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10. 08:41

세례란 무엇인가?

(로마서 6:3-4)

 

성령강림주일이다. 이런 날, 이러한 시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생각해 본다. 세례는 성령의 사역이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본격적인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은 매우 형식적으로 메말라가고 있다.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가 사라진 것 같다. 성령이 임한 성령강림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기대를 품고 예배에 나왔는가.

 

위에서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정현종 선생님의 말투가 그대로 담겨 있는 문장이다. 약간 익살스러운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어마어마라는 발음을 할 때의 특유한 말투가 떠오른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아주 짧은 시이다. 현대인들의 삶을 표현한 시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외따로이 외롭게 산다. 외롭다 보니, 사람에 대한 갈망이 마음에 간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섬에 가는 게 쉽지 않다.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이 어렵다. 무섭다. 감당하기 벅차 한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하느니, 그냥 외롭게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갈수록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인생의 딜레마다.

 

한 사람이 오는 게 어마어마한 이유는 그 사람이 올 때,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오면 그 사람의 인생의 일부분만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고 버거운 일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리고, 섬처럼 산다. 그래서 외롭다. 대부분 이렇게 산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로운 방식을 일러준다. ‘바람의 마음을 흉내 낸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바람의 마음이란 한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이해하고, 그의 삶 속에 그야말로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을 말한다. 바람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지만 우리의 온 존재를 어루만진다. 바람은 없는 듯이 우리의 존재 안에 존재한다. 바람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이 우리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런 바람의 마음을 우리가 지닐 수만 있다면, 한 사람과의 만남은 고통이 아니라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성령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3). 그렇게 바람 같은 성령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주변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조롱까지도 당할 정도였다. 성령의 임재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는 이처럼 강력한 임팩트를 가져왔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하는데,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이다. , 능력은 강력한 폭발력이다. 한 형태를 완전히 부수고 다른 형태로 바꾸는 힘이다.

 

이것은 예수 사건에 적용해 보면, 성령의 강림,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로서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자신들에게 오는 그 어머어마한 일을 온 생명을 다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의 마음, 성령의 마음은 이렇게 온 마음과 온 생명을 다한 환대를 창조해 낸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외롭게 섬처럼 사는 이유와 세상을 바꾸는 능력(두나미스/다이나마이트)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관문인 세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이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교회를 다니다 세례를 받으라라 하니까, ‘세례라는 것을 받아야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나보다, 또는 교회법을 보니, 세례를 받아야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일종의 교회 내의 프로모션이 가능하니까,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멤버십의 획득또는 멤버십의 강화정도로 생각하며 세례를 받는다.

 

게다가 요즘에는 자기가 받은 세례에 대하여 갱신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 교회마다 세례 받는 이가 드물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탄생하지 않고, 교인의 수평이동이 심하다. 마치, 아기의 탄생이 없는 시골 마을 같고, 귀농한 인구만 늘어나는 것과 같다. 아이가 태어날 때, 거기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인생에 대한 환희와 생명에 대한 경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넘쳐나는 법이다. 세례 예식이 적어도 일년에 한 번(주로 부활절) 있어야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세례 받는 이를 축하하면서 내가 받은 세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세례를 갱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각 교회에서 이러한 풍경을 보기 힘들다. 우리 모든 교회의 과제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형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례란 몸을 물속에 잠그거나, 머리에 물을 붓거나, 머리 또는 몸에 물을 뿌리는 행위를 말한다. (침례교는 몸을 물속에 잠그는 방식을 고수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침례라는 용어 사용하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은 침례보다는 머리에 물을 붓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세례는 그러한 형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련된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를 구하는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지금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시는 중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으로 나아가시면서 그것을 세례라고 표현하신다. ,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면서 그것에 푹 잠기고’, 그것에 휘말리거나 빠져드는것처럼 말씀하신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과 연결된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멤버십을 갖기 위한 입단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심연, 그리고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현실에 휘말린다(being swamped)”는 개념이다. (로완 윌리웜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24).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예수의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패더디해서 세례를 표현하면 이런 것이 되겠다. 세례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에 휘말리는 인생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을 두고, 그만큼 거리를 두고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계층을 만들고, 담을 쌓고, 경계를 지어, 삶의 구역을 정비한다. 우리는 이것을 사유재산, 개인주의, 또는 프라이버시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살다보니, 현대인들/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바람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도 필경 환대가 될 수 있듯이, 성령을 받는다면,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세례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다. 성령이 임재하기 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것을 구하기도 했고, 예수를 배반하기도 했고, 예수의 죽음을 보고 도망치기도 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그 갈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후,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 바로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모든 인생을 예수 사건의 휘말림에 바쳤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 (받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간다. 세례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로산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삶이다. 그 삶에 참생명과 영광이 있다. 이것을 믿는 자, 그들의 세례는 필경 예수 사건의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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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