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15. 14:43

행복한 교회

(딤전 5:1-16)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지금은 에베소교회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유추해보자면, 에베소교회는 꽤 규모가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본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대인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대인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관계로 인한 어려움이 존재했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공동체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뜻이다.

 

대인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다. ‘아버지를 대하듯, 어머니를 대하듯 교회 어르신들한테 잘 해라. 젊은 여자들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이런 가르침들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보편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다.

 

도산 안창호의 삶을 보면, 참 놀라운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대인관계를 어떻게 했는가이다. 안창호에게는 혈족관이라는 게 있었다. 특별히 여성에 대한 대인관계를 조심했는데, 본인보다 나이가 많으면 어머니처럼 대했고, 본인과 나이가 비슷하면 누이처럼 대했고,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면 딸처럼 대했다. 이러한 혈족관은 불교에서 배운 것이라 한다.

 

안창호의 삶에서 놀라운 것은 독립운동하느라 가정을 떠나 오랜 세월 바깥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과의 스캔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안창호가 특별히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 본문에 보면, 과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공동체에 과부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에베소교회는 그만큼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았다는 뜻이다. 요즘은 과부라는 개념 자체도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남편을 잃고 살더라도 사회에서 그렇게 약자로 살지 않는다. 좀 외로울 뿐이지, 경제적, 법적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에는 달랐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혼자 남겨진 여인, 과부는 사회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이러한 상황은 많이 알려진 것이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본문에서 한 가지 매우 섬뜩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8).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을 믿음과 연관시켜, ‘믿음의 배반’,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에베소교회 내에 가족을 잘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이러한 말씀도 별로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사회적 통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여성가족부에서 발행된 가족 부양에 대한 인식 통계에 나타난 것처럼, 이제 부모 부양이나 가족 내 부양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부양은 가족이 하기보다 국가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리고 국가 정책이 실제로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일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대인관계나 가족과 과부를 돌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공동체가 사람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전부다. 행복한 교회는 각 사람의 행복과 직결된다. 교회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행복해야 교회 공동체도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특성 상, 집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특성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교회 구원성인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있다. 왜 그런가?

 

요즘은 많은 것을 조사하는데, 글로벌 행복 지수라는 것이 있다. 세계 각국의 행복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싱가포르 같은 아시아의 경제대국들의 행복지수가 경제 수준에 비해서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동양 나라들의 공통적인 문화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집단주의이다.


대체로 소득이 오르면 행복해지는데, 소득이 올라도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행복도가 소득이 오른 만큼 오르지 않은 데, 그 이유는 집단주의적 문화에서 부족한 심리적 자유감때문이다. “자유감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행복에 관한 연구를 행한 학자들의 견해는 이렇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행복을 만든다.” (<완벽한 공부법, 240).

 

그런데, 한국은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곳이고, 더군다나 한국교회는 교회의 집단주의적인 문화가 거기에 더해져 집단주의 문화가 더 강한 곳이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곳의 특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좋아하고, 누군가의 평가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평가하고 평가 받느라 만성적 긴장과 피로가 심하다. 하물며 한국 교회는 어떻겠는가?

 

한국 교회의 특징을 보면, 어떠한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될 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역의 방향이라든지, 아니면 신학적 견해, 또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 때문에 떠나는 비율을 매우 낮고, 대개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교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대인관계의 문제이다.

 

소득이 높은 사회일수록 집단주의 문화보다는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개인주의 문화를 선호한다. 다른 말로 해서, ‘심리적 자유감에 대한 욕구가 높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심리적 자유감의 욕구를 억압당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심리적 자유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에 나설 것이고, 그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될 것이다.

 

심리적 자유감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은 에베소교회 때에 과부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과 같다. 과부를 돌보는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어려움이 닥쳤던 것처럼, 요즘은 심리적 자유감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목회자로서 교회 구성원의 심리적 자유감을 존중하고 싶다. 교회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집단주의’, 더 심하게는 파시스트 집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더 조심해야 한다. 바깥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나는 가끔 민망할 때가 있다. 어떤 분이 교회를 안 오셔서 안부 전화를 드리면, 대개 교회 안 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다음 주에는 교회를 꼭 가겠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교회 출석때문에 전화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진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때 매우 민망하다. 내가 무슨 공산당의 지도자 동무 또는 감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그냥, 정말 목자의 마음으로 그 분의 삶을 살피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고 카톡을 하는 것인데, 교회를 안 오신 분은 교회 안 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을 자진해서 고백하실 때, 나의 마음은 매우 민망하다.

 

우리는 성경 시대를 사는 게 아니라, 21세기를 산다. 그때는 그때의 문제가 있었고, 지금은 지금의 문제가 있다. 문제는 다르지만, 그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똑같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행복은 심리적 자유감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구성원인 사람심리적 자유감을 서로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에 실패하면,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개신교회는 이 점을 더욱더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대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자유/또는 개인의 자율이다.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자유(또는 개인의 자율)이 억압을 받았다. 구원도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교황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깨 버렸다. 구원이 교회나 교황의 손, 즉 교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대해서 개인의 자유/개인의 자율을 선언한 혁명적인 일이다.

 

물론, 개인의 자유와 자율이 강조되면, 그만큼 개인의 책임도 늘어나는 법이다. 책임이 늘어나면 그만큼 스트레스도 깊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수행하고 지키느라 스트레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빼앗기고 싶어하는 현대인은 없다. 그게 현대인이 빠진 딜레마이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 , ‘심리적 자유감을 지켜주는 문화, 이것은 행복의 수준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집단주의나 파시스트의 성향을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에 저항하면서, 교회 구성원 각 사람심리적 자유감을 지켜주고 존중해 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 우리 교회는 선진국형 교회 아닌가. 다만,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담임목사로서 나는 우리 교회 각 구성원의 심리적 자유감을 존중한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안부 전화를 하더라도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마시라. 그리고 반대로, 여러분도 나의 심리적 자유감을 존중해 주시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보듬어 줄 때, 우리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행복한 교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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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