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5. 30. 10:29

부흥의 원리

(사도행전 6:1-7) 

 

그때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1).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제자였다. 우리는 제자인가? 제자는 스승의 인격과 삶, 그리고 사명을 몸소 배워, 스승의 뒤를 이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부흥의 제 1원리는 제자됨에 있다. 제가 되는 것 자체가 부흥이고, 제자가 되야 다른 이에게 스승이 되어 다른 이를 제자삼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믿고 전파한다. 우리는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 되심에 대하여 진지한 고백을 먼저 해야한다. 예수가 참으로 메시아(구원자)라면, 우리는 구원자 되신 예수에게 우리의 삶을 걸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먼저 되어야, 그 다음 일도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교회가 부흥하려면, 그리스도인 됨, 제자 됨에 대한 진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제자들이 모여 제자를 길러내는 곳이다. 교회가 이것 외에 다른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인가? 그리고 우리는 제자를 길러내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로 모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이 질문을 날마다 하며, 제자 됨을 생각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것에 대한 진지한 사역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사람이 많아지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부부 사이에도, 가족들 간에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문제 발생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나의 군 경험 / 장군으로부터 배운 것: 문제는 발생하게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초대교회에도 사람(제자 / 제자가 되어도 여전히 문제는 발생한다.)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이 한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에 발생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1b). 초대교회의 리더십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류였다. 그렇다보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서 불만이 흘러나왔다.

 

6.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제자들(교회 구성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2-4).

 

사도들은 제자들이 불어남과 동시에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 구제하는 일, 접대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썼다. 사도들은 일차적으로 문제가 여기서 발생했다고 파악했다. ‘접대봉사와 재정 출납을 의미한다. 봉사와 재정 출납은 하찮은 일이 아니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은 집사들이 감당하고, 사도들이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은 봉사와 재정 출납의 일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있다는 말하는 것이다.

 

열 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할 때, ‘마땅하지 아니하다에서 쓰는 헬라어 아레스톤기분 좋은이라는 뜻이다. , 그러한 일은 교회 공동체에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에서 기분 좋은 일은, 사도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접대와 재정 출납(봉사)은 집사들이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이러한 진단과 제안에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교회 부흥의 제 2원리사역의 적절한 분리와 협력이다. 목회자에게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이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목회자로서 이 노동에 실패하면 직무유기다. 집사(집사/권사/장로)에게는 봉사(접대와 재정 출납)가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집사로서 이 노동에 실패하면 직무유기다. 목회자와 집사의 직무가 온전히 실행되는 것 자체가 부흥이고, 그 직무가 온전히 실행되면 교회는 실제로 부흥한다.

 

일곱 집사가 선출된다. 5절은 한 구절로 되어 있지만, 세 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스데반에 대한 진술이다.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 문장은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they chose Stephen, a man full of faith, and of holy Spirit”. 스데반은 공동체 내에서 신망이 특별히 두터웠던 것 같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러한 수식어가 따로 붙지 않는데, 스데반에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특별히 붙는다.

 

사실, 나는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판단이 안 선다. 왜냐하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특별히 마귀의 표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에 박해가 있을 때, 최초로 순교한 사람이 스데반 집사이다. 왜 박해의 때에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처음으로 공격했을까? 그 사람이 중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무너뜨리면 공동체가 와해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헛되게 놓아두지 않으신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의 울타리를 넘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도화선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허무한 죽음일 수 있으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복된 죽음이고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죽음이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어떠한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난다.

 

스데반에 대한 특별한 수식어 다음에, 다섯 명의 집사 이름이 열거된다.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가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교회 집사들(성도들)의 이름을 다 아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집사로 소개되는 니골라에 대한 수식어가 나온다. 그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헬라어로는 프로셀뤼톤’, 영어로는 ‘proselyte’라는 수식어를 쓴다. 문자적으로는 새로 온 사람’, ‘나그네’, ‘이방인인 뜻하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의미한다.

 

일곱 집사의 특징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으로서 구별/차별을 강조했던 이들이, 이제 모든 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배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흥 원리의 세번째 요소이다. 초대교회 안에 생긴 처음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차별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러한 차별적 요소를 해소하고자 교회의 리더로 헬라파 사람들을 세웠다.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때, 교회는 부흥한다. 정말 중요한 교회의 덕(virtue)이다.

 

14. 공동체에 어떠한 갈등이 발행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형편없는 공동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공동체에 어떠한 요구(need)가 발생했다는 싸인(sign)이다. 갈등은 나쁜 게 아니다. 인간은 갈등 없이 성장할 수 없다. 갈등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하게 보이게 해준다. 갈등이 발생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서로 협력해서 그 갈등을 해결해 나아야 한다. 그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갈등해결의 절차를 보면, 갈등이 발생하고(매일의 구제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소외됨), 그것에 대한 바른 진단이 나오고(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고 구제(봉사와 재정 출납)에 몰두하는 일은 공동체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대안(봉사의 일을 감당하는 일곱 집사 선출)이 제시된다. 그리고, 모든 무리가 모였고, 그 모임 가운데서(예배 가운데서), 사도들은 그렇게 선출된 집사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했다. 서로 기쁨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받아들였다.

 

마지막, 7절에서 교회 부흥의 네 번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복음)에 복종하니라”(7). 교회를 부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허다한 제사장이 예수의 복음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의 무리(오클로스 톤 히에레온)란 매일 성전 봉사를 위해 일정 기간 예루살렘에 머무는 제사장들을 의미한다. 역대기에 보면, 다윗 시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숫자를 32,000명으로 잡는다(대상 23:2-5). 이 중에서 성전 봉사자는 24,000명이었고, 성전 문지기는 4,000, 성가대는 4,000명이었다. 그러나, 32,000명이나 되던 제사장들은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 시대 때는 그에 비해 5%대로 떨어진다.

 

느헤미야 11장에 기록을 보면, 성전 맡은 자로 스라야 및 그 형제들이 822, 아다야 및 그 형제들이 242, 아맛새 및 그 형제들이 128명이었고, 하나님의 번 바깥일을 맡은자, 말씀 인도하는 자, 버금 등을 맡은 자가 284명이었고, 성 문지기로 172명이 봉사했다. 그래서 총 1,648명이었다.

 

그리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네 개의 조가 있었는데, 한 조당 5,000명이었다고 한다 (Josepus, History of Jewish People I, 219-220).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는 20,000명 정도가 제사장으로 봉사했다는 통계가 나온다. 이 숫자가 정말 정확한 통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벨론 포로 이후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의 숫자가 많이 증가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유대교 성전 예배의 중심축이었던 제사장 그룹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 그룹의 해체가 진행됐다는 뜻이고, 유대교 체계에 심각한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가 이제 막 시작한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복음)은 견고해 보이는 그 어떤 것도 허무는 힘이 있다.

 

배우자나 자녀의 완고한 마음, 이웃의 완고한 마음, 어떠한 체계의 완고함을 허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 있는 공동체이다. 교회 부흥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고 협력하는 것이 제자의 첫째 임무이다.

 

부흥의 원리를 다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자됨

2) 사역의 적절한 분리와 협력

3) 자기 이익을 포기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

4) 하나님 말씀의 왕성함

 

부흥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다. 부흥하려면 위의 네 가지가 교회 공동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위의 네 가지 원리가 충만한 교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부흥한다. 부흥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부흥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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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