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2. 6. 09:46

헤벨

(전도서 1:1-11)

 

전도서는 히브리어 코헬렛에 대한 번역이다. 헬라어는 코헬렛에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했고, 영어는 헬라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Ecclesiastes). ‘코헬렛의 어근 코헬모으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코헬렛회중을 모으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도서전도하다의 의미인 ‘evangelism’이라는 의미로 잘못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전도서(전도자)’전도(evangelism)’의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회중을 모아 그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자의 뜻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가톨릭 측에서는 전도서를 아예 코헬렛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전도서의 핵심 단어는 헤벨이다. 히브리어 헤벨은 우리 말로 헛되다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소량의 바람’, ‘수증기의 뜻을 가지고 있고, 영어로는 무의미한(meaningless)’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2절을 헤벨이라는 낱말을 넣어서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헤벨, 헤벨! 전도자가 말하노라. 헤벨의 헤벨! 모든 것이 헤벨이다!”

 

성경 전체에 헤벨(허무)’이라는 단어는 73번 등장한다. 그런데, 그 중 37개가 전도서에 집중되어 있다. 인생에 대한 전도서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허무이다. 그러한 허무가 가득한 인생 속에서 전도서에서 묻는 질문은 3절에 나타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서에서 인생을 허무하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때문이다. 산과 들과 바다 등 자연 또는 세상의 항구성(영원성)에 비하면 인간의 삶의 너무나 빨리 증발해 버리는 수증기와 같다. 김빠지는 것처럼 소량의 바람이 휙 부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은 공허하고 허무하다. 인생은 참으로 무의미한 것 같다.

 

전도서에서 나타나는 전도자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하나님은 확실하고 유일한 실재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삶의 전부를 선물로 주신 분이다.

2) 하나님의 방식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사람 편에서 볼 때, “해 아래에서 하는 일”(2:17)이 그저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4) 가장 평등한 것은 죽음이다.

(고든 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4)

 

죽음은 인생을 허무하게,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은 부자와 가난한 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닥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에게 일어날 확률이 불분명하다. 내가 부자로 살지, 내가 가난한 자로 살지, 내가 지혜로운 자로 살지 내가 어리석은 자로 살지, 나에게 어떠한 불행이 닥칠지, 나에게 어떠한 행복한 일이 올지, 아무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인생의 헤벨을 강조하는 전도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우울한 것 같다. 그리고 인생이 헤벨하니, 그 무의미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생을 즐기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오해할 만한 구절이 몇 군데 눈에 띈다.

 

1)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2:24)

2)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3:13)

3)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5:18)

4)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 없음이라(8:15)

5)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9:7)

 

이러한 구절을 보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도가 제시하는 해법은 먹고 마시는 것인양 착각을 불러 온다. 그러나, 전도서의 그 구절들을 자세히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의 행위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에게 선물로 주신 거라는 가르침이 함께 나온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우리가 아는 확실한 것은 모두 죽게 된다는 것, 허무한 삶일지라도, 그 허무한(헤벨)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뿐인 삶을 허무한(헤벨)’ 것으로만 여길 것이냐, 아니면, 허무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길 것이냐에 따라서 인생의 질은 달라진다. 전도서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가 한 일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한 일은 결국 증발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은다 해도, 그 재산을 결국 증발해 버린다. 나의 손에 영원토록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숫자가 아닌 현물로 재산을 측정했던 옛날을 생각해 보라.)

 

렇다면, 기쁨과 즐거움은 어떻게 오는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이익을 확보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할 때 온다. 기쁨과 만족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제어하고 그것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온다. 그러므로, 3절에서 물었던 질문,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인가?”의 대답은, “사람의 모든 수고는 유익이 없다!”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허무(헤벨)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간을 아낀다. 시간을 아껴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면서, 그 이루어 낸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산다. 물론 이것도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건전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이렇게만 살아도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낀 시간이 결국 그들에게 죽음을 피할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는 게 아니라, 시간을 구원해 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신 일은 시간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시간을 내어준다. 시간을 아끼지 않고 내어줄 수 있는 이유는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생(시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신앙은 확고하다. 허무한(헤벨) 인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선포한다. 그 어느 시절보다 인생의 허무를 말하는 시대이고, 허무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시대이지만,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은 허무가 만연한 만큼 처절하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인생의 허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을 궁극적으로 허무하게 만드는 죽음을 물리치셨다고 믿는다. 우리가 인생을 허무하게 살지 않고, 우리의 시간을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이미 구원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우리 두 손으로 이루어 냈다 하더라도 그 수고는 모두 헛될 뿐이다. 그 수고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수고를 하되 무엇인가 이루어 내려는 수고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살기 위하여 수고를 한다. 수고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것을 믿는 자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손과 발에 힘을 주기 보다, 힘을 빼고, 주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을 찬양하며 먹고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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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