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1. 26. 15:23

작은 메시아

(사무엘하 23:1-7)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 왕 주일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다시오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고 믿는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말과, ‘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Christ/크리스토스)’는 헬라어인데 한국말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성경/히브리어에서는 메시아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라는 뜻이다. 고대시대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누군가를 따로 구별해서 어떠한 사명을 맡길 때 하던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이렇게 세 부류였다.

 

오늘 말씀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표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의 마지막 말을 다루고 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1).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이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 (높이 세워졌다).

 

이것은 다윗의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된 것은 자기 스스로의 퍼포먼스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선포이다. 그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왕이다. 사무엘서의 이야기는 다윗의 일생을 전하고 있는데, 어찌보면, 사무엘은 신약의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다면, 사무엘은 다윗의 길을 예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윗 이야기의 특징은 다윗이 원래 왕으로 선택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은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다. 왕권이 세습되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처음 왕 사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은 그의 아들 요나단이 되거나, 아니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유다지파 사람이었다. 유다 지파 사람 중에서도 아주 미약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미약한 집안에서도 막내였다. 사무엘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러 이새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리고 아버지 이새가 하나님의 계획을 사무엘로부터 들었을 때, 아버지 이새조차도 자기의 막내 아들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새는 막내 아들을 양치는 들판에 그대로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만 모아서 사무엘 앞에 세웠다.

 

다윗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성경은 계속해서 다윗의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다윗의 자기 정체성이다. 다윗은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셔서 왕으로 선택되었다. 다윗은 한 마디로,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이다.

 

이러한 다윗의 자기 정체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은 나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불러 주셨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교회라 부른다. 교회가 세상의 어느 집단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또다른 기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부름 받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삼아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Grace/카리스)’라고 부른다.

 

지금 시대는 이러한 개념도 잘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는 은혜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자격(qualified)’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실제로 지적한 학자가 있다. 그 유명한 막스 베버이다. 막스 베버는 그 시대에 성직자들이 카리스에 의해서 지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qualified)’에 의해서 지명되는 것에 대하여 지적했다. 요즘은 다 그렇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자격시험을 치른다. 자기의 학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듯이,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요즘 사람들은 대학교를 들어갈 때부터 직장을 얻기까지, 또는 시집장가를 가는 것까지 온갖 자격을 갖추느라 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까지 들어와 있다. 목사를 청빙할 때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들을 세울 때도 자격을 따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온통 자격자들만 넘친다. 나는 자격이 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는 교만만 넘쳐나고, 자신이 보기에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경멸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갑질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시선은 다윗의 아내 미갈의 시선이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이었다. 미갈은 속으로 자기 자신은 왕비로서 자격이 되는 사람이지만, 다윗은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갈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다윗 성)으로 운반하면서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보고 마구 비웃었다. (삼하 6)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왕 자리에 있으니, 저런 천박한 짓을 하는구나!’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 그녀는 그 벌로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외롭게 죽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춤 추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다윗은 자기 힘으로, 자격이 되어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는 은혜로,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 부음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며 살았다.

 

자격을 논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 철저하게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격과는 상관 없이,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고백하고, 이 은혜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성경은 다윗을 이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3,4).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다윗은 한마디로, ‘Good King’이었다. 다윗은 어둠을 물리치는 아침 빛 같은 사람이었고, 구름 없는 상쾌한 하늘 같은 사람이었고, 아침 이슬을 머금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스스로를 은혜로 구원 받은 자라는 자기 인식, 은혜로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은혜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짐을 받아 교회가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를 겸손하게 경외하는 사람, 어둠을 물리치고, 연약한 자를 돕고, 정의롭게 일 처리는 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은 영원한 약속에 대하여 말한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5).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 (다윗언약).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7:16).

 

이 언약은 다윗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비롯된 언약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댄 언약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언약이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다윗 언약이 세워진 뒤, 열왕기서의 말씀을 통해서 전해지는 다윗 왕가의 이야기는 별로 은혜롭지 못하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뒤, 다윗 왕의 후손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것을 보면, 다윗 언약은 무참히 깨진 것 같고,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다윗 언약을 끝까지 놓지 않고,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메시아를 보내 구원해 주실 거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언약은 우리의 자격에 기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댄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 이렇게 힘을 발휘한다. 다윗 언약을 붙들고 살았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 그들이 소망하던 메시아가 실제로 이 땅에 왔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다른 왕들과 같지 않는 신실한, 그 옛날 다윗과 같은, 아니 다윗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 된 메시아(The Messiah)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의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윗처럼, 그리고 다윗의 자손들처럼, 언약의 사람이 되라. 언약의 사람은 주변여건사정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포로생활하는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살았다.

 

우리가 언약의 사람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작은 메시아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은혜를 반드시 기억한다. “나는 하나님께 은혜로 선택되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 이 구원의 은혜는 한순간도 나를(우리를) 놓지 않는다.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의 내용을 규정한다. 은혜로 기름 부음 받은 작은 메시아로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사람으로 산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연약한 자를 도우며, 정의롭게 일을 처리한다. 우리는 언약의 사람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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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