐라 해야 되지. 이런 말 해도 되나요? 선진국형 교회?ㅎㅎ 이 교회가 잘 났다 이게 아니고, 정말 성경을 들여다보고 말씀을 핵을 짚고 이런 거죠. 외형적으로 불어나는데 신경 쓰지 않구요.

 

그래서 항상 목사님 설교와 초빙 오시는 분들 설교를 들어보면 세화 교회는 성경의 핵을 파고 드는 그런 문화(?)가 잘 되어 있구나라는 걸 느껴요. 그래서 좋아요.ㅎㅎ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자경 자매는 우리 교회를선진국형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 교회에 대하여 이러한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본, 북미와 남미,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며 경험한 교회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제시한 우리 교회에 대한 이자경 자매의 평가는 귀기울여 들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개발도상국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자리는 선진국입니다. 개발도상국 시기의 교회와 선진국 시기의 교회의 모습은 같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발도상국 시기 교회의 선교전략과 선진국 시기 교회의 선교전략이 같을 수 없습니다. 개발도상국 시기에는 물질적 지원과 문화적 지원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 수 있었지만,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지원과 문화적 지원은 더 이상 통하는 선교의 도구가 아닙니다. 이미 사회 안에서 충분히 물질적 풍요와 문화적 다양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간절히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을 위에서 이자경 자매가 정확히 짚었습니다. “인정과 사랑과 정말로 나를 지켜 줄 것 같은 공동체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진검승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도 위에서 이자경 자매가 잘 짚어주고 있죠. “성경을 들여다보고 말씀의 핵을 짚는 교회의 문화가 그것입니다.

 

선진국에 사는 사람일수록 외롭습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문화 체계가 사람을 그렇게 외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인정과 사랑을 주며, ‘나를 지겨 줄 것 같은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나 문화적 자원을 통해서 사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성경의 말씀으로 사람을 이끌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딤후 3:16-17).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왜 내가 그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사건의 휘말림의 의미와 결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사건에 휘말려서 그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사건의 전말을 살피고, 법정 다툼을 벌이기 위해서 법전을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성경을 가장 안 읽는(듣는)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예전(개발도상국시대)에는 교회의 행사가 가장 재밌는 문화행사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주변에 재밌는 문화행사(여가문화)가 많습니다. 교회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전(밥 한 끼 먹는 게 힘든 시절)에는 교회에 나오면 밥도 주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교회가 아니어도 밥 먹을 데가 많고, 교회가 아니어도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쌀 교인이라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쌀을 주니까, 그거 받으러 나온 것이죠. 그렇게라도 와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선진국에서 쌀 준다고 교회 나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그 쌀은 정부에서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물질과 문화가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갑니다.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신자유주의/시장주의)는 과학기술을 도구 삼아서 각 사람을 떼어놓고, 각 사람을 시장 삼았기 때문입니다. 편해지기는 했지만, 인정과 사랑은 없어졌고, 존재가 더 불안해졌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사생활은 현대 사회에 가장 중요한 윤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과 사생활을 존중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그것을 하지 못하면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을 외롭게 만듭니다. 자기의 짐을 다른 누구에게 지울 수 없습니다. 각자의 삶을 각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죽는 것도 개인의 일이고 사생활이다라고 말이죠.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 결혼식장에서 가정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찍어내는데, 장례식장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짧게 애도하고 맙니다.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지나면, 마치 그 사람은 존재한 적이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갑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는 것도 외롭고, 죽는 것도 외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있고, 자기를 지켜줄 공동체를 간절히 찾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단 사이비 집단이 더 판을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 선진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고, 다른 것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진검 승부를 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으로는 안 됩니다. 이미 물질과 문화의 풍요로움이 인간의 마음,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판명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진검 승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 진검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 어느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영혼을 의롭게 합니다. 요즘 그 어떤 것이 나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인도합니까? 그저 나를 시장(market) 만들어서 나한테 무엇인가 빼먹으려만 하죠.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고, 누군가에게 착취당하면서 살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삽니다. 구조 자체가 악합니다. 그렇다보니, 그 악에 노출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겁니다. 선한 일을 하지 못하고, 결국 악한 일을 합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만들어 줍니다. 성경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선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성경을 암송하시고, 필사하십시오.

