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 21. 16:01

예수, 우리의 기쁨

(요한복음 2:1-11)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16세기의 화가 베로네세(1528-1588)가 그린 <가나의 혼인잔치, 1562>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림 중 가장 큰 그림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 그림이 가로 9미터, 세로 6미터의 거대한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잘 못 받는다. 왜냐하면, 맞은 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반대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중, 가장 작은 그림이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이야기이다. 요한복음은 매우 영지주의적인 문서 같으니, 겉만 그렇고, 속을 들여다보면, 엄청난 히브리 문서이다.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의 깊은 토대는 구약성경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면, 요한의 책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요한복음을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는 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일곱개의 표적을 중심으로 읽은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7개의 표적(sign)이 등장하는데, 그 표적(기적 같은 일)을 둘러싼 오해와 이해의 변증법이 이 복음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구성방식이다. 표적을 두고, 어떤 부류(특별히 제사장, 서기관 부류들)는 오해하여 예수를 죽이려 들고, 어떤 부류는 이해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에 이른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7개의 표적 중, 첫 번째 표적에 해당한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첫 번째 표적 후에 오해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 후, 이해 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예수님의 표적을 두고 이해한 사람들로는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이 나온다.  

렇다면, 가나의 혼인잔치는 무엇을 가리키는 표적(sign)일까? 고대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요즘처럼 하루만에 해치우는 게 아니고, 1-2주간에 걸쳐서 행해졌다. 1-2주동안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중 주인은 넉넉한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해야 했고,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하여 음식과 포도주를 먹으며 흥을 돋우었다. 유대인들에게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주였다. 포도주는 흥(기쁨)을 돋우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만약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는 파장하게 된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한 창 벌어지고 있는 때, 문제가 발생했다. 포도주가 똑 떨어진 것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혼인잔치의 호스트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물류공급이 재빠른 세상도 아니었으므로, 포도주를 갑작스럽게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위기다.

이 사실을 안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사정을 말한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3). 이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다소 시큰둥하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그러면서,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혼인잔치 집에는 정결 예식을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가 여섯있었다. ‘두 세 통 드는이라는 것은 돌항아리의 사이즈를 말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20-30갤론 들어가는이라고 번역한다. 30갤론 들어가는 돌항아리가 6개 있었는데, 그것의 원래 쓰임 용도는 정결 예식에 쓰는 물을 담는 것이었다.  

하인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6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이 가져다 주었는데, 돌항아리에 들은 물이 최상급의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정결 예식에 쓰는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물 대신 포도주가 들어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다. 

이 신비로운 일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에 대한 배경이해가 필요하다. 잠언서 9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9:5-6). 구약에서 포도주는 지혜를 상징한다.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지혜의 잔치를 벌인다는 뜻이다.  

호세아서를 보면, 혼인(결혼)에 대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혼인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2:16, 19-20).

요엘서와 아모스서에 보면, 풍부한 포도주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3:18).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9:14).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사야서에서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 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이 초대장에 이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선포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55:2).

위에서 살펴본 구약의 말씀을 토대로, 가나의 혼인잔치를 재구성하면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우선, 혼인잔치에 대한 설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언약 관계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것은 언약에 충실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력 없는 신앙을 말한다

그러한 상태의 예로,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 이후에 나오는 오해와 이해의 이야기가 확장되어 전개된다. 생명력 없는 신앙은 세 가지의 형태로 전개된다. 첫째는, 예수를 대적하는 형태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후에 예수는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키는데, 생명력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예수에게 표적을 요구한다.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표적을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보이는 것이다.

둘째로 생명력 없는 신앙의 형태는 니고데모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학식 있는 사람이고, 세련되어 있고, 경건한 종교인이다. 그는 예수를 인정하여 이렇게까지 말한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3:2). 그러나,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없었다. 거듭남이 없는 사람에게는 종교적 갈망은 있지만, 기쁨이 없다.

셋째로 생명력 없는 신앙의 형태는 수가성 여인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구원이나 영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생명에 대한 부족과 목마름을 육신적인 것(남자)으로 채우던 사람이었다

가나안 혼인잔치의 표적을 오해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표적을 이해한 사람들은 기쁨을 얻는다. 니고데모가 그렇고, 수가성 여인이 그렇다. 특별히 수가성 여인의 기쁨이 두드러진다. 그녀는 예수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이렇게 행동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아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4:28-30).

우리가 예수를 오해한 사람들처럼 예수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자주,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처럼 기쁨 없는 삶을 산다. 사는 게 왜 기쁨이 없을까? 감정에서 기쁨이 늘 빠져 있는 것 같다. 기쁨이 빠진 감정, 얼마나 밋밋한가? 우리의 감정이 김빠진 콜라 같고, 앙꼬 없는 찐빵 같고, 우리의 인생이 포도주 없는 혼인잔치 같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를 자꾸 다른 데서 찾는다. 건강이 없어서 그럴거야. 돈이 없어서 그럴거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아서 그럴거야. 그래서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 또는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하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고 에너지와 물질을 쓴다. 그러면서, 신앙인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포도주이신 예수를 내가 마시고 흠뻑 취해 있나?”

이사야서의 하나님 말씀이 비수처럼 다가와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기쁨을 얻고자 은을 달아주고, 기쁨을 얻고자 수고하는 모든 일이 결국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절망하고, 기쁨에서 멀어진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그렇구나. 우리가 포도주를 마셔야 하는구나! 예수가 포도주구나! 포도주인 예수를 마시면 흥이 넘치겠구나! 기쁨이 넘치겠구나! 예수가 기쁨이구나!  

예수는 우리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루어 주는 분이 아니라(물론 그렇게 해주시기도 하지만), 예수 자체가 기쁨이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예수에게 무엇인가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넘어, 예수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기쁨의 포도주인 예수를 날마다 흠뻑 마시는 사람이다.

경건한 음악가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음악을 작곡했다. <Jesus, Joy of our desiring>. 예수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기쁨이다.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다른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욕망에 기쁨을 준다.  

포도주인 예수를 값없이 실컷 마신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뻤다. 그의 대표적인 옥중서신인 빌립보서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왜 기뻐할 수 있었는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그는 또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고백은 기쁨의 능력을 말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는 기뻐할 수 있다! ? 기쁨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마시며, 그것으로 인해 취해 있으니까. 이것은 우리 인생이 나아가야할 지향점이다. 인생의 돌파구는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데 있지 않다. 인생의 돌파구는 기쁨이신 예수를 날마다 마셔, 예수에게 취하는 데 있다. 여러분은 지금,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포도주이신 예수를 마시고 흥(기쁨)을 얻으시려는가, 아니면,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혼인잔치를 파하시려는가? 포도주이신 예수를 마시자. 예수는 우리의 기쁨이다.  

Bach, Jesus, Joy of our desiring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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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