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함은 나를 들여다 보는거야
- 김복동 할머니를 추모하며-
(예레미야 1:4-10)
가장 슬픈 사람은 무엇인가 될 수 없다.
이 사람은 시인조차 될 수 없다.
시란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것"(심보선)이니까.
가장 슬픈 사람은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
이 사람은 두번째로 슬픈 사람에 의해서 기억될 뿐 아니라,
슬픔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슬픔이 되어 주니까.
무엇인가 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되어 있는 인생은
가장 슬픈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신의 선물이다.
(장준식)
예레미야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1-3절은 예레미야의 간략한 족보와 시대적 배경을 말해주는데, 그는 제사장의 아들이었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 가던 가장 어두운 시대(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에 활동했다.
참혹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라와 가정, 그리고 개인에게 닥친 질곡 때문에, 그 질곡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써도 희망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그래서, 인간의 힘이라기 보다 하늘의 힘이다.
얼마전 ‘지독한 선택’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다. 하나님께 지독한 선택을 받지 않았다면, 참혹한 시대의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 지독한 선택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절).
예레미야의 시대와 그의 사역을 생각하면, 이것은 끔찍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크든 작든 이런 경험,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발생했지?’ 우리는 끝없이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은 방황하고 만다.
예레미야도 그랬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이유가 절실했다. 이 참혹한 시대에, 침묵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입을 벌려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해야 하다니, 왜 하필이면 나인가. 그러나, 그는 그 일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 일이 자신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고민과 갈등, 당혹스러움은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의 반응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절). 하나님의 부르심이 ‘환희와 기쁨’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다가왔다. 여기에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세요. 저를 써 주세요’라는 결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슬프고 나는 어리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좌절만이 보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을까?
며칠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소천했다. 많은 이들이, 그리고 언론사가 이분의 죽음을 기리는 이유는 이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파견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생이다. 할머니는 태평양전쟁(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그의 나이 꽃다운 14살(한국나이 15살)에 군복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끌려갔다가 위안부 피해자가 되었다. 소설가 김숨이 쓴 증언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보면, 그가 그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잘 나와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할머니가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를 기록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인간이 폭력으로 인해서 어떻게 마음의 활동(생리)을 잃어버리는지를 슬프게 보여준다. 할머니는 말한다. “나는 사랑을 몰라. 사랑은 내게 그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과일이야. 내 손 잡지마. 다른 손이 내 손잡는 것 싫어. 내 머리카락도 만지지마.”그에게 촉각이 작동하지 않는다. 마음의 활동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촉각은 그에게 참혹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말한다. “나는 안개 속에 살아... 안개 속에서 잠들고 깨어나지. 안개 속에서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지.” 그의 시력은 좋지 않다. 보고 싶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의 마음의 활동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았던 김복동 할머니가 어떻게 인권운동가가 되어 입을 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을까?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 보는거야.” 이것은 김복동 할머니의 말이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참혹한 폭력을 당한 뒤, 마음의 활동을 잃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나에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이유가 ‘전생에 지은 죄로 인해서’였다. 그 이유가 아니면, 자신에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살았다.
예레미야의 삶과 김복동 할머니의 삶은 겹쳐 있다. 민족의 질곡 속에서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폭력을 통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했고,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힘을 냈다. 그 힘은 분명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 힘은 그들 바깥에서 온 것이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8-9절).
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김복동 할머니의 입에 ‘그의 말씀’을 두었는가. 10절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0절).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초청이고 부르심이다. “이 불의하고 패역하고 폭력이 난무한(즉 죄가 관영한) 이 세상을 뒤집어 엎은 다음에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새창조), 나랑 함께 이 일을 하지 않겠니?”
이매뉴얼 칸트(Immanuel Kant)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숭고함에 대하여 “숭고함은 거대한 것이다. 숭고함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두렵게 한다. 숭고함은 존재를 작게 만든다.”고 말한다. 가령, 우리는 그랜드 캐니언을 보면 그 장엄함에 압도당해 감동하고, 그 거대함 앞에서 두려워지고, 나의 존재가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숭고함에 대한 대철학자 칸트의 이러한 정의보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 안았던 김복동 할머니의 숭고함에 대한 정의가 더 깊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 보는거야.” 우리는 숭고한가. 우리는 위대한가.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이 불의한 세상을 향해 외칠 어떠한 ‘말씀’을 입에 담고 있는가.
우리는 곧잘 핑계를 댄다. ‘나는 슬픕니다. 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소심하거나, 너무 늙었거나, 너무 부도덕하거나, 또는 너무 아픔이 많은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에 주님의 말씀을 넣어 주시고, 새창조 사역에의 동역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The Trinity)>에서 인간의 점증적 상승의 길을 이렇게 말한다.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외부에 있는 것으로부터 내부에 있는 것으로 옮겨갈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아픈 시대를 살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았던 예레미야와 김복동 할머니, 이들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야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다가온 인생의 슬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할 때,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입에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말씀’을 넣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어떠한 삶의 아픔을 지니고 있든지, 우리의 삶은 숭고할 수 있다.
김복동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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