 

요즘엔 성경을 직접 들여다 보는 것보다 설교자의 설교 듣는 일을 많이 합니다. 설교 많이 듣는 것을 통해서,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물 속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수영을 배워보겠다고 하는 무모한 일에 불과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서 수영 강사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여야 수영을 배우는 겁니다. 그런데, 물 속(성경)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수영 강사(설교자)의 지시만 듣는다면, 그 사람이 수영을 잘 하게 될까요?

 

우리 교회가 선진국형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선진국형교회를 세워 나가길 원합니다. 인정과 사랑이 넘치고, ‘나를 지켜줄 것 같은 공동체를 세워나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을 들여다보고 말씀의 핵을 짚는 교회의 문화가 잘 정착되기를 원합니다.

 

이자경 자매의 눈에는 우리 교회가 그러한 것을 잘 하고 있는선진국형 교회로 보인 모양입니다. 그런 통찰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 참 고마운 일이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야 하고,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하고 있다는 자부심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며 더욱더 분발하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세화 시대, 세화 파이팅!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24. 14:49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로마서 6:3-4)

 

지난 시간 세례란 무엇인가?’를 통해 세례의 의미를 짚어 보았다. 우리는 세례를 매우 가볍게, 또는 이기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냥 교회의 멤버십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를 뜻하거나, 또는 세례를 통하여 내 죄가 씻김을 받고 구원 받았다는 것에 대한 징표로 생각한다. (나 세례 받은 사람이야! 1) 나 이 교회에 멤버십을 가지고 있어! 2) 나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이야!)

 

물론 세례는 그러한 의미도 있다. 그러나, 세례가 갖는 궁극적 의미는 나는 이제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를 생각할 때, ‘휘말리다(being swamped)’라는 동사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건에 휘말린다는 것은 그 사건과 더불어 내 인생의 살고 죽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무엇이든지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재미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드라마를 볼 때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 그 드라마의 재미와 의미를 온전히 체득할 수 없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드라마에 휘말리기 위해서(몰입하기 위해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드라마 시청을 한다. (애 있는 집은 애들 재워 놓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드라마를 시청하며 몰입한다. / 주부는 애들 학교 보내 놓고, 남편 출근시켜 놓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드라마에 몰입하여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물며, 예수 사건에 휘말리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union/united)’하게 되는 신비를 이야기한다. 세례는 단순히 멤버십 획득과 구원 획득의 징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연루되고 휘말리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세례를 통하여 내가 이제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만큼 밋밋한 신앙생활도 없다. 그러나, 예수 사건에 한 번 제대로 휘말리고 나면 예수 사건에 휘말려 살아가는 것보다 흥미진진한 삶이 이 세상에 없으며, 그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없다 것을 알게 된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것이 어떠한 삶인지 밭에 감추인 보화를 통해 알려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로서, 예수처럼 산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그리스도인)은 예수가 했던 일을 그대로 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 가지(삼중직)로 이야기해 왔다. 예언자, 제사장, 왕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우선 예언자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네 개의 대선지서와 12개의 소선지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열왕기상하에 나오는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이라는 것이 단순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준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렇게 피가 토하도록 외친 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한결같다. “너희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무엇이 되라고 부르셨는지 모르느냐? 너희는 여기 온갖 불평등과 불의와 타락으로 가득한 네 사회 속에 평안히 앉아 있구나. 너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정말 잊었느냐?”(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36).

 

그러므로, “예언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부름 받은 본래의 모습이 되도록 늘 도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 (로완 윌리엄스, 36)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자가 되어 주고 있는가? 예언은 비난이나 잔소리가 아니다. 예언은 서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는 따뜻한 사랑이다. 예언은 우리를 기본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존재의 이유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이 예언의 일을 게을리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정, 그리고 우리의 교회 공동체는 산으로 간다.

