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 8. 04:54

함께 가자 (Let’s Go together)

(에스라 8:21-23)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서점을 가도, 라디오를 켜도, 티브이를 봐도 약속이라도 한 듯,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 너를 인정해, 계획 좀 없으면 어때, 멈춰도 괜찮아, 네가 제일 중요해, 너무 열심히 살지마, 너는 너로 살아, 네가 옳아,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어야지' 따위가 넘쳐난다.”

 

2018년도에 전세계를 달군 한국의 보이그룹 BTSUN에서 연설하며, “Love yourself”를 외쳤다. 청소년들은 BTS의 이 연설에 열광했고, 그 연설을 들으며 해방을 느꼈다고 말했다. 현재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메시지는 자기 사랑이다. 걸 그룹 21One의 노래처럼, 모두 내가 제일 잘나가를 외치고 있다.

 

재독학자 한별철은 이런 사회를 일컬어 피로사회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기의 존재를 소비한다. 소비되는 존재는 피곤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장 보드리야드는 이런 말을 했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요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자기 자신(같은 것)을 의존한다. 그래서 삶이 피곤하고, 결국 스스로 모든 것을 소진하여 소멸(자멸)하고 만다.

 

그리스도인에게 “Love yourself”라를 메시지는 매우 낯선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샅샅이 뒤져봐도,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말은 없다. 심지어,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는 이 말의 출처를 잘 알지 못한다. 위대한 종교들의 경전에는 이러한 말이 없다. 우리는 출처도 모르는 말을 최고의 메시지인 양, 서로 주고받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잘 요약해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여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리둥절하다. 요즘 세상의 메시지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인데, 성경의 메시지에는 그러한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세속의 개념이다. ‘세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는 ‘grace’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 사랑을 불러 온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에 들어 실존주의 철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없다(무신론).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의 삶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부서질지언정 자기를 믿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신화가 알베르토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이다. 운명 같은 돌을 산 꼭대기로 밀러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 그러나 돌을 산 정상에 올려 놓으면 다시 산 아래로 돌은 굴러 떨어지고, 시시포스는 다시 산 밑에 내려가 돌을 산 정상을 향해 밀어 올리는, 이 지루한 반복.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이 무한 반복적인 일을 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

 

물론, 이 지루한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신을 발명하면 안 된다. 그러는 순간은 우리는 너무도 손 쉽게 우리의 삶의 짐을 (하나님/타자)’에게 맡겨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는 신을 발명하지만, 참된 종교는 신을 발견한다. 기독교는 신(하나님)을 발견한 종교이지, 발명한 종교가 아니다.

 

오늘은 주현주일이다. 주현 주일에 교회는 동방박사 이야기를 읽는다.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세상에 메시아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늘을 관찰하던 동방박사들은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왕이 났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왕 앞에 내려 놓으며, 그가 왕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낸다.

 

우리가 읽은 에스라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고 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던 유다백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하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에스라가 그 일을 행하도록 한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은 그들을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데려다 줄 보병과 마병을 내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스라는 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면서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보병과 마병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2절 말씀 확장)

 

변변한 교통수단도 없이, 많은 사람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고 어려운 여행이다. 아닥사스다 왕이 제공하는 보병과 마병을 동행하여 그 길을 가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길을 준비하면서 기도한다.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유다 백성들과 함께 기도한다.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더니”(21).

 

기도의 결과가 은혜롭다.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23). 하나님께서 간구한 대로 들어주셨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말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디를 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서 가고 있는지를 날마다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다. 에스라와 그의 일행의 목적지는 분명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 신앙공동체로서 우리의 목적지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 나라.

 

에스라와 그의 공동체의 목표는 빨리 가는 게 아니라, 멀리 가는 것(예루살렘/하나님의 도성)이었다. 멀고 험한 길은 혼자 갈 수 없다. 우리의 목표도 빨리 가는 게 아니라, 멀리 가는 것(하나님 나라)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갈 수 없고, 멀고 험한 길(좁은 길)이기 때문에 혼자 갈 수 없다.


세상의 메시지는 직설적이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역설적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기독교의 메시지는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자기를 죽이고 말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살린다.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썬다싱이라는 인도의 수도사가 있다. 썬다싱은 어느 추운 겨울 날 동료 수도사와 함께 산을 넘어 수도원으로 가고 있었다. 가던 길에 한 사람이 병이 들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함께 가던 수도사가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죽는 것은 저 사람의 운명이니까 저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갑시다.” 하지만 썬다싱은 그와 생각이 달랐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이 길을 지나가게 하신 것은 저 사람을 도우라고 하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썬다싱은 병들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업고 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 고생을 다해서 수도원 가까이에 왔다. “이젠 살았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무엇인가가 발에 걸렸다. 보니까 앞서 가던 수도사였다. 혼자 가다가 너무 추운 나머지 얼어 죽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썬다싱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내가 함께 지고 가야 될 짐이 없을 때 나는 가장 어려웠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빨리 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짐처럼 느껴질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귀찮을 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지금 자신의 삶 속에서 짐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것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짐이 아니라, 은혜이다.

 

김구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과는 아무리 넓은 집이라도 함께 살 수 없다. 그러나,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과는 좁은 집에서도 얼마든 함께 살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자. 그러면서 함께 가자. 멀고 험한 길이지만, 어느새 하나님 나라에 당도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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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