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19. 08:54

라오디게아 교회?

(계 3:14-22)

 

요한계시록 묵상을 잘 하고 있는가? 이번 요한계시록 묵상의 목표는 요한계시록 건전하게 이해하기이다. 성경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건전한 신앙을 낳는다. 기독교는 사실 처음부터 경전의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한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는 한 사람(붓다)의 깨달음이 종교의 핵심이고, 이슬람교는 한 사람이 받은 계시(꾸란)가 핵심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 사람의 깨달음도, 한 사람이 받은 계시도 핵심이 아니고, ,그 한 사람이 핵심이다.

 

기독교의 경전은 한 사람의 깨달음을 전하는 책도 아니고, 한 사람이 받은 계시를 전하는 책도 아니다. 성경은 한 사람에 대한 증언이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은 예수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에 대한 이름을 넘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재림)을 믿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예수에게 가지고 있던 신앙을 퇴보 시키지 않았다.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도들을 포함하여 제자들이 하나 둘 씩 (순교 또는 늙어서, 또는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나고 있을 때, 그들에게는 또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예수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게다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무신론자로서 핍박을 받았다.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행해진 황제숭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무신론자라 칭함을 받으며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 당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황제가 주님,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지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신앙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을까?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 참 좋을텐데예수님이 바로 오늘 여기에 재림하시면 좋을텐데…” 이러한 생각을 신학적인 용어로, 종말론적 비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요한이라고 불리는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핍박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안을 열어 주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와 계신 것이 안 보이지만,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바람대로, 지금 여기에 와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 타고 오시리라”(1:7). 중국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기보다, 손오공을 먼저 떠올린다. 예수가 무슨 치키치키차카차카 초코초코초하면서 구름 타고 날아다니던 손오공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니엘 713절의 말씀에서 가져온, ‘인자 같은 이’, 즉 메시아에 대한 표상이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7:13). 그리고 그가 구름타고 오시리라할 때의 오시리라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에르케타이라고 하는데, 이는 직설법 중간태 3인칭 단수 현재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잠깐 헬라어의 용법을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문법에 (Voice)’라는 게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태에는 두 가지, 능동태와 수동태가 있다. 능동태는 주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고, 수동태는 주어가 무엇인가를 당하는 것이다. 영어로 I wrote a letter내가 그 편지를 썼다의 뜻이 된다. 이것은 능동태이다. 그런데, A letter is written by me이면, ‘그 편지는 나에 의해 씌어졌다라는 수동태 문장이 된다.

 

그런데, 영어나 한국어에는 능동태와 수동태만 존재하지만, 헬라어에는 이 태(voice)외에 중간태라는 게 존재한다. 중간태는 주어가 그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받거나, 그 행동에 자기 자신이 깊이 관여된 것을 나타낼 때 쓴다. 이것을 그가 오시리라에 적용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일단 현재성을 나타낸다. 예수는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심은 스스로의 주권적 행동에서 온 것이라는 뜻이다. 현재성과 주권성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주권은 자유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주권은 어떠한 행동의 동기가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유는 주권이 없으면 자유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매매 또는 성폭력이 강력한 처벌을 받는 이유는 성매매/성폭력이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성은 철저하게 주권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성행위의 동기가 외부에 있으면 안 되고, 자기 자신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매매와 성폭력은 성행위의 동기가 자기 자신에게서 오지 않고, 외부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죄질이 대단히 나쁜 것이고, 강력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예수의 현재적 오심(그가 구름 타고 오시리라)은 예수님의 주권적 행동이라는 뜻이다. 외부의 어떠한 요소가 예수의 현재적 오심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핍박 가운데 있는 것이 예수의 오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예수께서 지금 여기에 오신 것은 예수님의 주권적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신 것은 은혜가 되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흥부는 다리 다친 제비를 보고 제비를 치료해주었다. 그때 흥부는 다리 다친 제비를 보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제비를 고쳐준 것이지,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어떠한 외부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제비의 다리를 고쳐준 것이 아니다. 그래서 흥부의 행동은 은혜다. 그 은혜에 감동을 받은 제비는 외부의 어떠한 요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었다. 흥부와 제비 사이에 일어난 일은 자유와 주권의 이야기이고, 그 가운데는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흐뭇하다.

 

그런데, 놀부의 행동은 어떤가. 그는 욕심에 의해서 어떠한 행동을 한다. 제비를 다리를 고쳐준 동생 흥부가 부자가 된 것을 보고, 자신도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즉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 준다. 그에 대한 제비의 반응은 무엇인가? 은혜가 아니라, 재앙이다. 박씨를 물어다 줬지만, 그 박씨 안에서 나오는 것은 놀부를 심판하는 도깨비들이었다.

 

정리해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부재중이 아니시고, 핍박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현재 와 계시다. 그러므로, 박해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안을 열어서 보면, 그들의 바람(소망)처럼 예수는 그들 가운데서 그들이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에 대한 복음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지금 박해 당하고 있는 우리 곁을 떠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기쁜 소식’, ‘복음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근본적으로미래의 역사적 시나리오가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믿음으로 모인 교회는 어려움을 수동적으로 참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겨낸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기는 자는 예수가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그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이겨내는 믿음의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로서,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소아시아의 7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다. 소아시아는 그 당시 로마제국의 최대 속국으로서 각 도시마다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며 제사를 드리는 우상숭배의 행위가 횡행했었다. 그 제사에 참여하여 제사를 드리고, 제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풍요롭게 살아갔지만, 황제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고 제사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구멍 가게 하나 열지 못했다.

 

소아시아의 7교회는 그러한 척박한 삶 속에서 나름대로 신앙을 잘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현실에 부딪혀 배교자들이 생겨나고, 현실 타협론자들이 생겨났다. 황제 숭배도 하고, 드려진 제물도 먹고, 그리고 예수도 믿고,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것 아니겠냐는 회유적 가르침이 스멀스멀 교회를 엄습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니골라당,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이세벨이라고 칭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지금 주권,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외부의 요인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7교회 중에, 가장 심각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앞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와 매우 큰 대조를 이룬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다. 아주 작은 교회(요즘 말로하면, 미자립교회)였지만, 그들은 그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했다. (‘소박한 인내글 참조)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선포하신다. 기둥은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 어떠한 시험에도 결코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키고 주님의 교회를 지킨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달리 큰 교회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a).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이렇게 책망하신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17b). 내가 소아시아의 7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집중하는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꼭 오늘날의 (미국이나 한국) 교회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렇게 평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교회가 미지근한 물과 같다는 것은 이들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뜻이다(이병학, 요한계시록). 이 교회에는 딱히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나, 또는 이세벨 같은 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상 숭배적인 사회에 동화되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자신들이 외적인 부요함과, 부족함 없음에 만족하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나와 우리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교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질 위치에 있는 것 아니고, 그리고 자격도 없다. 그저, “너나 잘하세요!”라는 음성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하지만, 설교자로서, 나의 주장이나 의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만은 성실하게 하고 싶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내가 너를 권하노니 네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6, 18, 19).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문 밖에 서서 우리 마음의 문을, 또는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시며, 문을 열어 달라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는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겠다고 하시는, 이 음성이 들리시는가! 저 멀리 계시는 지 알았는데,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지킴을 받는다(요한계시록 3장 묵상 중).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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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