 

둘째로, 제사장의 역할을 보자. 이것은 루터의 만인사제직설과 함께 약간 오해를 받는 역할이다. 루터가 왜 만인사제직설을 주장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좀 더 깊은 논의는 최주훈 목사의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책에 나오는 만인사제직과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라는 글을 참고하면 좋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는 놓은 사람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희생제물을 통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한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산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시킨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가장 잘 못하며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멀리한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리 놓는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러신 것처럼 자기를 희생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왕의 직분을 보자. ‘이라고 하는 개념은 많이 오염되어 있다. 사람들은 왕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왕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왕에 대한 오해이다. 왕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개념은 그런 게 아니다.

 

왕은 하나님이 가진 권세의 대리인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왕이 선한 왕인지 악한 왕인지에 대한 판가름의 기준은 이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왕의 선함과 악함이 판단을 받았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대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그러나, 참된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한다.

 

왕은 하나님의 법(율법)이 사회에서 현실화되도록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법은 정의이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통치하는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가 현실화되도록 그 권세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왕권을 가진다는 것은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존재로 살 수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왕의 소명은 하나님의 정의에 맞추어 우리의 삶과 인간 환경을 가꾸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나아가 세상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맺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 곧 은혜롭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증언하는 일이다. (로완 윌리엄스, 40).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람들은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아왔던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일은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에 관한 것이다. 1)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예언의 일을 하며 산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를 외친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외친다.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제공해 주는 삶을 산다.

 

2)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우리는 다리를 놓은 사람들이다. 화해를 이루고 다리를 놓고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산다. 3)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왕권을 수행한다. , 하나님의 정의를 현실화하려고 노력한다.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삶, 그 자유로 인간 사회의 삶을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와 정의가 반영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일 하는 삶을 산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가 마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인양, 예수 사건에 전혀 휘말리지 않은 사람인양, 예수 사건에 휘말린 적이 없는 양,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 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으나, 여전히 죄인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알아서 최선을 다했는데 생각만큼 성과가 없거나, 또는 자기의 정체성을 잘못 사용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자의 삶, 제사장의 삶, 왕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서로를 일으켜 세워 보자. 실패하는 게 죄인이 아니라, 실패했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게 죄인이다. 서로 주저 앉히지 말고, 서로 일으켜 세워주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이니까.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대와 감사의 향연  (0) 2019.07.08
성경과 그리스도인  (0) 2019.07.03
세례란 무엇인가?  (0) 2019.06.10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  (0) 2019.06.07
헨 (일치/하나됨)  (0) 2019.06.0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10. 08:41

세례란 무엇인가?

(로마서 6:3-4)

 

성령강림주일이다. 이런 날, 이러한 시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생각해 본다. 세례는 성령의 사역이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본격적인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은 매우 형식적으로 메말라가고 있다.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가 사라진 것 같다. 성령이 임한 성령강림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기대를 품고 예배에 나왔는가.

 

위에서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정현종 선생님의 말투가 그대로 담겨 있는 문장이다. 약간 익살스러운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어마어마라는 발음을 할 때의 특유한 말투가 떠오른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아주 짧은 시이다. 현대인들의 삶을 표현한 시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외따로이 외롭게 산다. 외롭다 보니, 사람에 대한 갈망이 마음에 간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섬에 가는 게 쉽지 않다.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이 어렵다. 무섭다. 감당하기 벅차 한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하느니, 그냥 외롭게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갈수록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인생의 딜레마다.

 

한 사람이 오는 게 어마어마한 이유는 그 사람이 올 때,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오면 그 사람의 인생의 일부분만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고 버거운 일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리고, 섬처럼 산다. 그래서 외롭다. 대부분 이렇게 산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로운 방식을 일러준다. ‘바람의 마음을 흉내 낸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바람의 마음이란 한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이해하고, 그의 삶 속에 그야말로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을 말한다. 바람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지만 우리의 온 존재를 어루만진다. 바람은 없는 듯이 우리의 존재 안에 존재한다. 바람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이 우리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런 바람의 마음을 우리가 지닐 수만 있다면, 한 사람과의 만남은 고통이 아니라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성령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3). 그렇게 바람 같은 성령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주변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조롱까지도 당할 정도였다. 성령의 임재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는 이처럼 강력한 임팩트를 가져왔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하는데,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이다. , 능력은 강력한 폭발력이다. 한 형태를 완전히 부수고 다른 형태로 바꾸는 힘이다.

