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2. 25. 15:38

먼저 보냄 받은 자

(창세기 45:3-11)

 

더함’. 요셉의 뜻이다. ‘그가(여호와) 더하신다는 뜻이다. ‘더함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좋은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더하셔서 모든 일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보면, 그에게 더해진 것은 은혜만이 아니었다. 고난도 더해졌다. 우리는 은혜와 고난은 상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혜는 좋은 것, 고난은 나쁜 것!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요셉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파란만장한 인생은 영웅적인 인물에게 다가오는 일종의 공식이다. 영웅의 인생에는 비극의 요소가 반드시 들어간다. 우리는 비극을 생각할 때, 단순히 슬픈 일’, ‘안타까운 일정도로 여긴다. 그런데, ‘비극이라는 장르를 좀 더 자세히 들어가보면, 비극적인 인생이란 단순히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극이라는 장르를 깊이 있게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 3대 작가로 알려진 아이스킬로스나(아가멤논,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소포클레스(오이디푸스, 안티고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메데이아,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같은 사람이 유명하다. 그들은 비극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면밀히 보여준다.

 

그리스 작가들이 보여주는 비극의 본질은 신의 질투에서 온다. 영웅(보통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은 신이 세워놓은 이 세상의 질서를 깨는듯 보인다. 그리고 영웅은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 신적인 질서를 깰 수밖에 없는 어떠한 운명을 맞닥뜨린다. 일례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 신에게 미움을 사 코카서스 산 중에 결박된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신세가 된 것은 그가 불을 인간에게 건네 주었기 때문이다. 불을 인간에게 건네 주는 일은 제우스에 의해 금지된 일이었다.

 

신의 질투 모티브는 성경에서도 등장한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런 문장을 만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4:24).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질투와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질투는 결이 다르다. 그 차이가, 그리스 문화와 히브리 문화의 차이, 그 둘의 신(God) 이해 차이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나 그리스 극작가들의 비극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극은 반항에서 온다. 그런데, 그 반항은 청소년 시기의 무작정 반항이 아니다. 불의한 것에 대한 반항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극은 반항에서 비롯된다기 보다 순종에서 드러난다. 반항과 순종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닮아 있다. 이둘이 어떻게 같고, 이둘이 어떻게 다른지 관찰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삼일절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적인 반항과 히브리적인 순종의 영웅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준 한국인의 영웅, 안창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다. 안창호의 호는 도산(島山)’이다. ‘산으로 된 섬이라는 뜻이다. 안창호가 이러한 호를 지은 것은, 그가 미국 유학의 꿈을 안고 아내 이혜련 여사와 도미하던 중, 배 위에서 하와이 섬을 보고 감탄하였기 때문이다.

 

안창호와 이곳 샌프란시스코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안창호가 미국 땅을 밟은 시기는 1902년이었는데, 그는 이곳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발을 딛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하여 한 일은 원래대로 공부가 아니라, 한인들의 생활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이유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처음 본 광경이 한인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교민들이 3,40명 살고 있었는데, 그들 중 대다수는 고려인삼장수였다. 그들은 각자 이익을 더 취하려고 어떠한 상도도 없이 경쟁을 하던 턱에 대낮에 이익 다툼으로 길거리에서 서로 멱살을 붙들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싸웠다. 그 광경을 안창호가 본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학업을 포기하고, 재미한인동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서 헌신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인국민회이고, 나중에 흥사단도 그런 뜻에서 만들었다.

 

안창호가 교민들의 생활 향상에 헌신한 이유는 나라를 잃어가는 상황, 이후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민자들이 자주국가국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나라의 독립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교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교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주국가국민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면, 국제관계에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는 열강들이 독립을 도와줄 것이라 여겼다. 독립은 단순히 무력으로만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처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주국가국민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독립을 위해서 실력양성론이라는 사상을 내세운다. 실력양성론의 요지는 이렇다. 우선 각 개인이 분발 수양하여 도덕적으로 거짓 없고 참된 인격을 지닌 자가 되고,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 단결 할 때, 독립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고, 독립 이후에도 나라를 지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평안남도 출신인데, 평양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부하고 싶은 열망에 서울로 유학을 가는데, 거기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던 구세학당에 입학여서 공부하던 중, 구세학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송순명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다. 그 이후, 그는 독립을 위하여 그리스적인 반항과 기독교적인 순종을 삶 속에 구현한다. 안창호는 일제의 끊임없는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반항했으며,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국민족 동포 뿐 아니라 적이었던 일본사람들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다.

 

안창호가 영웅이고, 비극적인 인생을 맞이한 것은 그의 인생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안창호가 살던 당시 한민족은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사람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어떤 이는 친일하면서, 어떤 이는 무관심하면서, 어떤이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삶이 영웅의 삶이고, 깊은 의미에서의 비극적인 삶이었던 이유는 그가 불의(옳지 못한 일)에 반항하면서도 윤동주의 서시에서처럼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요셉은 기독교 신앙의 영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찬양을 즐겨 부른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의 푸른 열매처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날거야”. 이러한 찬양을 기쁘게 부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처럼 우리에게도 복 내려 주시기를 간구한다.

 

기독교의 신앙의 영웅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인은 단순히 그들이 받은 은혜만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의 비극은 그리스의 비극과는 달리 반항에서 오지 않고 순종에서 온다. 요셉의 인생이 비극인 이유는 그가 어려운 일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 어려서 주신 꿈(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비극을 이겨내고 넘어선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비극은 순종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비극이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예수에게는 그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다. 예수가 왜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가?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비극이 아니라, 비극을 이겨내고 넘어선, 비극의 해결이다.

 

요셉의 비극은 심화된 것이 아니라, 결국 해결된다. 그의 고백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 이것보다 아름다운 비극의 해결이 어디에 있나. 비극의 해결은 순종에 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패러독스다.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요셉이나, 안창호나, 예수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동일하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먼저 보냄 받은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먼저 보냄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고난에 꺾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슬픈 일이 아니라, 결국 은혜와 동일한, 은혜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옳지 못한 일에는 반항하라. 옳은 일에는 순종하라. (물론 무엇이 옳지 못한 일인지, 무엇이 옳은 일인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하라.) 그러면 반드시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한 비극적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인생이다. 요셉처럼, 안창호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기 때문이다.

 

191931일 토요일, 오후 1. 대한민국 팔도강산에서 300만명이 일제히 대한독립을 외쳤다. 그때 예수교회 3000개가 참여했다. 삼일운동을 일으킨 주체 33명 중 기독교인이 16, 삼일운동 후에 9천여명이 수감됐는데, 그중에 20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인구 전체의 기독교인의 비율이 1.8%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먼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먼저 보냄을 받아, 그 일을 감당하느라 고난으로 보이는 은혜를 입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복락만 누리기 위하여 순종을 외면하며, ‘은혜만 바라고 있는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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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