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미와 루하마
자기 정체성 찾기
(호세아 11:1-11)
호세아는 주전 8세기(BC 740년경),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기 전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호세아는 12 소선지서의 첫 번째 책이다. 호세아서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호세아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의 개인적인 삶이 전면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의 삶과 이스라엘의 삶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삶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호세아의 뜻은 ‘야웨께서 구원하신다’이다. 호세아의 이름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인생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그 어느 민족보다 이스라엘에게 잘 드러나는 마음가짐이어야 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하고, 힘 있어 보이는 애굽과 앗수르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결혼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은유(메타포)이다. 성경이 결혼에 비유하여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결혼은 성스럽게 여겨진다. 유교문화권에서도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유교문화권에서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녀 출산의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문화권에서 결혼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이기 때문에 성스럽게 여겨졌다.
호세아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이러한 말씀을 받는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 호세아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서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창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직업여성)과 결혼을 한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고멜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세 명의 자녀를 낳는다. 첫째는 아들인데,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지었고, 둘째는 딸인데,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사랑받지 못하는 자)라고 이름을 지었고, 셋째는 아들인데,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이름 지었다.
아내는 원래 사랑 받아야 하고, 자녀도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호세아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내 고멜이 낳은 세 자녀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신실하지 못했고, 다른 남자를 만나 바람을 피고, 집을 나가고, 남편을 버리고, 가정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부모님 앞에서 ‘이혼’을 선언한다.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호 2:2).
이것은 호세아의 삶에 일어난 실제 상황이다. 사람들은 호세아의 가정을 보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런 모습을 보며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얼굴이 찌그러지고, 끔찍하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여자와 결혼하여, 애들 셋이나 낳고,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사냐고, 뒤에서 수근수근 대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호세아에게 이런 말을 하며 떠나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니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하였음이라”(호 2:5). 그래서 호세아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 그래서 호세아는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고멜을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지불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이렇게 타이른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또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호세아를 가리켜 ‘등신’이라고 했을 것이다. 다른 남자 좋다고 집 떠나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음란한 여인’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인 호세아를 이해 안된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신앙 상태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호세아서 1장부터 3장까지는 호세아의 개인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다, 호세아서 4장부터는 이스라엘 전체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본격적인 예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예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 4:1-2).
호세아에게로 향하던 손가락이 ‘자신’에게로 돌아서는 순간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한다. 남에게는 손가락을 뻗기 쉽지만, 자신에게 손가락을 뻗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다. 그들은 왜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와 ‘로루하마(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되었을까?
이스라엘의 원래 정체성은 ‘암미(내 백성이다)’와 ‘루하마(사랑을 받다’)이다. 호세아서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 의하여 애굽에서 구원받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언약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들의 정체성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와 ‘로루하마(사랑을 받지 못하다)’로 바뀐 것일까?
호세아는 절규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여기서 지식은 단순히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결혼함으로 얻어진 혼인 상태의 친밀함에서 나오는 지식’(레노바레성경, 1259쪽)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결혼, 즉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오는 신비한 생명의 능력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새사람’에 관한 지식이기도 하다. 새사람과 대비되는 것은 옛사람이다.
신앙이란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이다. 결혼은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언약이다. 결혼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어 준다. ‘나는 이 사람에게 속해 있다.’ 즉, ‘암미’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나는 너에게 속해 있다. 너는 나에게 속해 있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결혼은 서로 속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튼다. “나는 너의 사랑을 받는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루하마’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 사랑은 ‘내어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우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선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경험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결혼, 하나님과의 합일을 통해서 이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그 지식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을 통하여 합일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내어줌’, 즉 사랑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내어줌, 사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선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고, 그러한 상태에 들어선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연합에 들어서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열망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즉 우상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상에게는 사랑의 능력, 즉 자기를 내어줌의 능력이 없다. 그러한 우상숭배의 정황을 호세아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가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호 4:12).
이스라엘의 음행은 고아를 생산해 내고, 불임을 생산해 낸다. 즉, 그들은 엉뚱한데 가서 은총을 바라고 구원을 갈망한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로암미’와 ‘로루하마’로 불릴 뿐이다. 나에게 속해 있지 않고, 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은총과 구원이 없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은총과 구원이 없다. 빈손만이 있을 뿐이다.
호세아는 외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나 제사가 아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그 사랑의 신비 안에 있으면 어떠한 놀라운 일이 창조되는 지 아는 지식이다. 그 지식이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그 인생이 빈손이 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풍요를 모두 나누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하나님이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며 우리를 부르신다. 이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는 그 사랑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암미(내 백성이다)와 루하마(사랑 받는 자이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자들이다. 우리의 이러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어느새 고멜처럼 자신에게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들”주는 자를 따라 나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는도다”(호 2:8).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즉, 하나님과의 혼인관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없는 백성’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와 ‘로루하마(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이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언약관계, 하나님과 혼인관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자는 정체성을 바로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암미(내 백성)’과 ‘루하마’(사랑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은총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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