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4. 1. 15:27

세 번의 유월절 

-의식rituals의 중요성-

(여호수아 5:9-12)

 

2013년도, 내가 마흔이 되던 해, 나는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었다. 나이 마흔을 흔히 불혹(미혹되지 않는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이 마흔을 지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는 것이겠지만, 나이 마흔은 불혹의 나이라기 보다, 미혹의 나이인 것 같다. 불혹은 무엇에도 홀리지 않는 것을 뜻하지만, 미혹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을 뜻한다. 공자가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고 말한 이유는 나이 마흔이 되면 미혹되는 게 많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마흔이 되면, 무엇보다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살만큼 살았고, 또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만큼 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이 마흔에 느끼는 일상의 지루함은 복에 겨운 감정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마흔의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을 때, 나는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아니, 책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났다. CBS 라디오 PD로 활동 중인, 정혜윤이 그다. 그는 그의 책에서 줄기차게 지루한 일상은 삶의 전부다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던 나에게 그녀의 메시지는 또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지루한 일상이 삶의 전부라니.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일상을 꿈꾸기 보다, 지루한 일상 자체를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삶의 전부인 것을 내팽치고 다른 것을 꿈꾸하는 인생만큼 불행한 인생이 어디 있나. 나는 그렇게, 그의 책을 탐독하면서 나의 지루한 일상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지루한 일상이 너무 좋다. 지루할수록 더 좋다.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게 되면서 만난 또 한 권의 책,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 안셀름 그륀이 그다. 그의 책 <내 삶을 가꾸는 50가지 방법>에는 지루한 일상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의식(rituals)에 대한 방법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는 의식(rituals)’을 이렇게 정의한다. “의식은 우리 삶에 활력을 주며, 정당하고 올바른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13).

 

그는 말한다. “의식은 하나의 문을 닫고 또 다른 문을 연다”(13). 의식은 시간 자체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의식은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산물이다. 인간에게는 상상력이라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의식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의식을 통해 하루의 문을 닫는다. 낮에 행했던 일에 대한 의식적인 문닫음이 없으면, 우리는 밤을 온전히 맞이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평안한 잠자리에 들 수 없다. 우리는 하루의 문을 닫지 않고 밤을 맞이하고, 또 그렇게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생각하느라 근심 걱정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지루한 일상은 내가 어떻게 열어젖히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가령, 하루를 시작할 때, 아무런 의식(rituals)없이 시작한다면, 그 날은 어제의 연속에 불과하고,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한 하루가 되고, 불확실한 미래를 던져두는 괴로운 하루가 된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할 때, 의식을 행하면, 그 하루는 어제와 같지도 않고, 내일(미래)을 열어주는 의미 있는 하루가 된다.

 

나는 안셀름 그륀의 책을 만난 뒤, 매일 아침 이런 의식(rituals)을 한다. 두 팔을 벌려 기도하며, 시작된 나의 하루를 축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오늘 만나게 될 사람(그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 때로는 만날 사람이 정해져 있지만)을 축복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축복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마음 가짐이 달라진다. “주님, 내가 오늘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복을 입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오늘 하루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축복 받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을 믿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내가 지금 억압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다는 억압, 자유의 상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준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마쳐야 할 일, 가슴에 남아 있는 분노, 서운함, 이루지 못한 소망, 불확실한 미래 등, 한 겹, 두 겹, 세 겹,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얽어 매고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근심 걱정은 없다.” 어떻게? 그것도 의식(rituals)’을 통해서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간단한 의식을 통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떨쳐 버릴 수 있다.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일어서기 전, 일하던 자리에 잠시 동안 머무르며 심호흡을 하는 것이다. 숨을 깊게 내쉬면서, 하던 모든 일을 내려 놓는 의식을 한다. 이게 효과가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주 큰 효과가 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의식적으로 하루의 일을 문 밖에 두고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선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잠자리에 들 때, 두 손을 접시처럼 하늘로 내밀어 벌리며,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문제를 맡기는 의식을 행하면서 간단하게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 참 좋다. “주님! 나의 모든 문제를 주님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저는 평안히 잠자리에 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는 것을 경험한다. ‘거룩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하기오스(hagios)’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안셀름 그륀, 59).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거룩함을 입게 되는데, 그 실제적인 결과는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성경은 온통 의식(rituals)’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각종 절기, 그리고 예배는 의식의 전형이다. 의식은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관계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결국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도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삶이 다른 단계로 들어섰음을 공포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삶과 실제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월절이라는 의식을 중심으로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긴 여정은 세 번의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한 단계씩 다른 단계로 옮겨 가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된다.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의식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유월절 의식은 출애굽기 12장에 등장한다. 그 첫번째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애굽의 오랜 종살이에서 벗어나 애굽을 나오게 된다. 그들의 두 번째 유월절 의식은 광야에서 거행된다. 두 번째 유월절 의식을 통해 그들은 출애굽이 이루진 것에 대한 감사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민수기 9장) 만약, 이러한 의식이 없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백성으로, 왜 그들이 광야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모르고 광야에서 죽어갔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유월절 의식을 행함으로 자기들이 지금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깨달았다.

 

본문에서 세 번째 유월절 의식이 행해진다. 그들은 지금 출애굽의 긴 여정을 마치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길갈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 의식을 행한다. 그 의식을 행한 뒤 벌어지는 일을 보라.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2). 그들은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삶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열어젖히고 시작한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에 있지 않다. 그들은 더 이상 광야에 있지 않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않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만나를 찾고 있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광야에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애굽 사람들이 던져 주던 고기국이 필요하지 않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애굽 사람들이 던져 주던 고기국을 찾는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 번째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들이 더 이상 애굽에 있는 것도, 광야 있는 것도 아닌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주하며, 우리도 그들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자유케 하심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의 구원과 자유가 우리의 삶에 실제로 역사하도록 간구하고, 그리고 실제로 역사하고 있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의식(rituals)’이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주일 예배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전형적인 의식(rituals)’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일주일(창조의 시간)은 같지 않다.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를 우리 삶으로 받아 들인다. 그 새창조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새창조의 역사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 들인다.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더 이상 애굽에 있지 아니함을, 즉 그 어디에도 억압당하지 않고 자유함을,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광야를 지나고 있는 것 같으나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그리고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그 약속의 땅의 소출을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한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지루한 것 같지만, 지루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자유케 되었으며, 주님의 약속을 이미 성취하여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두 팔 벌려 기도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소망을 품는다. “나는 무엇을 하든, 이를테면 일 하거나 기도하거나 말 하거나 글을 쓰거나, 모든 일에서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어주고 싶다!”(안셀름 그륀, 29).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며, 그 기쁨을 누리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어주고 싶은 인생, 그것이 예배 의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에게 안겨 주시는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인생의 전부인 우리의 삶, 그 삶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신비로 가득 차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에 창조되길, 두 팔 벌려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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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