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 16. 07:45

지독한 선택

(누가복음 3:15-17, 21-22)


나는 197336, 오전 730분쯤에 태어났다. 나는 모태신앙자다. 나는 강화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강화도에 있는 길촌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교회 사택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그냥 사내 아이의 울음 소리만 들렸다.

 

나는 그 해, 부활절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1973년의 부활절은 422일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1973422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 이후, 나는 목회자의 아들로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서정주 시인이 그의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말했듯이, 나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말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그런 고백 때문일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의 징표인 세례일이 같다. 부활절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주일이다.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는 이유는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부활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기독교의 개념이 몇 가지 있다. 첫째가 회개라는 개념이고, 둘째가, 세례라는 개념이고, 셋째가 부활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거나, 피상적 수준에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회개란 무엇인가? 세례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회개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회개를 잘못한 일(도덕적 잘못)에 대한 감정적 후회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것, 그것을 회개라고 생각한다. 회개에 이러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니라,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를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회개는 감정의 차원이 아니고 존재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회개를 하려면 우선 선포를 들어야 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3:4-5).

 

군생활을 한 남성들은 어느 날 사단장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대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지 잘 알 것이다. 특별히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사단장이 온다는 소식에 온 부대가 긴장을 하며 온 정신을 사단장 맞을 준비에 쏟는다. 회개는 이러한 속성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들어온다. 바로 그때, 오시는 메시아,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온 존재를 다해 방향을 트는 일, 그것을 회개라고 한다. , 기독교에서의 회개는 단순히 도덕적 잘못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삶의 방향을 철저하게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맞추고자 했던 이들은 질문을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메시아를 맞이하는 삶 입니까?’라는 질문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세 부류가 이러한 질문은 한다. 무리, 세리, 그리고 군인들이다. 여기서 무리는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은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3:11).

 

언뜻 보면 굉장히 간단한 일 같다. 옷과 음식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하며 산다. 보통 우리는 엄청난 욕심 가운데 산다. 우리가 인식을 잘 못해서 그렇지, 가난한 나라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천명이다. 무기를 만들어서 돈을 벌고, 그 무기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사람들은 열심이다. 그런데,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몰라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회개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으며, 회개하지 못하고 사는지 알 수 있다.

 

세례란 무엇인가? 우리는 세례를 생각할 때, 교회의 멤버십을 갖게 되는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수세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이야기를 보면서 세례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세례는 일종의 inauguration 의식이다. 대통령의 취임식을 생각해 보자. 대통령에 선출된 이는 의회에서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대통령 취임은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는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선포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이다.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튼 그리스도인은 이제 세례를 통하여 공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선포한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세상 나라의 가치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 상호존중, 자유, 그리고 존엄 등의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는 이러한 가치들이 땅에 떨어져 있고, 이러한 가치를 지니고 사는 것 자체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서 부활의 개념이 들어온다.

 

부활이란 비록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힘들고 버겁더라도,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좀 어려운 말로, 부활이란 미래의 현재성, 종말론의 현재성을 말한다. 부활이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지금 여기서살아가는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뜻이 있지만, 더 깊은 뜻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 나라를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삶을 틀지 못한 사람들, 즉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살고자 하는 이들을 핍박한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신약에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핍박을 받았다.

 

우리가 이 세상 나라에 고분고분해서 그렇지, 만약 하나님 나라를 철저하게 살고자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면, 반드시 핍박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나는 1973422, 부활주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정말 멋 모르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 나를 이렇게 위험한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셨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왜 그러셨어요?’라며 따지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의 진리를 약간이라도 깨달은 지금, 그것은 어머니 아버지가 하신 일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지독하게 선택하신 것이다. 나는 내가 기독교인 인 것이 좋다.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예수의 기도를 드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감사가 넘친다.

 

나의 삶 속에, 이렇게 감사가 넘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를 지독하게 선택하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미리 준비된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이 주어진다. 그는 복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독하게 선택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평이 아닌 감사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지독하게 선택 받았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날 때, 그리고 세례를 받을 때 이러한 음성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

 

하나님께 지독하게 선택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못해 먹겠다!’고 외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신뢰와 사랑, 그리고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혹시, 고난 당하고 있는가?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의 잔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독하게 선택한 사람,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부활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독하게 선택 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선택 받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한 사람이 나를 선택해 주어도 감사한 일인데, 하물며 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독하게 선택해 주셨다는 것은 가장 신비롭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우리를 지독하게 선택하여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를 살도록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의 삶이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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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