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잠언
(잠언 31:1-9)
‘어머니’라고 하는 용어에는 ‘자식은 둔’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어머니란 무엇인가? 자식을 둔 여자를 뜻한다. 이런 말이 있다. “결혼은 연애의 업보요, 설거지는 취식의 업보요, 자식은 부모의 업보다”(김영민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자식은 부모의 업보다. 그래서 이왕 부모가 된 거, 부모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한다.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싶은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아이가 어떻게 컸으면 하는 바람이 부모의 언어에 담겨 있다. 대개 부모는 아이를 ‘공주님, 왕자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연애할 때의 남녀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공주님,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커서 ‘왕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메타포이다. 지금은 왕이 존재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왕처럼 컸으면 좋겠다는 뜻은 왕처럼 ‘존귀한 존재’로 컸으면 좋겠다는 소망일 뿐이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르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유튜버나 연애인, 또는 운동선수 등이 수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은 단연 ‘대통령’이었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의 장래 희망은 매우 전형적이고 일괄적이었다. 나는 조지아에서 목회하며 왜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목회하던 지역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곳에 지금도 생존해서 세계 평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생가가 조지아에 있었다. 교회 VBS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지미 카터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다.
지미 카터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매일 같이 조회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 중 누군가는 이 다음에 대통령이 될 것이다.” 지미 카터는 그 말을 듣고 학창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너희들 중 누군가는 이 다음에 대통령이 될 거야!’라는 말은 그 교장 선생님만의 특별한 비전 제시가 아니라, 그당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미국의 문화를 많이 수입한 한국에는 장래 희망에 대한 문화도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통령을 장래희망 1순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대통령이든, 유튜버든, 연애인이든 운동선수든, 사람들이, 아이들이 그러한 장래희망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자신들의 눈에 그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존귀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존귀한 자가 되고 싶어하고, 부모라면, 특별히 어머니라면 아이를 존귀한 자로 키우고 싶어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르무엘’이라는 왕은 존귀한 자의 대명사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아이들을 ‘르무엘’처럼 키우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르무엘은 왕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르무엘처럼 존귀한 자로 키우고 싶다. 또한, 르무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속한 자/하나님께 바친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아이를 키울 때 단순히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존경을 받는 존귀한 자로 키우고 싶은 동시에, 하나님에게 속한 자,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아이를 존귀한 자,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 어머니는 잠언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들어야 한다. 르무엘의 어머니가 르무엘을 존귀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로 키우기 위하여 그의 아들 르무엘에게 가르친 교훈은 세 가지이다. 부모는 자식을 훈계해야 한다. 부모의 훈계 없이 아이는 존귀한 자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교훈하기에 앞서, 르무엘의 어머니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2절). 이 고백에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이 담겨 있다. 아이가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 그 애타는 심정이 잘 녹아 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아이를 존귀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냥 낳은 아들이 아니라 서원대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첫걸음은 아이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다. 그 간절한 마음은 아이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지만, 대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최근 한국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끈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에서 그 상황을 잘 묘사했다. 부모들은 자식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삼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말로, 자식에게 부모는 업보가 된다. 그래서 자식은 태어나자마자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 ‘과도한 학업’을 감당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화’가 가득 차 있다. (공부 못해 억울해 죽은 조상 귀신이 아이들에게 붙어 있는 것 같다.)
최근, 정우성과 김향기가 주연을 해서 호평을 받은 <증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서 김향기는 자패아로 나오고, 정우성은 자패아 김향기가 목격자로 연루된 사건을 담당한 상대편 변호사로 나온다. 자패아로서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때 정우성이 자패아 엄마에게 이런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 “아이가 자패만 아니라면 좋을텐데요.” 그때, 엄마는 정색하며 이렇게 대꾸한다. “아니요. 우리 아이가 자패가 아니면 우리 아이가 아니죠!”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자꾸 우리의 욕망을 투영해서, 아이가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면서, 괜히 아쉬워하고 속상해 한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더 나아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좌절된 것 같은 분노나 서운함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아이를 존중해 주는 성숙한 믿음이 필요하다.
르무엘 왕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훈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교훈은 이렇다.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3절). 이 구절은 약간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히브리어의 원래 의미를 반영해서 다시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왕들을 멸망시키는 여자들에게 힘(재물, 성적인 관계)을 쏟지 말라.”