 

이것은 예수 사건에 적용해 보면, 성령의 강림,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로서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자신들에게 오는 그 어머어마한 일을 온 생명을 다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의 마음, 성령의 마음은 이렇게 온 마음과 온 생명을 다한 환대를 창조해 낸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외롭게 섬처럼 사는 이유와 세상을 바꾸는 능력(두나미스/다이나마이트)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관문인 세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이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교회를 다니다 세례를 받으라라 하니까, ‘세례라는 것을 받아야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나보다, 또는 교회법을 보니, 세례를 받아야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일종의 교회 내의 프로모션이 가능하니까,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멤버십의 획득또는 멤버십의 강화정도로 생각하며 세례를 받는다.

 

게다가 요즘에는 자기가 받은 세례에 대하여 갱신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 교회마다 세례 받는 이가 드물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탄생하지 않고, 교인의 수평이동이 심하다. 마치, 아기의 탄생이 없는 시골 마을 같고, 귀농한 인구만 늘어나는 것과 같다. 아이가 태어날 때, 거기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인생에 대한 환희와 생명에 대한 경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넘쳐나는 법이다. 세례 예식이 적어도 일년에 한 번(주로 부활절) 있어야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세례 받는 이를 축하하면서 내가 받은 세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세례를 갱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각 교회에서 이러한 풍경을 보기 힘들다. 우리 모든 교회의 과제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형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례란 몸을 물속에 잠그거나, 머리에 물을 붓거나, 머리 또는 몸에 물을 뿌리는 행위를 말한다. (침례교는 몸을 물속에 잠그는 방식을 고수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침례라는 용어 사용하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은 침례보다는 머리에 물을 붓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세례는 그러한 형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련된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를 구하는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지금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시는 중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으로 나아가시면서 그것을 세례라고 표현하신다. ,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면서 그것에 푹 잠기고’, 그것에 휘말리거나 빠져드는것처럼 말씀하신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과 연결된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멤버십을 갖기 위한 입단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심연, 그리고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현실에 휘말린다(being swamped)”는 개념이다. (로완 윌리웜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24).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예수의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패더디해서 세례를 표현하면 이런 것이 되겠다. 세례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에 휘말리는 인생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을 두고, 그만큼 거리를 두고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계층을 만들고, 담을 쌓고, 경계를 지어, 삶의 구역을 정비한다. 우리는 이것을 사유재산, 개인주의, 또는 프라이버시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살다보니, 현대인들/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바람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도 필경 환대가 될 수 있듯이, 성령을 받는다면,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세례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다. 성령이 임재하기 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것을 구하기도 했고, 예수를 배반하기도 했고, 예수의 죽음을 보고 도망치기도 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그 갈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후,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 바로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모든 인생을 예수 사건의 휘말림에 바쳤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 (받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간다. 세례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로산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삶이다. 그 삶에 참생명과 영광이 있다. 이것을 믿는 자, 그들의 세례는 필경 예수 사건의 환대가 될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과 그리스도인  (0) 2019.07.03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0) 2019.06.24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  (0) 2019.06.07
헨 (일치/하나됨)  (0) 2019.06.03
부흥의 원리  (0) 2019.05.30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7. 07:11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

(사도행전 2:1-13)

 

매우 영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영적이라는 말은 역사의 심층적인 영역을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에는 눈에 안 보이는 영역이 있는데,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알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지 않게 된다.

 

종교는 표층적 종교가 있고, 심층적 종교가 있다. 표층적 종교는 기복신앙을 기본으로 해서 물질적/육체적 풍요를 갈망하는 선에서 머물지만, 심층적 종교는 그것을 넘어 역사의 심층적인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탐구한다. 흔히, 고등종교라 불리는 종교들은 심층적 종교이기 때문에 기복신앙을 넘어 진리를 추구한다. 기독교는 정말 놀라운 심층 종교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역사의 심층에서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신 지 계시(revelation)’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시에 대한 반응은 둘로 나뉠 수 있다. 본문에서도 드러난다. 성령의 강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워하는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보고 조롱하는사람이 있다. 그 역사를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죽하면,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용어를 써서, 그러한 현상을 설명하려 하겠는가.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또는 보고 놀라워하는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 큰 복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하나님의 큰 일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큰 일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매주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을 일상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의 예배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예배의 질은 같을 수 없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고 놀라워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마음으로, 또 그러한 하나님의 큰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하여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오순절이 이르매에서 이르다는 말은 헬라어로 숨플레로오인데, 이는 꽉 차다의 뜻을 지닌다. 누가복음 55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시고”(9:5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시기로 결심한 이유를 적고 있다.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간다. 왜냐하면, ‘승천하실 기약이 차갔기 때문이다.

