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8. 04:27

Nothing을 연습하라

(미가 6:6-17)

 

사순절이 시작된다. 재의 수요일을 통해 사순절로 들어가며,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기독교의 절기 중, 사순절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사순절의 주제는 회개(repentance)’이다. 회개(메타노이아)는 삶을 돌이키는 행위다. 교회 전통은 이날 성호를 그으며 재를 이마에 바른다. 성경에서 재는 회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아무리 잘났어도,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다. 이것은 허무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은 그 자체로 허무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인생은 복되다.

 

우리는 보통 인간의 유한성 자체가 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부족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인간의 죄는 유한성에 있지 않고,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라인홀드 니버). 인간의 죄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려고 들 때 생긴다.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기 위하여 인간은 자기를 치장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며,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자기 자신은 다른 이와 같지 않다는 것을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증명하려 든다. 그래서 자기 성취를 통해 남보다 더 나은 위치, 남보다 더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 여기에는 반드시 폭력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서려는 순간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세상의 중심이 되어 세상을 판단하고 남을 판단하려 드는 것에 있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은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다. 교만은 마치 지구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우주를 바라보았던, 천동설과 같다. 자신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생각인가.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러한 교만에 빠져 산다.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고 있는 미가서의 말씀은 그러한 교만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다. 미가 선지자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특별히 미가 선지자는 남유다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이 시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정세가 급변하던 시대였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고, 고대 근동 지역의 패권을 두고 앗수르와 바벨론이 경쟁하던 시대였으며, 앗수르와 바벨론이 끊임없이 남유다의 생존을 위협하던 시대였다.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미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 신실한 주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의 백성이 바른 길을 가도록, 그래서 국제 정세에 휩쓸려 잘못 판단하여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셨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은 뒤, 남유다는 결국 잘못된 판단을 하여 바벨론에 의해 패망의 길을 걷는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마음에 평안(심리적 평안, 심리학)을 주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 더 나아가 한 공동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정치경제학)을 한다.

 

미가서는 크게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베들레헴에서 한 통치자가 나실 것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고(정치),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 것이다(도덕). 미가 선지자는 특별히 가진 자들의 탐욕과 그들이 벌이는 약자들에 대한 착취를 모질게 질타하고 있고, 통치자들의 불의와 탈취, 사회 지도자들(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의 부정과 욕심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가진 자’, 또는 통치자가 되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고 싶어하지, 판단 받은 자리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기 28장의 축복의 선언을 매우 좋아한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28:13).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인간의 실존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자기 스스로 높아진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 착각을 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서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깔보기 일쑤다. 자기 성취는 어느덧 남을 판단하고 착취하는 정당화의 도구가 된다.

 

높은 자리에 앉은 자, 가진 자는 미가서가 말하는 행위를 똑같이 저지른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7).

 

언뜻 보면, 이것은 굉장히 신앙 좋은 사람의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가진 것에만 집중하고, 자기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식까지도 제물로 바치려는 파렴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번제물로 송아지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난한 자들은 송아지로 제사를 못 드렸다. 그래서 제사법에는 비둘기나, 그것조차 없을 때는 곡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도록 규정해 놓았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천 마리의 숫양이나, 만 마리의 동물(양이나 소)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 게다가,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까지도 벌이겠다는 광신이 베어 있다. 불의를 멈출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이 저지른 불의를 사함 받을 생각만 하고 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말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미가는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교만한 자들에게 강타를 날린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미가가 제시하는,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값비싼 제물을 써서 드리는 제사, 또는 자기의 지위를 드러내는 제사가 아니라, ‘정의와 인자와 겸손이다. 이것은 그와 동시대 선지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모스는 정의(justice)를 강조했고, 호세아는 인자(steadfast love, 헤세드), 그리고 이사야는 겸손(humility)’를 강조했다.

 

정의와 인자와 겸손을 한데 묶어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것이 샬롬(평화)’이다. 평화(에이레네)는 정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평안과 안전을 의미한다. 샬롬은 정의로운 사랑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우리에게 사순절이 있다는 것을 축복이고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진 자’, ‘높은 자의 삶을 살려고 성취의 늪에 빠진다.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며,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깔보고, 자신의 성취를 쌓아 놓고 보란듯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고 평안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보장해 줄거라 철석같이 믿으며 산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자의 교만한 모습이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12:19-20).

 

우리가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가진 자와 힘 센 자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많이 모으고,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남들보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다른 이를 판단하는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게 아니라, 정의와 인자와 겸손을 가진 자, 다른 말로 표현해서, 평화를 간직하고, 평화를 만들어 내고, 평화를 위해 사는 자가 될 때, 참된 생명을 얻는다.

 

평화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초월하여 대단한 사람이 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유한성을 인정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 ‘재와 같은 자’, ‘흙으로 돌아갈 자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온다. 왜냐하면, 그런 자만이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Nothing을 연습하라.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라. (나는 이게 최고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마음을 두라(, , 바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 취급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질투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라.(아무것도 아닌 것을 상기시켜 주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을 연습시켜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원래 아무것도 아닌 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 취급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것 취급 받는다고 발끈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교만에 사로잡힌 자일 뿐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으로 인생을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강제적으로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둔다면, 우리는 괜히 마음 상해하거나, 속상하거나, 우울해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실존, 우리 존재의 유한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사순절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복 중 하나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 얼마나 큰 역설이고, 감사이고, 신비인가.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오디게아 교회?  (0) 2019.03.19
망각과 기억 사이  (0) 2019.03.12
영광과 자유  (0) 2019.03.05
본받아  (0) 2019.02.28
먼저 보냄 받은 자  (0) 2019.02.25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