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4. 9. 05:13

인생의 목표

(빌립보서 3:4-14)

 

요즘 아이들에게 콩쥐가 되고 싶냐, 팥쥐가 되고 싶냐?”라고 물으면, “팥쥐가 되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콩쥐처럼 어려움에 처해서 고생하며 살기 싫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못된 인간으로 불리더라도 누릴 거 누리면서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넘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물었다. “살면서 고생했지만 죽어서 천국 간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거지 나사로를 무시해서 지옥 간 부자가 되고 싶은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서는 부자처럼 살고 싶고, 죽어서는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 가고 싶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인생의 목표는 중간중간 점검해주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포인트이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인생의 말년에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 “, 나는 기쁘다!”라고, 기쁘지도 않은데, 기쁜 척 한다고 기뻐지는 것을 아닐 것이다. 기쁨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쁨은 늘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기쁨을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시킨 복음이 자리 잡고 있다. ‘복음이라는 것이 원래 기쁜 소식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도 바울도 육체의 성취를 기쁨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가 얼마나 육체를 신뢰할만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는지 5,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5, 6).


이것은 자신의 외적 스펙의 나열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런 뜻이다. “, 육체의 성취로는 금수저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모든 육체의 성취가, 자신의 인생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육체의 성취들이 모두 도리어 해가 되었고, 배설물로 여겨졌다고 고백한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안 된다. 예수를 믿으면, 외적인 노력은 전혀 필요 없으며, 공부 안 해도 되고,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단무지 신앙(단순, 무식, 지랄)’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예수 안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봤다는 것이다. 일단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이 최고의 지식이라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이거에 동의할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의 지식은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지식을 말한다. (요즘엔 밥 사주는 사람이 형이고, 돈 많은 사람이 형이고, 인기 많은 사람이 형이다. / 나 같은 사람은 동생 중의 동생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그 모든 성취를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무슨 노력을 해 보았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밝힌다. 지금 그는 인생의 말년에 들어섰고, 감옥에 갇혀 있으며,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기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인생이지만, 그가 기쁨이 충만하여, 자신이 왜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려왔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그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부활이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육체의 성취가 우리의 목표라면, 결국 그 끝은 허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육체의 성취는 필경, 자신의 육체 뿐 아니라, 다른 육체에게도 상처를 주는, 상처 뿐인 영광일 것이다. 육체의 성취는 다른 생명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아이가 하버드 대학교 들어가는 게 인생의 목표라면, 그래서 우리 아이가 하버드 들어갔다면, 우리 아이가 들어간 것 때문에, 하버드에 들어가고 싶었던 다른 아이는 하버드 입학에 실패하여 낙심할 것이다. 육체의 성취의 특징은 나의 기쁨이 다른 이의 슬픔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이라고 하는 인생의 목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부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빌립보서 25절 이하에 나온 그리스도 찬가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것은 전문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이다. 이것은 겸손(humility)’이다. 육체의 성취가 왜 나쁜 것이냐면, 그것은 늘 자기 초월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니버는 인간의 자기 초월에 대한 시도’, 이것을 죄라고 말한다. 위에서처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인간이 되려고 하시는데, 인간인 우리는 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낮아지는 것), 신이 되려 하지 말고 인간이 되는 것,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것이다. 우리가 인간인데, 그래서 인간은 그 한계성에 의해서 겸손해져야 하고, 인간이 되어야 하고, 죽기까지 순종, 즉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경지에 오르려 하는 교만에 빠진다. 인간인 우리가 인간이 되는게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 겸손해지는 것(낮아지는 것), 인간이 되는 것,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삶의 모든 가치를 사랑에 두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의 가치의 뿌리를 사랑에 두면 하는 모든 일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여와 사랑이 연결되는 것을 본다. 인생의 목표를 부활로 설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고, 모든 것의 가치의 뿌리를 사랑(그리스도의 사랑)’에 두기 때문에, ‘항상 기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보라. 기쁨이 넘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부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묻거든, ‘부활이라고 대답하라. 교회는 바로 부활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쁨이 충만할 수밖에 없다. 부활이 삶의 목표가 아닌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번지 수 잘못 찾은 것!)

(삶의 목표가 뭐세요? 부활이요!) 서로에게 기쁨 충만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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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