이것을 좀 더 깊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존귀함/인간성을 헤치는 세력과 어떠한 모양으로든 관계를 맺지 말라는 뜻이다. 특별히, 재물(money)과 성(sexuality)은 존귀하게도 만들어주지만, 존귀함을 가장 손쉽게 해칠 수 있는 것들이다. 힘을 엉뚱한데 쏟으면 안 된다. 성경에서 힘을 엉뚱한 데 쏟은 대표적인 예가 다윗 왕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엉뚱한 데 쏟는다. 그래서 자신의 존귀함도 무너지고, 무엇보다 훌륭하고 충직한 장수인 우리아의 목숨을 빼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다. 그 일로 인해서 존귀함이 무너진 다윗 왕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이 닥치는가.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가정사에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부모는,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녀를 교훈해야 한다. “네 힘을 엉뚱한 데 쏟아 너의 존귀함을 해치지 말라!”
두번째 교훈은 이렇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4절). 여기에는 ‘알’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부정어가 쓰이는데, 동사의 부정사형이 뒤에 나올 때에는 권유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 당시 포도주(지금도 그렇지만) 식사에 동반되는 음료였다. 술을 완전히 금하는 게 아니라, ‘독주’ 즉 취한 상태에 이르지 말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5절 말씀은 왜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는지, 즉 왜 취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워니라”(5절). 그러면서 독주는 ‘죽게 된 자’와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나 주라고 권면한다. 술취하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왕같이 존귀한 사람,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독주는 잠시라도 고통과 절망을 잊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독주는 일시적인 유익을 줄 수 있을 뿐, 존귀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통치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데 독주는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독주(술 취하는 것)를 피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잠깐 동안만 위로를 주는 독주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법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술 마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잊어보려는 부모를 둔 아이는 나중에 그 모습을 따른다. 부모님이 그랬으니까,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 중에 그런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매일 술마시고 집에 들어와 추태를 부리고 엄마를 못살게 구는 것을 보면서, 맨날 울면서 우리 친구들한테 말했다.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절대 술 안 마실거야. 그런데, 그 친구가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증오하던 아버지처럼 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술을 안 마시면 잠자리에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이 세계의 전부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독주를 마시며 술취하는 것을 통해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보여주면, 아이는 그것이 고통을 벗어나는 마땅한 방법이라고 학습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모님이 보여주신 그 모습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로 기도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절절한 경험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가서 밤새껏 기도하셨다. 나는 그때 엄마가 왜 그렇게 밤새껏 추운 예배당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왜 그런지 안다.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예배당에서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 집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 장모님도 집사람 어렸을 때부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다른 곳에 가지 않으시고 예배당에서 밤새껏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예배당에서 함께 기도한다. 한 사람이라도 다른 것을 통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극복하려 했으면 갈등이 심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복 내려 주셔서,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동일한 경험을 주셨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의 존귀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독주(술취함)을 피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로 만이 아니라, 몸소 가르치라.
마지막 세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8절). 르무엘의 어머니는 이것을 다시 반복하여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9절). 여기서, ‘말 못하는 자’와 ‘고독한 자’는 언어장애를 가진 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말한다. 권력과 돈이 있는 자들의 말은 무시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자(권력과 돈이 없는 자)는 법정에서조차도 충분한 변호를 받지 못한다.
우리는 대개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아이들에게 말해주며, ‘권력과 돈’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친다. ‘세상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 이러한 가르침은 ‘존귀한 자’, 특별히 ‘하나님께 속한 자’,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쳐야 할 삶의 교훈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부지불식 간에 이러한 세속적인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준다.
성경은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신원하시는 분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대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력과 돈’을 주시는 이유는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주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력과 돈’을 주시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섬기라고 주시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말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것은 ‘권력과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돈’이 있으면 사회적 약자를 섬기기 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기 쉽다. 우리가 존귀한 자이고,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가 있다는 뜻인데, 하나님에게 마음이 가 있는 존귀한 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사회적 약자에게 그 마음을 둘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모는, 어머니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르쳐야 한다.
어머니라는 말에는 ‘자식이 있는’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자식을 둔 어머니는 자식을 잘 교훈해야 한다. 잠언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모가,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 지에 대한 지혜를 배웠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름과 같다.
1)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라. (부모의 욕망을 아이를 통해 이루려 하지 말라)
2) 네 힘을 엉뚱한 데 쏟아 너의 존귀함을 해치지 말라!
3)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의 존귀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독주(술취함)을 피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로 만이 아니라, 몸소 가르치라.
4)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아이들을 부모로서, 어머니로서 ‘존귀한 자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아름답고 훌륭하게 키워내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 하늘나라 부부 (0) | 2019.05.27 |
---|---|
압도적 회심 경험 (1) | 2019.05.23 |
성장 (0) | 2019.05.02 |
나귀, 겉옷, 돌 (0) | 2019.04.16 |
인생의 목표 (0) | 2019.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