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2. 31. 17:53

Searching and Growing

(누가복음 2:41-52)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출생할 때의 이야기 외에 예수님의청소년기(puberty/사춘기)에 대한 기록은 누가복음의 기록이 유일하다. 예수님의 가족은 유대인의 전례(custom)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세 번, 무교절(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하는 전례가 있었다.

 

전례(custom)는 습관을 말한다. 국민일보에서 선정한 2018년도 올 해의 책 중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이 있다. 원래 제목은 ‘You are what you love’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얻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어느 한 사람의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이 원하는 인생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집단(민족/나라)의 공통적인 습관을 보면 그 집단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책 제목에서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 자체가 된다.

 

나 자신의, 또는 우리 가정의 습관을 한 번 들여다 보라. 어떠한 습관, 또는 어떠한 관습, 어떠한 전례가 나의 삶에, 우리의 가정에 세워져 있는가. 습관이란 무의식적으로(또는 의식적으로) 그 시간에 어떠한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하는 데 있어서 아무 것에도 방해 받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존재가 그곳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좋은 습관들을 생활 곳곳에 배치해 두면 삶이 그만큼 향기롭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무엇보다, 예배의 습관, 기도의 습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습관 등을 삶의 곳곳에 배치하는 게 좋다. 우리 가정 같은 경우는 곳곳에 기도의 습관을 배치해 두었다. 식사할 때는 물론이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를 가기 위하여 신발을 신고 문 앞에 섰을 때, 여행을 갈 때 차 안에서 출발하기 전에, 또한 무엇보다, 잠 자기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배치해 놓았다. (이제 아이들은 이것이 습관에 배서 기도하라는 말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그 상황이 되면 습관적으로기도한다. 감사한 일이다.)

 

인간이 사춘기쯤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시기가 된다. 누가복음이 특별히 예수님의 사춘기 시절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 당시 주님으로 섬김을 받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와의 대조적인 모습, 또는 그와의 경쟁적인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로마의 황제가 될 아이는 세상을 무력으로지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검술을 배우고, 정치를 배우고, 지배하는 법을 배우겠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

 

누가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와 예수님의 대조적인 이러한 교육은 자녀를 키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상당한 도전이 된다. 청소년기에 우리의 아이들은 어떠한 교육을 받고 있는가?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떠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 교육은 사회화시키는 일이다. 한 사람이 세상의 구성원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교육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아이가 사회화되기를 바라는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대개 아이들을 사회화시킬 때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는 세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준비시키는 데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은 이러한 경향에 강력한 도전을 준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가?’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는 로마에 속한 시민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인가? 지향점에 따라, 습관이 달라질 것이다. 로마 시민이면, 로마가 지향하는 로마 팍스나를 위해서 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겠지만,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데 중점을 둘 것이다.

 

유대인이어도 자신의 시민권에 대한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사춘기 이야기는 예수님의 가정과 예수님이 어디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원했고,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례를 따라, 온 가족이 먼 길을 떠나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갔다. 거기에서 벌어진 사건은 사춘기 예수가 가진 자기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모든 순례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예수의 부모님은 예수가 당연히 자신들의 무리에 끼어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하룻길을 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가 자신들의 무리에 없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찾아 나선다(searching). 그들은 예수를 찾아, 결국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를 마침내 찾아낸다. 사흘이 지난 시간이다.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애탔겠는가.

 

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는 예수를 발견하고 화를 낸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searching)”(48). 엄마의 이러한 꾸지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놀랍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searching)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

 

예수님은 사춘기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형성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어머님, 저를 찾아다니실 필요가 있나요?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찾을 것도 없이,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거를 아셨다면 그렇게 화를 내실 필요도 없을 텐데요.’ 이렇게, 예수님은 청소년기에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었다.

 

부모님은 예수를 찾았지만(searching), 사춘기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찾았다(searching). 그는 성전에 앉아 랍비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질문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searching) 있는가? 또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 가야 만날 수 있는가? 어디로 가며, 어디에 있는가? 누가/무엇이 나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무엇에/누구에 의해 나는 움직이는가?) 누가 진정 아버지인가? 나는 어느 나라 시민인가?

 

이러한 진지한 물음, 이러한 진지한 찾음(searching)이 성장(growing)을 불러 온다. 하나님 나라를 ‘searching’했던 사춘기 예수의 성장이 놀랍다. 우선, 부모에 대한 순종의 성장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 이 순종은 육신의 부모에 대한 순종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을 말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어떻게 순종하는 성숙한 아이가 되도록 할까를 고민한다. 순종이란 아이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일이 아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부여하신)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자질을 깨달아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아이는 당연히 부모의 속을 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를 평화롭게 하고 이롭게 할지 아는 아이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두번째, 성장은 지혜와 키가 자라는 것이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 지혜와 키가 자란다는 것은 어떠한 일(자신에 주어진 임무/책임)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중요한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키가 자라지 않는 사람(키가 자라는 사람: 근육량이 늘어 점점 힘이 세지는 사람)은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한다. 지혜와 키가 자라면, ‘못해요, 못해요하던 것도, ‘제가 할게요!’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보면 흐뭇한 법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철부지 자식이 철이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책임을 훌륭히 해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기쁜 법이다. 성장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무엇을 찾아왔으며(searching), 새로운 한 해, 우리는 무엇을 찾으려(searching)고 마음 먹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우리를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자녀들에게 무엇을 ‘searching’하도록 격려하고 있는가? 세상 나라의 일원으로서 성공하도록 자녀들을 교육하고 있기만 한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는가?

 

나는 믿는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었던 베드로와 요한처럼,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자녀에게 금과 은을 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을 안겨준다면, 우리의 삶은, 그리고 자녀들의 삶은 순종 가운데서 성장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간증이기도 하고, 나의 경험이기도 하고, 나의 교육철학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약 사춘기의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찾고(searching)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성장(growing)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튼실하게 성장하면 된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더욱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그런 한 해였기를, 그리고, 그런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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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