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받아
(예레미야 52:1-11)
시드기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조선 왕조의 순종과 같다. 순종이 죽고, 조선이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그 이후 한국에 민주공화국이 들어선 것처럼, 시드기야 왕을 이후로 다윗 왕조는 사라졌으며, 그 이후에 이스라엘은 왕정체제의 나라를 세우지 못했고,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질 때까지 유대민족의 명맥만 이어왔다. 물론 신구약 중간시대에 ‘하스모이안 왕조’라고 마카비 혁명을 통해 세워진 왕국이 존재했지만, 그것을 다윗왕조의 맥을 잇는 정통 왕조로 보지는 않는다.
시드기야는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이다. 요시야 왕을 이어, 그의 넷째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여호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이된다. 여호야김 왕 시대부터 바벨론의 침략이 시작된다. 여호야김 왕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었다.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자리에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인 시드기야를 앉혔다.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위에 올라 1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리다, 바벨론 왕을 배반한 대가로 처참한 인생을 맞이한다. 그가 왜 처참한 인생을 맞게 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2절이 전하고 있다.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절). 이게 참 아이러니한 거다. 시드기야는 왜 아버지 요시야를 본받지 않고, 자신의 형 여호야김을 본받았을까?
요시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선왕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성전 수리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찾은 ‘율법책’ 덕분이었다. 사실, 그 사건도 미스터리다. 남유다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나라의 근간이 되는 율법책이 없는 상태에서 나라가 운영되어 왔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율법책이 없다보니, 그들에게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그른 일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었다. 그러다, 성전 수리 중 발견한 율법책을 보고, 요시야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율법책이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다.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살기를 싫어한 ‘권세잡은 자들’이 율법책을 불태워 없애려 했을 것이고, 어느 누가 그런 와중에 그 책을 성전 건물의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을 것이다. 율법책이 없어진 세상에서 ‘권세 잡은 자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싶은 대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법대로, 마음대로 세상을 주물렀을 것이다. 여호야김은 그러한 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한 정황이 예레미야 36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야김의 악행을 지적한 예레미야를 핍박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악행에서 돌아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에서 꼼꼼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한 이들의 삶의 환경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요시야 왕도 애굽와 느고와의 전투에서 일찍 죽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도 애굽 왕 느고에게 사로잡혀 가고, 여호야김은 애굽 왕에 의해 여호아하스의 자리를 대신하여 세워진 왕이었다. 돌아가는 국내 정세와 국제 정세가 시드기야로 하여금 아버지 요시야의 선정을 돌아보게 할 여유를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주변여건사정’이 보는 이들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을 자아낼 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삶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형 여호야김 왕을 본받을 것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흐뭇했던 아버지 요시야 왕을 본받았어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비참한 상황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를 ‘본받느냐’는 인생을 좌우한다. 여호야김을 ‘본받은’ 시드기야의 최후를 보라. 처참함 그 자체이다. 성이 포위당하고, 굶주림에 고생하고, 성을 탈출하다 붙잡혀 바벨론 왕 앞으로 끌려가고,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모두 도망을 쳤다. 이것도 큰 부끄러움인데, 부끄러움을 넘어서 처참한 상황이 닥친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가 두 눈을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모든 고관들을 죽이고, 결국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는다. 그리고 놋사슬에 결박한 채 바벨론으로 질질 끌고 가, 그곳의 감옥에 평생 가둔다.
시드기야에게 일어난 처참한 일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본받음’의 잘못이 주는 상징적 교훈이기도 하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significant others(중요한 타자)’라는 용어를 쓴다. 인격 형성(self-concept)에, 또는 인생(life/well-being)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significant others)는 대개 멀리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직장 상사나 동료, 또는 신앙의 선배나 동료 등 말이다.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는 나의 삶의 지향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대게 사람들은 기능적으로 어떠한 사람을 본받으려 하지, 인격적인 또는 영적인 본받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를 본받으라”(빌 3:17a)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b).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하기 전,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간증이 있다. 그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요,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빌 3:5-7).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후로,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고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푯대를 향하여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러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즉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누구를 인생의 ‘significant other’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해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인지를 가리켜 주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누구라고 부르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다. 그 본받음의 결과는 부활이다. 모든 것을 잃고, 두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혀 살다 죽은, 시드기야의 본받음과 얼마나 큰 대조인가.
이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성경은 요시야시대처럼 우리에게서 감추어져 있지 않고, 우리의 두 손에 주어져 있다. 감춰져 있어 성경을 못 봤다고, 그래서 무엇이 바른 길인지 몰랐다고,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다.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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