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18. 09:22

맡겨진 복음

(딤후 2:1-13)

 

요즘 한국의 뉴스 중,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것 중 하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에 대한 법적 싸움이다. 최근 대법원에서 상주본은 국가의 것이라는 판결이 나온 이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소장자 배익기씨와의 법적 싸움이 치열해졌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을 보면서, 그래도 한국 사회가 많이 민주화됐다는 생각이다. 예전 같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상주본을 국가에서 몰수했을 텐데, 그래도 법적인 싸움을 벌여가며 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가 많이 발전했다. 대한민국이 계속하여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응원한다.)

상주본이 학술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해례본이기 때문이다. 상주본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해 놓은 책이다. 그래서 가치가 높다. 항간에는 그것의 가치가 1조원 정도 될 거라해서, 배익기 씨는 그 가치의 10분의 1, 1천억원을 주면 국가에 내놓겠다고 맞서는 중이다. (국가와 문화재청, 그리고 학자들과 국민들, 또한 배익기 씨, 모두가 행복한 해법이 등장하여,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

 

상주본이 골동품 상의 손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가치는 사람에 따라 매우 상대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도 일맥상통한다. 상주본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몰라본 사람은 무지에 휩싸여 자기의 가치 또한 별로인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상주본 때문에 국가와 한 개인 법적 싸움을 하는 이유는 상주본이 지니고 있는 가치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놓아두고 세상과 싸우는 이유도 복음의 가치 때문이다. 복음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 골치 아픈 싸움을 이어가겠는가.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강해야한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은혜 가운데 강하라는 말을 한다. ‘강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엔뒤나무권능을 부여받다’, ‘힘을 받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게서 권능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싸움을 이어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싸움을 결코 이어갈 수 없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4:16).

 

무엇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2). ‘부탁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쑤의탁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긴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도 맡겨서 그들이 그 복음을 계속해서 퍼뜨려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상주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가치를 아는 원작자는 그것의 가치를 아는 또다른 누구에게 잘 맡겨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상주본은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 계속 맡겨지다가 어떠한 일을 통해 골동품상의 손에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중간에 그것의 맡김이 약간 허술해졌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그것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은 그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지는 것이고, 맡겨진 복음은 그 가치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세대를 거쳐 맡겨진다. 상주본을 소장한 배익기씨의 삶은 온통 상주본에 얽혀 있을 것이다. 상주본을 소유한 동안 그는 자기의 사생활에 얽히거나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오직 상주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인생의 전부가 휘말려 있을 것이다.

 

복음을 맡은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맡은 자의 삶을 좋은 병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3). 그러면서 병사로 복무하게 되면 자기 사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군생활 할 때, 참 어려웠다. 그때 아버지는 암투병 중이셨고, 아버지 병간호 하시던 엄마마저 간에 고름이 차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셨다. 나는 장군의 배려로 45일간 특박을 받아 집에 와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엄마를 정성껏 간호했다. 삼성병원의 의료진들은 엄마가 곧 죽을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의식이 별로 없었고, 간에 꽂아 놓은 튜브를 통해서 고름이 계속 흘러 나왔고, 엄마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다 받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45일간 엄마 곁을 지키다 부대로 복귀했다. 그런데, 내가 거의 넋이 나가 있으니까, 장군이 나를 불러서 서울로 보내줄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제대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제대할 때까지 끝까지 장군님을 모시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육군본부에 남아 계속 군복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 (45일 동안 엄마를 정성스럽게 간호하고 부대 복귀 한 이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간의 고름이 다 빠진 것이다. 의료진들이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회복하셨다.)

 

병사로 복무하는 기간 동안 병사는 자기 사생활에 얽매일 수 없다. 완전히 제대하지 않는 이상, 병사는 병사의 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음을 맡는 일은 그것을 맡겨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수고를 바울은 농부에 비유해서 말하는데, 거기에 쓰인 헬라어 코피아노(수고)’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은 무엇인가? 이 복음도 상주본처럼 실체가 있다. 복음은 말이 아니다. 실체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은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8)이다. 배익기씨가 상주본에 얽매여 자기의 사생활을 잊어버린 이유는 상주본이 자신에게 어떠한 실제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상주본의 경우는 이다.

 

그리스도인이 맡겨진 복음을 위하여 좋은 병사가 되어서 자기의 사생활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 복음을 지켜내고 그 복음을 다른 충성된 이들에게 전달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10).

 

배익기씨가 상주본에 모든 삶을 걸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주장대로 이루어진다면) 1천억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모든 삶을 걸고 있는 이유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 복음상주본과 비교하며 설명하긴 했지만, 사실, 복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 가치를 실제로 알아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좋은 병사(군사)’가 될 수밖에 없다. 맡겨진 복음을 지켜내고, 또 계속하여 다음 세대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은 허황된 말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실제 인물이다. 복음을 맡는다는 것은 한 실체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하나님에 의하여 부활했다. 그래서 복음을 맡은 자는 바울의 말처럼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다(11). 또한 참으면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다(12). 우리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복음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 복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지 않으면 아예 맡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셔서, 그것을 맡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 그 복음을 맡은 사람은 그것에 휘말려 들어 자기의 사생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씀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생활에 얽매여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일 뿐이다. 복음의 가치를 안다면, 그 가치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그 가치를 아는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밖에없다. 그것이 복음의 가치를 아는 자들의 숙명이다.


복음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그 맡은 것을 지켜내고 또한 맡기기 위해서 받는 고난은 말로 표현해서 고난이지 전혀 고난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것이 고난일지 모르지만, 그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다. 기쁨이고 감사이다. 이게 바로 복음의 신비이다. 그러니, 고난 받을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맡겨진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