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7. 8. 15:56

환대와 감사의 향연

(요한계시록 3:20)

 

사건이 벌이지고 난 다음에,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한다. 사건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삶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사건은 없다. 사건 자체는 의미가 없다 할지라도, 사건에 휘말린 사람은 그 사건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의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람의 아주 고유한 특성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그리스도인)은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그 사건의 의미를 하나씩 발견해 간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예수 사건의 의미를 발견해 가면서 참 신비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 신비의 중심에 성찬례가 있다.

 

성찬례(성만찬)’는 간단히 말해서 공동식사이다. 예수의 일대기에서 공동식사를 빼놓고는 그의 삶을 논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함께 교제동아리’(로완 윌리엄스의 용어)를 세웠다. 요즘 말로 하면, ‘같이 밥 먹자라며 사람들을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했고, 또는 사람들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환대를 뜻한다. 원수랑은 밥을 먹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하여 마음을 열 때의 궁극적인 수단은 함께 밥 먹는 것이다. 또는 밥을 함께 먹다 보면 마음이 열리기도 한다. 아무튼, ‘함께 밥 먹기환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 등 고위 관리층에게 예수가 환대를 받지 못했던 이유가 매우 아이러니하다. 예수가 그들에게 환대 받지 못한 이유는 예수가 그 사회에서 천대 받던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식사를 하며 그 천대 받는 사람들을 환대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오는 데, 그것이 환대의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이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 그렇지만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아. 삭개오는 엉금엉금 올라갔어요, 뽕나무 꼭대기로 올라갔어요. / 내려와요 내려와요 착한 삭개오 예수님이 아래에서 부르셨어요 삭개오는 불이 나게 내려왔어요 예수님을 제 집으로 모시었어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삭개오 찬송이다.

 

어린이 찬송에는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을 매우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성장하여서 본 그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고 기이한 이야기였다. 삭개오는 로마 제국에 부역하는 세리로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자조차도 배제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환대했다. 삭개오는 예수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했고,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셨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고, 거기에는 구원이 선포되었다.

 

성경이 예수의 환대 사건(식사 사건)을 계속하여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함이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할례를 받은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 아니다. “예수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이다!”(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76).

 

예수는 십자가 위에 달려 죽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식사에서 나눈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매우 신비한 선언을 하신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2:19,20).

 

떡과 포도주는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게 될 예수의 살과 피를 말하는데, 예수에게 닥치게 될 그 죽음이 희망의 문(구원의 문)’을 열게 된다고 말한다(로완 윌리엄스, 81). 예수의 환대에 응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신비는 곧바로 감사로 연결된다. 예수의 초대(환대)에 응한 사람들은 그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위에 언급한 삭개오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행하는 일에 때문에 그는 언제나 그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왕따를 당했고,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공동체밖으로 내쫓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의 환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이 환대는 감사를 불러온다. 감사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행동으로 이어진다. 삭개오의 행동을 보면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삭개오는 예수의 환대를 받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행동을 감행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

 

삭개오의 이러한 행동을 회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환대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의 환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또다른 환대를 불러일으킨다. 삭개오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대 받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환대하지 못하고 그들을 착취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에게 환대를 받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삶을 살지 않고, 환대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포한다.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하는 것,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를 더해서 갚아주겠다는 것은 환대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고 선포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우리는 예수의 마지막 식사에서 드러난 구원의 신비를 통하여 그의 죽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인식한다. 그리고 예수가 그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죽음의 자리는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두려움의 자리이다. 죽음의 자리는 존재의 부재를 경험하는 자리이다. 죽음의 자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진 흑암의 자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사건을 통해서 그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성찬례의 어원은 유카리스트이다. 유카리스트는 감사를 뜻한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성찬례는 감사의 표현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깊은 어둠을 경험하는 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 죽음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체이다.

 

성찬례는 환대와 감사의 향연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예수의 살과 피를 통한 식사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성찬례를 그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에게 환대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 환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 자신과 세상에 선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에게 환대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예수의 환대의 자리로 초청하기 위함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예수의 살과 피를 통한 식사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깊은 어둠을 경험하는 중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용기를 내고 힘을 내고 담대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이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환대와 감사의 향연을 펼친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도 환대와 감사의 향연을 펼친다. 환대와 감사만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환대를 경험하여 감사의 자리에 날마다 나오는 그리스도인은 환대와 감사를 통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된다.

 

지금 이 시간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주님께 문을 열고, 환대와 감사의 향연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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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