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24. 14:49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로마서 6:3-4)

 

지난 시간 세례란 무엇인가?’를 통해 세례의 의미를 짚어 보았다. 우리는 세례를 매우 가볍게, 또는 이기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냥 교회의 멤버십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를 뜻하거나, 또는 세례를 통하여 내 죄가 씻김을 받고 구원 받았다는 것에 대한 징표로 생각한다. (나 세례 받은 사람이야! 1) 나 이 교회에 멤버십을 가지고 있어! 2) 나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이야!)

 

물론 세례는 그러한 의미도 있다. 그러나, 세례가 갖는 궁극적 의미는 나는 이제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를 생각할 때, ‘휘말리다(being swamped)’라는 동사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건에 휘말린다는 것은 그 사건과 더불어 내 인생의 살고 죽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무엇이든지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재미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드라마를 볼 때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 그 드라마의 재미와 의미를 온전히 체득할 수 없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드라마에 휘말리기 위해서(몰입하기 위해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드라마 시청을 한다. (애 있는 집은 애들 재워 놓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드라마를 시청하며 몰입한다. / 주부는 애들 학교 보내 놓고, 남편 출근시켜 놓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드라마에 몰입하여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물며, 예수 사건에 휘말리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union/united)’하게 되는 신비를 이야기한다. 세례는 단순히 멤버십 획득과 구원 획득의 징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연루되고 휘말리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세례를 통하여 내가 이제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만큼 밋밋한 신앙생활도 없다. 그러나, 예수 사건에 한 번 제대로 휘말리고 나면 예수 사건에 휘말려 살아가는 것보다 흥미진진한 삶이 이 세상에 없으며, 그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없다 것을 알게 된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것이 어떠한 삶인지 밭에 감추인 보화를 통해 알려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로서, 예수처럼 산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그리스도인)은 예수가 했던 일을 그대로 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 가지(삼중직)로 이야기해 왔다. 예언자, 제사장, 왕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우선 예언자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네 개의 대선지서와 12개의 소선지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열왕기상하에 나오는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이라는 것이 단순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준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렇게 피가 토하도록 외친 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한결같다. “너희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무엇이 되라고 부르셨는지 모르느냐? 너희는 여기 온갖 불평등과 불의와 타락으로 가득한 네 사회 속에 평안히 앉아 있구나. 너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정말 잊었느냐?”(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36).

 

그러므로, “예언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부름 받은 본래의 모습이 되도록 늘 도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 (로완 윌리엄스, 36)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자가 되어 주고 있는가? 예언은 비난이나 잔소리가 아니다. 예언은 서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는 따뜻한 사랑이다. 예언은 우리를 기본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존재의 이유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이 예언의 일을 게을리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정, 그리고 우리의 교회 공동체는 산으로 간다.

 

둘째로, 제사장의 역할을 보자. 이것은 루터의 만인사제직설과 함께 약간 오해를 받는 역할이다. 루터가 왜 만인사제직설을 주장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좀 더 깊은 논의는 최주훈 목사의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책에 나오는 만인사제직과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라는 글을 참고하면 좋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는 놓은 사람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희생제물을 통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한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산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시킨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가장 잘 못하며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멀리한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리 놓는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러신 것처럼 자기를 희생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왕의 직분을 보자. ‘이라고 하는 개념은 많이 오염되어 있다. 사람들은 왕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왕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왕에 대한 오해이다. 왕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개념은 그런 게 아니다.

 

왕은 하나님이 가진 권세의 대리인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왕이 선한 왕인지 악한 왕인지에 대한 판가름의 기준은 이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왕의 선함과 악함이 판단을 받았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대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그러나, 참된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한다.

 

왕은 하나님의 법(율법)이 사회에서 현실화되도록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법은 정의이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통치하는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가 현실화되도록 그 권세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왕권을 가진다는 것은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존재로 살 수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왕의 소명은 하나님의 정의에 맞추어 우리의 삶과 인간 환경을 가꾸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나아가 세상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맺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 곧 은혜롭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증언하는 일이다. (로완 윌리엄스, 40).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람들은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아왔던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일은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에 관한 것이다. 1)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예언의 일을 하며 산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를 외친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외친다.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제공해 주는 삶을 산다.

 

2)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우리는 다리를 놓은 사람들이다. 화해를 이루고 다리를 놓고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산다. 3)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왕권을 수행한다. , 하나님의 정의를 현실화하려고 노력한다.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삶, 그 자유로 인간 사회의 삶을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와 정의가 반영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일 하는 삶을 산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가 마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인양, 예수 사건에 전혀 휘말리지 않은 사람인양, 예수 사건에 휘말린 적이 없는 양,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 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으나, 여전히 죄인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알아서 최선을 다했는데 생각만큼 성과가 없거나, 또는 자기의 정체성을 잘못 사용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자의 삶, 제사장의 삶, 왕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서로를 일으켜 세워 보자. 실패하는 게 죄인이 아니라, 실패했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게 죄인이다. 서로 주저 앉히지 말고, 서로 일으켜 세워주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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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