 

승천은 물리적인 뜻이 아니다. 슈퍼맨이 대기권을 뚫고 저 우주로 날아가는 것과 같은 상상을 하면 안 된다. ‘승천은 예수님이 하늘에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상을 생각해 보면 쉽다. 이무기가 지상에서 천년의 세월을 보내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이무기의 승천은 이런 뜻이다. ‘이무기가 이제 하늘에 받아들여졌다.’ 이무기가 땅에서 천년을 보내고 용이 되면 뭐하나? 하늘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용이 된 들, 헛고생인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하늘에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이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매우 신학적인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도, 하나님과 그 본질(homo ousious/호모 우시우스)이 같다는 뜻이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물학적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승천의 신학적 의미를 잘못 알면, 기독교를 우스운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승천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중 첫 번째 사역이 바로 성령을 보내신 일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사역으로 성령강림의 일을 하셨을까?

 

이 일은 홀연히일어났다. 홀연히는 헬라어 아프노를 번역한 말인데,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제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주권적으로 행하신 역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가 되면, 제자가 행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모든 준비를 제자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자로서 사역을 해나갈 때, 우리는 아무런 걱정과 두려움이 필요 없다. 이것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반복하여 전해지는 메시지 중 하나이다.


마태복음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누가복음 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의 결과로 성령이 임했다. 여기서 임하다는 동사는 헬라어의 에카씨센인데, ‘앉히다’, ‘왕국을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게 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은 이제 성령의 통치를 받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통치는 창세기의 기사와 연결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이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근심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창세기의 말씀은 이어서 이런 기사를 전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 인간의 죄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떠나게 만들었다. 죄가 가득한 인간의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 인간은 육신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겨우 살아야 120년을 사는 존재로 하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의 처참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승천하여 천상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를 다스리시게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영을 다시 인간과 연합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할 때, ‘에카씨센은 구약에서 주로 왕이나 하나님이 통치 보좌에 앉는 것을 나타내는데,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좌정하셨다는 것은 이제 성령이 각 사람을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을 말한다. 인간의 죄 때문에 철회되었던 성령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종말은 피조세계의 파멸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층에서 피조세계의 완성, 즉 구원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 큰일을 지금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계시다(revelation).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역사의 심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종말에 어떠한 위대한 일을 행하실 지 알려주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선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말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에 소망을 전하신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파멸당하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성령의 임재를 다시 얻게 되어 하나님의 영(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심층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미리 알고 그 영광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신적 통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현상은 언어의 상실이었다. 바벨탑 사건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죄로 인해 성령의 신적 통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 하나님의 큰일 말하는 것을 상실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옳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여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한 일들만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성령 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 정반대의 사건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아 역사의 역전을 경험하고, 언어의 혼잡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을 통해,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 기이한 일에 마음을 열어 성령에게 자기의 보좌를 내어주는 이들은 놀라움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겠지만,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에 여전히 마음을 닫는 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어떠한 부류들처럼 제자들이 새술에 취했다고 오해하며 조롱할 것이다.

 

역사의 심층에서 벌어지는 이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그리스도의 통치/성령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물질적/육체적 풍요만 바라며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세워나가느라 힘들고 어렵게 사는가, 아니면,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에 삶을 내어드리고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께 삶을 내어 맡기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제자인가?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0) 2019.06.24
세례란 무엇인가?  (0) 2019.06.10
헨 (일치/하나됨)  (0) 2019.06.03
부흥의 원리  (0) 2019.05.30
21세기 하늘나라 부부  (0) 2019.05.2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